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지구 *
* * *
“여보세요? 지금 통화되나요 엄마?”
솔직히 고다연도 자랑하고픈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인생 첫 연인.
그것도 평생을 뒤진들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너무나 사랑하게 된 남자다.
“다름이 아니라… 저 얼마 전에… 큼큼. 나,남자친구 생겼어요.”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자랑하기 위해 연애 소식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떨어져 산다고 한들 한결같이 고다연에 대해 관심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금까지 있는 것이, 누군가는 속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고다연을 억압하려고만 들었다면 자취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윽! 농담이 아니라! 진짜인데? 음… 나이 차이는… 안나요.”
그래도 가끔은 답답함을 느낀 적이 없다 하면 거짓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는 것이 고다연의 부모란 사람이니까.
연애 중이란 사실을 오래 숨기면 삐질 수도 있다.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를 시켜 줄 때.
남자가 삐진 부모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 상상만 해도 숨 막히는 일이 발생하는 건 그 누구도 원치 않은 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고다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핸드폰을 들었다.
“…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어쩌면… 제가 부족할 정도로.”
딸의 연애 소식에 부모로서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질문.
고다연은 푸근하게 웃으며 걱정을 달래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기에, 따로 연기하지 않아도 진심이 어린 말이 나왔다.
“에이. 엄마도 잘 알잖아요. 저 그런 성격은 아닌 거. 걱정 마요. 연애도… 해야 하는 건 전부 하면서 만날 거예요.”
아무리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연애 놀이에 빠져서 자기 일마저 내팽개치는 건 원치 않았다.
아마도, 남자 쪽 역시 고다연과 마찬가지의 생각이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자,잘생겼냐니… 그건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른 거잖아요! 뭐… 제 눈에는 멋…지죠.”
연애를 하는 것도 처음이기에, 가족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처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고다연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으며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으으…! 계속 놀릴 거면 끊어 버릴 거야.”
부모로서의 걱정.
그다음은 첫 연인을 사귄 딸에 대한 축하였다.
비록…
그 모든 축하의 말이 고다연에게는 놀리는 것으로 들렸지만.
“남친 사진…은… 안 그래도 방금 제 프로필 사진에 올려놨… 앗! 지금 보지는 말고! 나중에, 전화 끊고 나서 보세요!”
하지만 고다연이 급하게 한 경고는 닿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는 이미 몇 분 전 갱신 된 그녀의 프로필을 확인하는 듯했다.
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마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면, 끝없는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사진 속 남자의 얼굴도, 그 배경도 조금 특별하지 않던가?
“……후우….”
아니나 다를까.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핸드폰이 지잉, 지잉,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당연히 ‘엄마’였다.
그 울림을 무시하고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아마 그녀의 어머니도 고다연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았으리라.
운전을 하느라 정면을 바라보는 남자의 옆모습이 담긴 사진을.
딱히 의도하고 찍은 것은 아니지만…
언뜻 드러난 핸들에 새겨진 로고는, 차를 잘 모르는 이도 ‘이거 비싼 차 아닌가?’라며 알아보는 메이저한 브랜드였다.
무엇보다 로고가 가려졌다 한들 차의 내부가 국산 차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디자인이었다.
“…지금이라도 사진 내릴까?”
가족은 물론, 친한 친구가 아닌 이조차 마음껏 볼 수 있는 프로필 사진.
연인의 모습은 그녀에게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당연하지만 남자에게 이 사진을 프로필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물론, 이 사진이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냐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시선을 확 당길 정도로 멋졌다고는 차마 고백할 수 없었으니까.
“…….”
프로필 수정 버튼에서 몇 분 망설이던 고다연은…
결국 사진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이왕 대학 전체에 그녀의 연애 소식이 밝혀졌으니, 자신의 연인이 이토록 멋지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박찬영이란 남자는 모난 곳 하나 없지 않던가?
그가 유독 매력 있어 보이는 건 고다연의 눈을 덮은 필터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다,다들 남자친구 자랑 정도는 평범히 하잖아… 나도 조금쯤은 해도… 되지 않을까?”
팔불출이라 타박하는 이는 물론, 듣는 이조차 없었지만 괜스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사진을 보고는 그녀와 친하다 생각하는 이들은 전부 메세지를 보낼 것이다.
허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훨씬 전부터 천 단위의 읽지 않은 메세지가 쌓여 있었기에,
이제 와서 조금 늘어나는 것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부재중 메세지를 전부 읽는 건 포기한 지 오래다.
*
성실하고, 성격 좋고, 예쁘기까지 한 고다연.
그럼에도 남자와는 쉽사리 터놓지 않는 것이,
한 번 마음을 얻게 되면 결코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을 것이란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일편단심의 예쁜 여자친구.
선후배 가리지 않고 많은 남자의 마음을 사뭇 설레게 만드는 단어 아닌가?
허나 고다연의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었다.
당연히 왜 남자친구를 안 사귈까, 라는 질문이 꼬리처럼 따라다니고는 했다.
사실 몰래 연애 중이다, 단순히 바빠서 연애할 틈이 안 나는 거다, 심지어는 동성을 좋아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얼마 전 그 예측이 전부 잘못됐음이 밝혀졌다.
예상외로 간단했다.
그냥…
눈이 엄청나게 높았던 것이다.
“따흐흑…. 난 다연이라면 분명 얼굴보단 성격을 중요시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남자친구가 비싼 레스토랑이 아닌 평범한 분식집에 데려가도, 활짝 웃으면서 좋아할 줄만 알았는데….”
“바보도 알 수 있는… 민달팽이… 흑흑….”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남자가 실연을 겪었다.
그 남자친구라는 상대가 어떻게 비빌 수 있을 수준이면 포기하지 않는 인물도 한둘쯤 나왔겠으나…
안타깝게도 턱은 높았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차를 끌고 고다연을 데리러 오는 그 남자친구를.
항상 연인을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기 위해 교내 카페에 들렸기 때문에,
5시 이후 카페 근처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관심 없는 사람조차 한 번은 시선이 향한 적 있을 정도로 그의 외모는 너무나 눈에 띄었다.
마침 오늘도 남자가 고다연을 데리러 오는 날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강의실 앞에서 그녀를 마중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녀의 두 친구가 없었고,
덕분에 차 안에는 둘 밖에 타 있지 않았다.
“혹시 제가 자주 데리러 오는 게 부담되시려나? 당장 창밖만 봐도 시선이 몰리는 것 같고… 조금 빈도를 줄일까요?”
“아뇨. 이 정도는 뭐… 괜찮아요! 평소랑 별다를 것도 없는 것 같아서?”
“하하. 그러고 보면 다연씨 인기인이었죠?”
“이,인기인은 아니고…….”
고다연은 옆을 슬쩍 보면서 변명했다.
프로필 사진 속 그대로, 남자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만 돌려주고 있었지만….
섭섭하긴커녕 오히려 기뻤다.
실컷 옆 모습을 구경해도 남자는 잘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쪼옥,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음료를 사야 하는 건 그녀다.
고다연을 데려다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한 채 찾아와주는 건 남자가 아닌가?
그 덕에 고다연은 교통비를 아끼고 있고.
평생 운전대를 잡아본 적 없는 그녀지만, 운전은 사람을 쉽게 피로하게 만든다는 건 알고 있다.
생각을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건 고다연의 큰 장점이다.
저번에 음료는 자신이 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
남자가 말하길 내리기 전 자신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했다.
그 대답이 그녀를 순식간에 수줍게 만들어버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제가 커피 살래요. 이대로는 너무 찬영씨한테 기대는 것 같아.”
“어라? 이 이야기, 저번에 동의하지 않았나요?”
“그,그건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기습한 게 비겁해요!”
“그럼 내릴 때 키스는?”
“키…스는…… 딱히 커피 안 사줘도 해줄 테니까.”
그제야 남자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이제 와서 어린애 키스 정도로 쑥스러워질까?
“정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만 사주세요. 매일 사주면 교통비 아끼는 의미가 없어지니까.”
“네… 그럴게요.”
쪼옥, 괜히 목이 타 커피를 한 모금 더 물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어젯밤 꺼내기로 결심한 말을 한다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를 터무니없는 변태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좋아… 하려나?
“저기… 찬영씨.”
“네?”
“내일… 그… 주말이네요?”
“아. 벌써 시간이? 빠르네요.”
“…예전에 찬영씨 방 구경, 재밌었어요.”
“그래요? 별로 볼 것도 없었을 텐데. 다행이네요.”
“그럼… 찬영씨도 제 방 구경해 보실래요? 이번… 주말에.”
아주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조차 제대로 꺼내기는 했는지 의심할 정도로 작은 소리.
허나 남자는 귀도 밝은지 똑똑히 들은 것만 같아 보였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도 멈췄겠다, 남자의 시선이 고다연을 향했다.
“…다연씨 방이요?”
“그,그게… 네에…”
“엄청 궁금하긴 한데… 의외의 제안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남자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신호’인지, 아니면 그냥 말 그대로 초대만 하는 것인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니 고다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똑똑히 밝혔다.
남자를 초대하는 이유를.
“저,저희 처음 이후 한 번도 안 했잖아요?”
“…….”
“그… 저 곧 있으면 오디션 때문에 바빠질 예정이고… 그날 저도 싫지 않았고… 아직 피,피임약도 먹고 있……. 으읏! 왜 절 그런 눈으로 봐요!”
“제가 어떤 눈으로 봤길래?”
“……한참 어린 조카가 재롱을 피우는 걸 보는 눈이요.”
“정확히는 귀여워 죽겠다는 눈, 이죠.”
같은 의미였다.
그것을 알기에 고다연도 확 부끄러워진 것이다.
“차,찬영씨 잘못이에요! 그날 이후로 은근히 원하는 티라도 냈으면 몰라, 전이랑 달라진 것 없이 가벼운 데이트만 하고 슝 가버리니까 제가 얼마나 복잡했는데…!!”
“으음… 나름 첫 경험의 여파가 가라앉을 때까지 참은 거였는데… 그렇게 보였나요?”
“……참은 거였어요?”
“당연히 열심히 참은 거였죠.”
참은 것이었다는 말에 고다연이 조금 얌전해졌다.
해명 또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충분히 이런 배려를 보일법한 사람이고,
실제로 첫 경험 이후 몸의 컨디션이 며칠간 좋다고는 말하지는 못했으니까.
“큼! 큼! 그,그럼… 이번 주말에 오시는… 건가요?”
“꼭 갈게요. 내일이라… 못 기다리겠네.”
“윽…!! 웃음기 안 거두면 나 삐질 거예요.”
“푸흡. 앗, 미안해요. 무서운데 조금 귀여워서….”
고다연은 최선을 다해 치솟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뾰로통해 있었다.
자신의 용기를 보고는 이리 웃다니?
비웃음이 아니란 건 알지만, 괘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런 고다연의 얼굴을 보고는 살짝 어색하게 표정이 변했다.
불안함을 감지한 듯했다.
“으음… 참고로 이따 차에서 내릴 때 키스는?”
“……오늘은 없어요!”
“아. 망했네.”
말은 이리했던 고다연이지만…
결국 내릴 때쯤 되어서는 화가 다 풀려버려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녀로선 결코 동의하지 않겠으나, 그녀는 연인 한정으로 너무나 쉬운 여자였다.
평소 보여온 모습 덕에, 당연히 고다연 쪽이 연애 주도권을 쥐고 있으리라 생각한 대학 친구들의 예측은 모조리 틀렸다는 뜻이다.
이렇게 그녀의 첫 연애는 순조롭고 행복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고다연의 오디션에 집중해야 했던 탓에. 그리고 남자는 말 못 할 이유 때문에 둘의 데이트 횟수가 조금 줄었지만,
마음은 크기가 커져갈 뿐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고다연과 박찬영은 연인이다.
관계가 앞으로 나아 갈지언정…
뒤로 후퇴할 일은 결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