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 지구
* * *
분주한 아침.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적막이 가득했던 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소란으로 가득 찼다.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말없이 제 할 일에 집중하며 가정의 정적을 담당하는 나와 데이지.
도란도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평균적인 소음을 내는 자넷과 멜.
그리고…
“야! 너 씻고 나서 날개 잘 말리라고 했지! 또 거실에 홍수 났잖아!!”
“네에? 제 연약한 깃털은 헤어드라이어 같은 뜨거운 바람에 닿으면 결이 상해버린다고요!”
“내 알 바 아니잖아! 니가 어지럽힌 바닥을 치우는 건 나라고!”
온종일 싸우는 크리스와 안젤리.
솔직히 이제는 익숙해져서 저 소리가 없으면 불안할 지경이다.
둘이 일정 시간 이상으로 조용하다는 건, 뭔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거거든.
“흥! 그건 크리스씨 잘못이죠! 이제부턴 자신이 집안의 ‘안주인’이라며 살림을 도맡겠다고 하신.”
“…너 그 어깨에 달린 짐짝은 방수 기능도 없냐? 비둘기 날개도 물은 잘 안 먹던데, 조류 그 이하구만.”
“고,고리 다음으로 천사의 상징이 되는 날개를 그런 식으로 헐뜯지 말아주세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지만, 안젤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마 울상을 짓고 있지 않을까?
가만 듣고 있으면 둘의 투닥거림은 재밌긴 했다.
항상 마지막에 가선 내게도 불씨가 번지기에, 언제까지고 이렇게 3자처럼 편안히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둘이 나한테 오기 전까지 최대한의 여유를 즐길 정도의 경지까지 닿았다.
사람은 학습하는 법이다.
“앗! 그러고 보니 크리스씨. 침대 옆 서랍장의 두 번째 칸 안쪽의 물건은 제가 써도 될까요?”
“침대 옆… 침대 옆 서랍…? 앗?! 너,너너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걸 네가 왜 써!”
“그 야시시한 속옷이요? 전혀 사용한 흔적이 없길래, 사놓고 안 입는가 싶어서요. 아깝잖아요? 제게 주면 밤에 꼭 사용할게요!”
“사,사용?! 미쳤어?! 너 절대 입지 마. 아니 건들지도 마! 경고했어!”
“……아. 생각해보니 사이즈가 안 맞으려나? 하핫. 미안해요.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잠깐의 정적.
이후, 크리스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본격적으로 말다툼이 치열해질 것 같길래 여기까지만 듣고 귀를 닫았다.
경험상 둘이 날 찾아오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한 속옷이라….
생각지 못하게 괜찮은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방금의 저 대화는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정했다.
나를 놀래주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크리스를 위해서.
“데이지. 너는 이 소란 속에서도 용케 책에서 시선을 안 떼네?”
“……어어? 소란? 무슨 소란?”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참고로 나는 여태 그녀의 방 안에 있었다.
데이지가 아침 식사 후 당연하단 것처럼 나를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후우. 너 청력 줄어든 거, 어떻게 해결책은 없으려나…. 나름대로 되찾을 방법을 찾아보기는 할게. 미각이나 후각도 마찬가지고.”
“아. 저 밖의 목소리? 이제는 희미하게 들리네. 방금까지는 책에 집중해서 못 들었나 봐.”
내가 걱정하는 낌새를 보이자 데이지가 피식 웃었다.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 호구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종종 불편할 뿐이지, 생활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불로의 비약 때문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걸? 뭐 마음은 알겠는데… 풋.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행동 하기는.”
“귀여운 행동? 내가?”
“희망 주면서 나 달래는 거. 킥킥. 안 그래도 돼. 나는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들만으로, 너무나 만족하거든. 나 겉모습은 이래도, 어른이니까.”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포기했다 말하는 것 치고 데이지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진심으로, 미각이나 후각 따위는 돌아오지 않아도 하등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다행히 지구에서의 생활이 정말 마음에 든 것 같네.’
그녀가 얻은 『구원받은 자』의 효과대로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리라.
단순히, 지금이 그만큼이나 행복한 것일 수도 있고.
그녀는 순순히 포기를 입에 담았고, 나도 당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생을 주는 비약도 직접 만들었는데, 수많은 차원을 뒤지다 보면 그녀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회복시켜줄 수단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가늠조차 안 됐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아…. 또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네. 결혼식 준비 때문에.”
곧 있을 크리스와 나의 결혼식.
안타깝지만 멜과 자넷, 데이지는 하객으로 초대하지 못할 것이다.
식을 올리는 장소를 테라포밍 세계로 정했기 때문이다.
면식이 있는 지인만 부를 예정인데,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그들은 의심을 사기 딱 좋다.
때문에 우리 가족끼리는 이 집에서 따로 축하를 받을 예정이다.
결혼식은 한 번이라도,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는 건 두 번 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데이지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결혼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결혼식? 주변에 누구 결혼해?”
“농담하는 거지? 나 결혼하잖아. 크리스랑.”
“……뭐어?!”
동그란 그녀의 동공이 평소보다 1.5배는 커졌다.
꽤 귀여웠지만,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나도 당황해버렸다.
설마 데이지만 몰랐나?
“…내가 얘기 안 해줬나?”
“이,이이 머저리야!! 안 해줬어!! 금시초문이라고!!”
“주변에서도 못 들었어? 자넷이나 멜, 하다못해 안젤리조차 그 이야기로 한동안 떠들썩했는데?”
“난 거의 하루종일 너랑 있잖아! 그리고 독서할 때는 바로 옆 네가 하는 말조차 잘 못 듣고!”
내가 안 해줬다면 모를 수밖에 없었단 뜻이다.
어떻게 한 집에 6명이 같이 사는 환경에서조차 아싸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참 여러 의미로 충격적인 레벨의 친화력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당장 내일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나무라진 말아줘.”
“…어라? 나 방금 화냈어?”
“화까지는 아니고… 당황?”
내 대답에 데이지가 한층 더 당황했다.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결혼한다라… 생각해 보면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보면 널 깜빡 잊었던 거니, 조금은 화낼 만도 하지?”
“……그런가?”
결혼, 결혼이라…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복잡할 법했다.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는 건 상당히 색다르게 와닿곤 하니까.
특히 비슷한 나이라면, 내가 그 정도로 늙었나 확 체감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뭐어. 어쨌든 축하해. 너 같은 바보도 드디어 철 좀 들려나?”
“하하하. 글쎄?”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데이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꺼내려 했는데 마침 기회가 딱 생겼다.
“데이지. 혹시 결혼 축하 선물 좀 미리 받아도 되냐?”
“선물? 선물 달라고?”
“응.”
“어… 어어… 마음이야 당연히 축하 선물을 주고 싶긴 한데…”
데이지가 자신 없다는 듯 말을 흘렸다.
그럴만한 것이, 지금 그녀의 방 안에 있는 건 전부 내가 준비한 것들이 아닌가?
그녀의 개인 물품 또한 하나도 빠지지 않고 꿰고 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내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나온 물건, 혹은 아직 보관 중인 물건들이니까.
“그리고… 큼…”
“응?”
“……줄 수 있을 정도로 귀한 게 내게 있었다면 진작에 너한테 줬을 거야. 딱히, 축하 선물이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꽤 기특한 말을 하며 고개를 픽 돌렸다.
방금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것이, 이미 내 인벤토리에는 최상급 포션이 몇 개 들어있지 않은가?
비상용 재료조차 전부 써버리려는 그녀를 뜯어말리면서까지 선물 받은 것이다.
‘아마… 이젠 줄 수 있는 게 거의 남지 않았겠지.’
다행히도, 오늘 내가 바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가진 재능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인벤토리를 뒤져 커다란 흑색의 덩어리 한 개를 꺼내었다.
나조차 들기 버거울 정도로 너무나 무거웠으나,
어떻게든 팔다리에 마나를 불어 넣어가며 겨우겨우 방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살포시 놓았다.
“휴우. 방이 넓은 게 다행이네. 못 꺼낼 뻔했잖아?”
“…이건 뭐야?”
데이지가 방 중앙을 차지한 것을 보고는 의문 어린 얼굴을 했다.
확실히 이 덩어리는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특별함이 없어 보인다.
그냥 칠흑색의 고철 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실체를 아는 내겐 완치된 다리가 아려오며 PTSD가 올라왔지만.
“액체 금속이야. 정확히는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호신용 골렘…이었어. 지금은 내부 회로며 동력이며 죄다 박살 났지만.”
“액체…금속? 골렘?! 그것도 그 전설의 연금술사의?!”
그제야 데이지는 액체 금속으로 다가가 천천히 손으로 쓸어보며 놀라워했다.
그녀가 액체 금속 골렘을 아는 건 이상하지 않다.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비밀 실험실에 있던 수많은 암호화 서적들.
그중에서 불로의 약과 관련 있는 건 일부뿐이었고,
어떠한 분야에 치중되지 않은 채 다양한 분야의 고등급 지식이 남겨져 있었으니까.
내가 손수 옮겨 적어가며 암호를 그리다니아어로 번역했기에 알고 있다.
서적 중에서는 액체 금속 및 골렘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때의 난 연금술을 익히기 전이라 옮겨 적으면서도 티끌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항상 트리스 메기스투스가 남긴 책을 읽는 그녀라면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성능대로라면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전투 골렘은… 그,그게 이런 고철 덩어리라고??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메테오라도 여러 대 맞았나?”
“좀 많은 일이 있었지.”
“자,잠깐. 잠깐만! 그러고 보면 너… 오래전 다리를 고쳐줄 때, 골렘이랑 싸우다 다쳤다고 하지 않았어?”
“……이야. 너 그걸 아직도 기억해?”
“그 골렘이 일반적인 전투 골렘이 아니었다고?! 솔직히 평범한 강철 골렘과 싸워 이긴 것도 왕실 기사급인데… 그,그 서적 속 골렘과 싸웠… 아니… 내 머리로는 이해가…”
데이지가 책장에 꽂힌 책을 보고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손수 번역해 적어준 책들이다.
저 안에는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이상적인 전투 골렘에 대한 내용도 적혀 있으리라.
“이,이이 무모한 놈아… 그거 알아? 그 골렘 한기라면 단신으로 군대에 대적할 수 있다고 했어…. 당연하지. 지치지 않고, 고위급 마법사가 아니라면 타격조차 입히지 못할 테니까…”
“확실히 많이 강하긴 하더라. 어설프게 마나를 담아 때리면 흠집도 안 났고… 왕위 찬탈전 때 왕실 기사단을 상대했던 것보다 배는 힘들었어.”
“하하… 하… 그런 골렘을 마법도 아닌 물리력으로 이렇게…… 넌 내 상상 이상으로 괴물이었구나.”
“야. 사람보고 괴물은 아니지.”
“…응. 그렇네. 너는 괴물이 아니라 영웅…이 더 가까워. 하긴, 무력이 그쯤 돼야 네 행보가 납득이 된다.”
“또 그렇게 순순히 칭찬하면 부끄러운데….”
데이지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솔직히 이 골렘을 이긴 건 ‘마나 무한’이라는 치트를 썼기 때문이지,
순전히 내 무력으로 일궈낸 것은 아니었기에 양심이 좀 아파왔다.
“그래서. 이 어마무시한 물건은 왜 보여줬어? 앗. 참고로 그 골렘을 그대로 만들어 달란 건 무리야. 부끄럽지만… 내 실력 밖이거든.”
“많이 어렵나 보네.”
“최소한, 아주 최소한으로 잡아도 불로의 영약급이야.”
“오? 그럼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건가?”
“…나는 네 도움을 받기 전에도 몇 년은 연구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적어도 기초는 쌓여 있었어. 애초에 물약 쪽이 내 전공이기도 했고… 하지만, 골렘은 좀 달라.”
“아하.”
“재료는 둘째 치고, 이 머리핀 속 골렘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적어도 몇 년은 필요해.”
데이지가 자신의 앞머리에 꽂힌 머리핀, ‘기억의 조각’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당분간은 절대 불가능하니 마음에 두지도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괜찮다.
애초에 골렘을 만들어 달란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 위력을 내 몸으로 맞아봤기에,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는 뼛속에 새겨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데이지에게 밝혔다.
이 골렘… 아니, 액체 금속 덩어리를 꺼낸 이유를.
“이걸로 갑옷을 만들어줬으면 해. 그 골렘처럼 AI 탑재가 아닌, 내 의지 아래에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여태 나는 테라포밍 세계에서 얻은 백원후의 가죽 갑옷을 주로 입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초기 장비잖아?
템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듯.
나도 슬슬 장비 스펙을 올릴 때가 되었다.
그만큼이나, 내가 다음에 들어갈 ‘히어로 앤 빌런’이란 세계는 위험했다.
“가능하겠어?”
“…따지고 보면 골렘이랑은 좀 다르네. 으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그리고 그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고.”
데이지가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상념에서 멈추지 않고, 이것저것 책을 꺼내며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데이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덜컹!
“찬영!! 이 비둘기가 자꾸…!!”
“찬여엉!! 크리스씨가 또 괴롭혀…”
하지만…
나는 곧 두 여자에게 잡혀 방에서 끌려 나왔다.
데이지는 내가 나간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책에 빠져있는 듯싶었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