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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304) (304/310)

〈 304화 〉 테라포밍

* * *

분명 눈을 깜빡하기 전까지만 해도 물밀듯 들어오는 하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물론 정말로 순간 이동을 한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내가 이곳에 서기까지의 일들이 어렴풋 기억이 났으니까.

눈앞에 부드럽게 미소짓는 쉘터장이 서 있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강연대.

허나 그가 강연대 앞에 서 있는 것은 이상치 않은 일이다.

이런저런 일 처리를 하며 쉘터장과는 꽤 안면을 튼 김에, 결혼식의 주례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쉘터장이 강연대에 서 있고, 나는 단상에 올라 그를 마주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어느새 나는 서약 직전인 ‘신랑 입장’까지 마쳤나보다.

“얼굴색은 평소랑 같은데? 다행히 긴장은 안 한 것 같네.”

“푸훗! 아닐걸? 아무리 쟤라도 무조건 긴장했을 거야!”

뒤쪽에서 이강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진 블랑 프랑수아, 박찬영으로서 사귄 첫 친구의 목소리까지도.

그 밖에 여러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오늘 끝없이 맞이했던 하객들의 시선이 하나 되어 나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괜히 등골 쪽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위기 본능 때문일까?

시선을 의식하자 오히려 긴장이 가셨다.

몽롱히 흐려졌던 초점이 잡히며, 조금 더 명확하게 세상의 색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나를 쉘터장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허… 긴장이 풀리셨습니까?”

“나름 표정 관리는 한 것 같은데, 쉘터장님께는들켰나보네요.”

“긴장을 풀어줄 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군요. 참, 결혼식에 긴장하지 않기는 쉽지 않은데….”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쉘터장도 안심했다는 듯이 내 등 뒤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움직임에 나는 눈치챘다.

바로,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신부 등장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큼큼! 하,하객 여러부운! 뒤쪽을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 신랑… 아,아니!!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굵직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식장을 울렸다.

목에 마나를 불어 넣지 않았고, 결혼식장 또한 야외였음에도 그 소리는 하객 전원의 귀에 쏙쏙 박혀 들어갔으리라.

나와 크리스의 사회를 맡아준 이의 목소리였다.

“하하하하!! 신랑이 둘이야?”

“브래액! 네 제자 결혼식인데 네가 더 긴장하면 어떡해!!”

“브랙 교관님! 파이팅! 그래도 조금 진정하세요…!”

사회자는…

테라포밍 세계의 7년 전, 내가 크리스와 함께 인연을 쌓았던 브랙에게 부탁을 했다.

흔쾌히 수락한 것 치고는 많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덕분에 식장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연신 헛기침을 하던 브랙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떠듬떠듬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바로 대사가 적힌 종이다.

며칠간 달달 외워 놓는 듯 보였으나, 혹시 까먹을까 봐 안전하게 보고 읽으려는 모양이다.

“어…. 하객 여러분! 큰 박수와 환호로 신부를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부 크리스 베넷, 입장!”

우렁찬 말이 끝나자 식장에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개개인이 취미 삼아 눈대중으로 만든 조잡한 악기들의 모임이었지만,

십수 개의 한데 모이자 그럴듯한 행진곡이 되었다.

한 명씩 찾아 섭외한 보람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행진곡을 덮을 정도로 많은 박수와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니, 아무래도…

나를 향해 다가오는 신부의 외모가 그만큼이나 어여쁘나 보다.

기대감 비슷한 설렘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내 예민한 청각은 여러 소리 사이에 묻힌 발걸음 소리를 잡아내었다.

그 가볍고 리듬감 있는 소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보고 싶네.’

내 시선은 아직 측면의 브랙을 향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어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크리스를 눈으로 보고 싶지만…

신부가 입장할 때 신랑이 돌아봐도 될까?

그걸 잘 모르겠다.

쉘터장이 우리에게 식순을 설명해 줄 때, 나더라 어지간하면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하라고 하긴 했다.

아마 식장을 가득 채운 하객을 눈치채면 긴장할까 봐 그런 조언을 했던 것이리라.

허나, 내가 모르는 어떠한 의식 같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신랑은 뒤를 돌아보는 등 조급한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던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든다.

쉘터장과 브랙을 비롯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신부에게 관심이 쏠려있다.

신랑이 뒤 좀 돌아보는 거에 신경을 기울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은 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말릴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 돌아보자.

그런 결심을 하고 뒤를 돌던 순간.

그녀는 이미 내 곁에 도착해 있었다.

“…반가워요?”

“……왜 존댓말이야?”

“조,조금 긴장해서…. 헤헤.”

언제나 보아왔던 크리스가, 언제나 보지 못했던 차림을 한 채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토록 궁금해했던 그녀의 드레스 차림.

잠깐 숨 쉬는 것을 의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들숨과 날숨을 잊었을 테니까.

아일랜드 혈통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그보다 더 새하얀 드레스가 어우러져 빛을 내었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실제로 그녀 주위에는 특출나게 명도가 높아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뒤에 늘어선 백여 명의 하객은 커진 눈을 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사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라 놀라버렸다.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고, 또 반투명한 면사포가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힐끗­ 날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몸가짐은 아무리 봐도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다.

나만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저 주홍빛의 특별한 눈이 세상에 둘 있을 리 없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리허설에 이리했다면 지적을 받을 수도 있는 실수다.

아직 사회자가 나더러 신부를 맞이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내밀어진 내 손 위에 살포시 손을 포개는 것으로 내 실수를 덮었다.

“…드레스… 보기 괜찮아?”

“엄청. 응. 어울리…네. 깜짝 놀랐어.”

“그,그래? 다행이다….”

그녀도 내 정장 차림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위아래를 힐끗거리고 있었고,

나는 당연히도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하였다.

의상도 의상이지만…

사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봄이 오듯, 시선의 종착점은 서로의 얼굴이었다.

눈이 얽혔다.

입안에 원인 모르게 침이 고이고, 크리스의 얼굴 또한 서서히 붉어져만 갔다.

그렇게 오묘한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로에게 빠져들려 했지만…

“…하여, 신랑 신부! 맞절!”

브랙의 커다란 소리가 우리를 현실로 끌고 왔다.

그리고, 누군가 이상함을 눈치채기 전에 자연스럽게 맞절을 마쳤다.

과연 초인 다운 반사신경이었다.

다음 순서는 혼인 서약.

드디어 주례를 봐주는 쉘터장의 차례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어깨를 좁히고 나란히 선 우리를 보았다.

그가 내게 물었다.

서로 주름이 져도 처음 그날의 설렘을 잃지 않은 채, 매일 아침 신부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냐고.

나는 자신 있게 웃으며 그렇게 하겠노라 답했다.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매일 듣게 될 사랑의 말에, 시근퉁해 지지 않고 밝게 기뻐하며 자신도 신랑을 사랑한다 말하겠냐고.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하겠노라 답했다.

짧고 간단했지만, 서약은 이로써 맺어졌다.

나는 앞으로 크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내 고백에 언제나 행복해할 것이다.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을 테니, 죽기 전까지 매일.

“……이로써 신랑 박찬영, 신부 크리스 베넷의 완전한 부부 됨을 선언합니다.”

“큼! 주례를 봐주신 쉘터장님의 선언으로 두 사람은 정식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객 여러분은 큰 박수와 함께…”

쉘터장의 선언.

그리고 브랙의 사회를 봐주면서 나는 품절남이 되었다.

내가 유부남이라니, 어쩐지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조금 나이를 먹은 것 같긴 하지만…

의외로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후 이어질 주례사는 참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주례사라는 것이 원래 그러니까.

허나 쉘터장이 센스가 있는 건지,

아니면 하객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한 건지 덕담은 가볍게 끝냈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크리스의 왼손 약지에 끼워 주는 것으로 정식 결혼식은 마무리되었다.

지금 당장 나와 크리스는 식장 뒤편에 마련된 휴식소에서 쉬고 있지만…

밖으로 나간다면, 수많은 사람에게 한 명 한 명 축하를 받는다는 가장 고된 벽을 넘어야 하리라.

“…우리 이제 진짜 부부야?”

“응. 너는 내 아내고, 나는 네 남편이야.”

“……와아….”

크리스가 멍하니 자신의 왼손 약지를 쓰다듬었다.

그전까지는 약혼반지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제는 진짜 결혼반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면사포를 슬며시 치우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크리스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턱을 드는 내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식 도중에 해야 옳지만…

타인 앞에서 스킨십을 부끄러워하던 크리스였기에 생략하기로 했었다.

그러니 이렇게 무대 뒤편에서라도 하는 것이다.

맹세의 키스, 안 하면 아쉽잖아?

“부부가 된 이후 처음 하는 키스는 어때?”

“…조금 색다른 느낌이야. 기분…좋아.”

“킥킥. 크리스. 우리 신혼여행 갈까?”

“신혼여행? 의견은 좋지만… 쉘터 안쪽은 가봐야 거기서 거기잖아. 관광할 곳도 없고.”

“아니. 여기서 말고. 지구에서.”

그녀는 여권이 없어 해외여행까진 불가능하지만, 가볍게 국내 여행이라면 가능하다.

지금의 내겐 차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크리스에게 있어서 한국 여행은 해외여행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한국 태생이 아니니까.

크리스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눈을 조금 피했다.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자신의 눈을 피한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단번에 꿰뚫었나 보다.

역시 내 아내….

“그… 큼. 크리스?”

“찬영. 우리 이제부터 신혼집에서 사는 거지? 여기서는.”

크리스가 내 말을 끊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우선 대답부터 하기로 했다.

“응. 지구 쪽 집보다 훨씬 좁고 더럽지만.”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들지도.”

“이곳에서는 나랑 둘이 있을 수 있어서?”

“그래. 정말 ‘둘만의 장소’라는 느낌이잖아? 그게 좋아서….”

크리스가 진심으로 신난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결혼한 것만큼이나 둘만의 집이 생긴다는 것이 기쁜 것처럼 보였다.

“응. 그러니까 괜찮아. 신혼여행 쯤은 뭐… 둘만 가지 않더라도.”

“…진짜로?”

예상치 못했던 시원스러움이다.

국내 여행이라고는 한들, 명목상 신혼여행에 멜과 자넷 등등을 데려간다고 하면 화낼 줄 알았는데…

나로선 그들을 며칠이나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혼날 각오를 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여기서는 실컷 찬영을 독점할 수 있으니까. 다른 애들은 그것도 안 될 텐데… 이 정도만 해도 꽤 ‘첫 번째’스러운 특권이잖아?”

배려에 솔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한가지 사과를 더 했다.

그녀들에게는 비밀로, 신혼여행 도중에 새로운 소설로 들어가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에는 그 누구도 데려가지 않고, 홀로 진입할 것이다.

위험한 것도 위험한 거지만…

내 목적을 이루려면, 꽤 나쁜 일에 손대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드모드 퀘스트의 존재를 모르는 크리스는,

내가 쉘터의 수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7년 전 제라드에게 홀로 대적한 줄 알고 있다.

사실은 그냥 하드모드 퀘스트 보상 때문에 죽인 거였는데.

여전히 크리스는 내심 나를 인격자로 여기고 있다.

멜과 자넷.

특히 데이지는 나를 한없이 선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수도승이라는 성직자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도 있지만,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서는 내가 생각해도 더러운 짓에 거의 손대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기는 내가 어지간한 행동을 해도 무뎌 보일 만큼 세상이 썩어 있었지 않은가?

‘안젤리는 데리고 가고 싶어도 데려갈 수 없고… 파티원 지정이 불가능하니까.’

아무튼 내 인성을 바르다 평가해주는 그들의 생각을 굳이 뒤엎을 이유는 없었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면만 보여주고,

최대한 잘 보이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존재한다.

그러니 이번 소설은 홀로 들어갈 것이다.

동시에 내가 다른 차원을 여행하는 걸 들키지 않아야 하니,

모두의 시선이 여행으로 집중되는 틈을 이용해 가능한 적응해볼 예정이다.

지구와 ‘히어로 앤 빌런’ 세계를 오가며, 언행에 자연스러움을 묻히는 것을.

“우응! 그래도 신혼여행 기대 된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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