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303) (303/310)

〈 303화 〉 테라포밍

* * *

어쩌면 자신은 선택받은 것이 아닐까?

사춘기의 소년이나 할 법한 오그라드는 생각이지만, 이강인은 과거에 그런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없어 사라진 세계선.

오늘에야 그 처절함을 하루조차 겪은 이들이 없는 만큼 회상하더라도 공감해주는 이는 없으리라.

허나, 유일하게 이강인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자칭 혁명군들의 단체 기습일을 시발점으로, 쉘터의 12개 구역을 무작위로 들쑤시기 시작한 악랄하기 그지없는 게릴라전을.

비록 이강인은 맡은 구역을 수호하던 중, 적의 칼날이 뱃속을 헤집어 몰락해가는 쉘터의 끝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베테랑 전투직으로써 전황이 어찌 흘러가는지는 듣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결말을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이강인은 쓰러졌다.

송장벌레 비슷한 것들이 구멍 난 배의 주위를 기고,

날짐승과 같은 숲의 청소부가 어서 이강인의 한 줌 남은 숨을 멎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이강인은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수백, 나아가 수천이 죽게 될 미래를 그의 손으로 바꾸라는,

그들을 현대의 지구에서 이 판타지 세계로 옮겨 놓은 신적인 존재의 계시라고.

그만큼이나 ‘회귀’라는 건 특별하고도 마법스러운 일이었다.

‘의식이 희미했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우연히 손에 닿은 구슬을 만졌던 것 같기도?’

물론 그가 과거에… 아니, 미래에 목숨을 잃은 자리를 찾아 봤으나 구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죽기 직전이었던 만큼 감각이 이상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으리라.

다시 본론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 따위는 그 누구도 궁금해할 리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선택받은 이는 이강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회귀한 이유는 단지 원인을 만들기 위해.

혹은 사소한 뒤틀림을 일으키기 위함일 뿐…

정말로 선택을 받은 이는 바로,

“오랜만에 보네. 박찬영.”

“그런가? 지난번 너희 구역 감사 갔던 날이 언제였지?”

“한 달은 됐지.”

“으음… 얼굴 본지 좀 됐네.”

처음과 몰라볼 정도로 변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이강인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여태 연락은 거의 없다가 처음 제대로 온 소식이, ‘결혼한다.’야?”

“역시 좀 매정한가?”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와 교관이 연애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설마 이렇게 금방 결혼까지 갈 줄이야.

많은 동기들이 둘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점쳤다.

박찬영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알다시피, 여자 쪽이 꽤 독특한 성격을 지녔지 않던가?

“아. 그러고 보면 선배들이 말하길, 그 미친 행동들 다 연기라고 했나? 우리 같은 병아리들 겁주려고.”

“맞아. 실제로는 엄청 착해. …귀여운 면도 많고.”

“확실히 그때의 우리는 무력이 성장하는 속도에 비해 의식은 못 따라 왔으니까… 혹시 사고가 난다면 다치는 거론 안 끝나니 납득이 되긴 하는데….”

“잘 안 믿겨? 크리스가 착하다는 것.”

“그렇지. 여태 보여준 게 있잖아?”

당연하지만, 이강인은 크리스의 본성을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는 그녀가 진심으로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는 회귀자이지 않던가?

베넷 교관이 필요에 의해 그리 행동했다는 건, 회귀 전 전투직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군이 된다면 정말로 든든하단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총평은, 친구의 반려자가 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여인은 아니란 것이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식은 언제 올린다고?”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질질 끌지는 않을 거야. 최대한 지인만 부르려 했는데… 크리스가 아는 사람이 좀 많더라고.”

“그렇겠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교관이셨잖아? 제자들만 해도 한둘이 아닐 테니.”

“그렇다고 해서 막 많지도 않아. 크리스가 교관 모드일 때는 친해져 봐야 백에 한둘이잖아?”

이강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적지 않은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나름 쉘터를 구한 영웅의 결혼식 아닌가?

조촐하게 치르는 건 이강인으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반려를 찾은 친구를 성대히 축하하고픈 마음도 없지는 않았고.

물론 그의 친구는 영웅으로까진 불리지는 않았다.

대단한 업적을 세운 전투직으로써 넓게 명성을 알렸을 뿐.

아, 그 뒤를 따라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장받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강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과소평가로 보였다.

다들 박찬영이 없었다면 어떠한 미래로 흘러갔을지는 영원히 모를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강인에게 있어서 그의 친구는 대단한 일을 해낸 영웅이었다.

“네가 결혼이라… 리 샤오린이 슬퍼하겠다.”

“…어라? 이강인 너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뭐야. 너도 알고 있었어?”

“나 전투직이 아니라 훈련소 감사직이잖아. 가끔 너랑 종종 보는 것처럼, 걔도 종종 보지 뭐.”

“아하… 알 수밖에 없겠네. 그러면.”

박찬영이 리 샤오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잠깐 그의 친구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자처해서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드는 취미는 그에게 없었다.

“뭐, 그건 새신랑이 알아서 잘할 일이고. 결혼식 날 정해지면 불러.”

“…아직 새신랑 아니야.”

오랜만에 본 친구는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해주고는 그리 사라졌다.

아마 다음에 그를 볼 때는, 다른 동기들 또한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 같았다.

*

이강인이게 선고한 대로 결혼식 날은 가까운 시간으로 정했다.

나 역시 질질 끌고 싶지 않았고, 크리스도 제대로 된 혼인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경조사 휴가? 아. 먼저 결혼 축하하네.”

우선 상급자에게 가서 휴가부터 신청했다.

지금 크리스는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크리스의 것도 내가 대신 신청했다.

“네. 한 3일 정도는 휴가를 썼으면 합니다. 쉘터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신혼여행은 못 가겠지만요.”

“…내가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3일로 충분하겠나?”

“말이 경조사 휴가지, 실제로 제게 그런 복지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전투직이었다면 몰라도, 감사직인 이상 휴가 일수가 까인다네.”

전투직은 경조사 휴가가 따로 나온다는 뜻이다.

물론 안타깝지는 않았다.

나는 휴가를 즐기고 싶으면 언제든 즐길 수 있지 않던가?

“뭐, 휴가는 아껴 써야 하긴 해. 그런 날에는 팍팍 써야 하는 것이 맞아 보이지만… 자네들만 괜찮다면야.”

“감사합니다.”

“휴가… 휴가라… 그러고 보니 자네 친구들, 그러니까 전투직들이 결혼식 참석하겠다며 휴가를 쓰겠군? 단체로.”

“아마 그렇겠죠? 크리스의 제자들도 다 전투직이니….”

“하하하! 그렇게 우수수 빠지면 남은 이들이 고생 좀 하겠어.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의 말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니?

“보통 전투직들이 결혼하면 다 이러지 않나요? 다들 평범히 결혼을 할 테니까.”

“으으음… 아니. 보통은 결혼 안 하지.”

“네? 어째선가요? 다들 돈도 엄청 벌고, 주변에서 대접도 받으니, 좀 위험한 거 빼면 배우자 삼기 딱 좋은데.”

물론 전투직을 반려로 두면 혼자 남겨질 확률이 낮지 않으니 기피될만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배부르게 먹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 않던가?

고작 그 정도 리스크만으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기회를 놓치는 이가 많을 리 없다.

“큼…. 자네도 전투직이니 알지 않나? 그, 남성 전투직은 참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

“여성 전투직이라고 뭐, 그런 걸 누리지 않는 건 아닐세.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다들 안 하길 선택한 것이지.”

테라포밍 세계는 암묵적으로 권력이 존재했다.

재산을 조금만 풀면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안을 수 있는데,

굳이 한 여성에게 평생을 바치는 남자는 얼마 없다는 뜻이 되었다.

아무튼 의도치 않게 이 세계에서 얼마 없는 순정남이 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마침 나 역시 내근직이겠다, 중앙 지휘소에 발을 들일 일이 많았기에 수고를 덜었다.

업무 도중, 틈이 나면 결혼 담당 부서를 찾아가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장소는 섭외했고, 혼인 신고 서류도 미리 작성해 놨고…. 그리고 남은 게… 또 뭐 있지?’

시간이 붙잡을 새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당사자로서 여러 준비를 하며 정신없었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휴대폰이 없는 세계에서 청첩장을 전달하는 것부터가 큰일 아닌가?

심지어는 식장 준비, 예복, 주례를 봐줄 사람을 찾고, 카메라가 없는 세계였기에 화가까지 섭외해야 했다.

시간이 또 지나갔다.

이번엔 어느 정도냐면, 크리스가 시작한 다이어트의 효과가 슬슬 눈으로 보일 정도는 물론…

멀게만 느껴졌던 결혼식 날이 무려 당일이 될 정도까지.

‘거기서 더 뺄 게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더 빠질 줄이야?’

한층 가녀리게 변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특유의 건강미가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7년 전, 고된 훈련에 따라가기 벅차하던 시절의 그녀가 떠올라 보기 싫어진 건 전혀 아니었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모든 준비는 늦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그 살벌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것에는 초인의 체력이 도움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크리스. 정말로 안 보여줄 거야?”

“그,그렇게 애원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구경하고 싶은데….”

“그치만 신부 등장은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잖아! 그럼 난 이제… 대기실로 갈게? 으으, 긴장돼…! 찬영은 안색이 좋네? 안 떨려?”

“나? 나는 그냥… 평범해. 조금 기쁘기도 하고.”

“……응. 히힛. 나도. 이따 봐!”

크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신부 대기실로 사라졌다.

그녀가 입을 웨딩드레스는 같이 골랐으면서 왜 입은 모습은 보여주려고 하지 않을까?

잘 어울리는지 한번 미리 보고 싶다, 이 부탁에 돌아온 대답은 방금 들은 그것이었다.

“하아…. 보통 결혼식은 평범히 넘어가질 않던데….”

혼자 남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인 결혼식은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내 기준.

‘이 전쟁이 끝나면 그녀와 결혼할 거야.’ 나 ‘해치웠나?’ 급의 클리셰인 것이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는 어찌 보면 소설 속 차원이 아닌가?

하물며 이 세계는 평화롭지 않은 것도 한몫했고.

‘…혼란스러워라.’

감이 안 좋은 것이 아니다.

틈날 때마다 수련하는 나의 육감은 오늘 별일이 없을 것이라며 계속해 다독였다.

회귀자인 이강인이 다른 말 없는 걸 보면 큰 사건은 터지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다.

모든 정황은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것이라 예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그냥……

솔직히 말해서. 나도 결혼은 처음이라 긴장했다.

조금 변명하자면 내 결혼식에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마음이 자꾸 떨려와, 그 떨림이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 한계다.

언제나 든든했던 『자연치유』조차 자꾸 들뜨는 심장을 가라앉히는 것에 버거워했다.

그나마 표정 연기 덕에 크리스에게는 내가 긴장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은 것이 희소식이다.

“…에휴. 곧 초대할 하객들 도착할 시간이네. 맞이하러 가야지….”

시간은 내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식장의 입구로 향했다.

툴툴대긴 했지만 꽤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으리라.

훈련소 동기들의 첫 동창회는, 우습게도 내 결혼식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