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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300) (300/310)

〈 300화 〉 지구 *

* * *

네가 왜 여기 있어?, 누가 커플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허나 놀란 건 백하민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놈이 고다연을 보고 눈빛이 변했다.

호의적인 눈은 결코 아니었다.

‘이 새끼는 그렇게 처맞고도 사람이 덜 됐네.’

녀석을 까맣게 잊었던 나와 달리, 놈은 나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나 보다.

분명 난 외모가 천차만별로 바뀌었음에도 녀석은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적어도 대학에 다닐 동안에는 계속 눈치를 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죽을 정도까지 처맞아서 감히 내 눈을 마주할 용기는 없어 보였지만.

그렇게 내게는 꼬리를 내렸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 더러운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았다.

성폭행 미수 피해자를 만난 가해자.

현대 사회의 도덕 관념을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스러움을, 놈의 눈빛 속에서는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

오히려 고다연을 적대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나도 니년이랑 만나기 싫어. 그날 이후 내게 사과 한마디도 없…!!”

“목소리 높이지는 말지? 귀 아프잖아.”

나는 버럭 화를 내려는 백하민에게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는 높지 않고, 평온하며, 욕설조차 섞이지 않은 조용한 말이었지만…

녀석은 내 경고대로 눈을 조용히 내리깔길 선택했다.

만약 고다연의 앞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경고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번에 제대로 서열 정리를 해놓았기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움츠러드는 나와 달리, 고다연에게는 강하게 나가고 있었다.

뒤룩뒤룩 살이 붙은 덩치만 믿고 겁주려는 것일까?

원래 생각이 없는 놈이다 보니, 처맞기 전까지는 대책 없이 뻗대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 이 새끼는 이런 놈이었지.

오랜만에 마주한 놈의 역함에 열이 올랐다.

“……사과요? 제가? 당신이, 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추,추잡하게 SNS에서 나를 쓰레기로 정치질해놓고……”

백하민이 내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와 있었던 사건 이후.

녀석의 삶이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가 겪는 모든 건 본인이 자초했기 때문이었음을 대학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으나,

유일하게 백하민 혼자서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나 보다.

“SNS의 그건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 후우… 아니에요. 그냥… 그냥 가세요. 여태까지처럼 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고요.”

고다연이 미간을 좁히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녀석과 말을 섞어주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임을 깨달았나보다.

역시 똑똑하네.

고다연이 옳았다.

놈은 말로 해서 들어먹는 부류가 아니었다.

줘 패가면서 몸에 새겨 넣어야 듣는 타입이지.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과 감히 군소리를 못 할 정도로 굴복시키는 것.

내가 둘 다 한 번씩 시도해봤기에 어떤 방법이 빠른지는 잘 알고 있다.

“헤엑… 헥… 겁나게 빠르네….”

“흐,학… 나 달리기 못 한,다고 했,잖아…!”

“콜록콜록, 야! 고다연! 대체 뭔 약속이길래 말 안 해주고 도망을 치는 거야?”

나와 고다연, 백하민.

냉기로 가득 찬 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채 누구도 달갑지 않은 대화를 하던 그때.

고다연의 뒤쪽에서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이 달려왔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녀가 대학에서 혼자 다니는 일이 더 드무리란 걸 알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야 근데 저기 조합이 좀 이상하다?”

“왜? 헉! 오늘이 바로 미래 신랑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일이었나?”

“아니. 농담 말고… 그 옆을 봐봐.”

“……아.”

자연스럽게 고다연의 옆에 선 두 명의 여자들은 우리의 얼굴을 살피고는 표정을 굳혔다.

정확히는 백하민의 얼굴을 보고 나온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나보다 훨씬 녀석의 소문에 대해 빠삭할 테니까.

마침 좋은 타이밍이다.

화제를 돌릴 겸, 녀석에게 경고도 할 겸…

나는 밝은 얼굴로 여자들에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혹시 다연씨의 친구분들인가요?”

“앗! 찬영씨! 잠깐…!”

당황한 고다연이 말리려 들었지만 지금은 모르는 척을 했다.

그녀들은 나의 살가운 인사에 금방 백하민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연이랑 아는 사이인가요? 친오빠? 그러고 보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오빠분 이름은 뭐예요?”

“키 엄청 커요! 혹시 몇 센티?”

서로를 XX씨, OO씨라 호칭하는 남매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부르는지 들었으면서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기는.

“하하하!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성씨를 보면 아시겠지만, 다연씨랑은 오빠 사이가 아니죠.”

“그럼 설마?”

“네…. 조금 쑥스럽지만 교제 중입니다. 오늘은 다연씨를 데리러 찾아왔죠.”

부끄럼 많은 내 연인이 입을 틀어막기 전에 서둘러 말해버렸다.

또박또박 말했기에 대부분의 이들이 들었으리라.

울상이 된 고다연. 눈을 연신 깜빡이며 벙쪄있는 두 명의 친구들. 경악에 찬 백하민은 물론…

모르는 척 우리 대화를 흥미롭게 엿듣던 주변 학생들까지도.

“으으으… 이럴까 봐 쟤들 떼어 놓고 달려 온 건데….”

“…다연씨? 이거 아직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요?"

“안되는 건 아닌데… 아니긴 한데… 으아아… 저도 이젠 몰라요….”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이 꼴깍꼴깍 마셨다.

아무래도 다가올 질문의 쓰나미 생각에 속이 탔나 보다.

곧.

흥분한 두 명의 친구들이 내게 여러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고다연의 친구들에게 웃어주는 한편, 동공만을 돌려 굳어있는 백하민을 보았다.

놈에게는 마치 자신을 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엄마야. 진짠가 봐….”

“여,여태 다연이가 꼭꼭 숨기던 이유가 있었네…. 나 같아도 숨긴다 이건….”

세 바퀴 정도 질문에 대한 답을 끝낸 뒤 슬슬 도망칠까 고민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백하민.

녀석에게 ‘고다연은 내 연인이다.’라는 은유적인 경고를 하긴 했지만…

놈이 제대로 내 경고를 알아들었다는 확신을 못 했다.

녀석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머저리니까.

그러니 친히 말까지 해주기로 했다.

나는 놈의 곁에 다가갔다.

다행히 고다연의 친구들은 백하민에게 다가가기는 싫은지 내 뒤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놈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은 채.

겉으로 보기엔 사이좋아 보이지만…

실은 쇄골 옆 관절 부근에 위치한 엄지를 이용해 탈골 시킬 기세로 힘을 주며,

한창 몸을 딱딱히 긴장시킨 놈에게 최대한 소리를 죽여 말했다.

“으으윽…?!”

“얼굴 좀 편안히 해봐. 난 아직… 아직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파하는 표정 하면 곤란해지잖아.”

“아,알겠어.”

엄살 많은 놈답게 금방 일그러지는 얼굴을 억지로 피게 만들었다.

따로 웃으라고는 안 했는데 부들거리며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조금은 우스웠다.

그래도 어설프게 면도 된 콧수염에 식은땀이 맺히는 추한 꼴을 가까이서 오래 보기는 싫어,

빠르게 용건만 마친 뒤 놓아주기로 정했다.

“들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누구에게 민폐를 끼치든 크게 상관은 안 하는데…”

“…….”

“내 눈에는 띄지 말자. 그게 서로 좋잖아. 알지?”

­ 끄덕끄덕!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참 쥐고 있느라 묻었던 물기도 놈의 산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옷에 닦았겠다,

나는 떨어져 있던 고다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깨끗해진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갈까요?”

“…네.”

고다연은 얌전히 내게 이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푹 숙인 고다연은 연신 망했어, 망했어, 하며 중얼거렸다.

두 명의 친구가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고는 실실 웃으며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구들의 말 없는 놀림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오래 가지 않았다.

손에 차가운 음료도 들려 있겠다, 고다연은 몇 분 만에 어느 정도의 뻔뻔함을 찾는 것에 성공했다.

애초에 표정 관리가 능숙한 그녀기도 했고.

백하민을 만난 것 때문에 답답한지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 먹던 그녀가 나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여 귀를 가져다 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나왔다.

조금, 예상치 못한 질문이.

“그… 혹시 백하민 그 사람이랑 친구는 아니죠?”

“네에? 친구요? 제가? 걔랑?”

“앗! 아닌가요? 아까 어깨 짚은 것도 그렇고 좀 친해 보이길래….”

“걔랑 제가 친구라니….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몰라도.”

“…찬영씨도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었나요?”

“저도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라고 말하려 해도… 생각해 보니 걔가 유일하네요?”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이죠? 음, 듣지 않아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휴우….”

고다연은 안도의 의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혹시 내가 백하민과 친하면 어쩌지, 라는 고민을 품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남몰래 놈에게 고통을 주려다가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러한 질색할만한 오해는 금방 풀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게 네 명이 함께 도착한 주차장.

나는 최대한 들떠 보이지 않게 내 차를 고다연에게 소개했다.

“…정말 이거라고요?”

“정말 이거예요.”

“자랑한다고 하시길래 이쁜 차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얼떨떨한 표정의 고다연에게 어서 타라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문까지 열자 농담하는 건 아니라는 게 확정 났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보조석에 탑승했다.

“친구분들도 근처 역까지 태워 드릴까요? 미안해요. 원래는 집 앞에 내려드려야 하는데… 저희 둘이 이후에 약속이 있어서.”

뒤를 돌아 멍하니 차를 구경하던 두 친구를 향해 권유했다.

마침 사람이 딱 맞아서 다행이다.

“아뇨…! 괜찮아요! 태워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죠!”

“네네! 맞아요! 게다가 이런 차는 살면서 한 번도 안타 봤고….”

“뒷좌석은 조금 좁을 텐데, 괜찮으실까요?”

“헤헤…. 먼 길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런데… 차 안에서 사진 찍어도 되나요?”

“당연히 되죠.”

나는 그녀들이 뒷좌석에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조금 좁긴 하지만, 그래도 둘 다 마른 타입이었기에 딱 맞게 탈 수 있었다.

운전을 하는 사이 휴대폰 카메라가 찰칵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고다연도 SNS를 많이 하는 것답게 연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셀카를 찍는 친구와의 차이점은, 그 렌즈가 운전하는 나를 향해있다는 것이었지만.

“다연씨. 뭘 그렇게 찍으세요?”

“운전 중인… …남친.”

남친이라는 단어에 뒤에 탄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고다연은 갤러리를 보고 싱글벙글거리는 것이, 그만큼이나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이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연애 중인 여자애들은 꼭 남자친구가 운전 중인 사진을 프로필로 해놓곤 하더라.

연인이 운전에 집중한 사진, 남자의 시선으로는 알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 걸까?

“친구분들? 괜찮은 사진 필요하시면 뚜껑도 잠깐 열어 볼까요?”

“헉! 이 차, 뚜껑도 열리나요?”

“으으… 궁금하긴 한데… 여기 학교 근처라서 아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아쉽게도 오픈카를 겪는 건 다음으로 미뤘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

그럼에도 그녀의 친구들은 신나 보였다.

친구가 꼭꼭 숨기던 연인을 실물로 본 것으로 모자라, 꽤 괜찮은 사람인 것도 알았고, 차를 빌려 타 쓸만한 사진까지 얻었으니 당연하다.

어쩐지 고다연은 조금 자랑스러워 보였다.

아닌 척 해도 친구들이 호들갑 떠는 것이 기분 좋나 보다.

‘다연씨, 내일부터 조금 고생하겠네. 그래도 밝힐 때 됐긴 했지. 그래야 찝적 거리는 놈도 떨어질 테고.’

조금 전에 구경하던 이름 모를 학생조차 나와 고다연이 연애 중이란 것을 들었다.

게다가 내가 이 차에 타고 내린 걸 본 사람도 무척 많으니, 아무래도 나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 뻔하다.

그 어떤 잘난 놈이라도 쉽사리 고다연을 노리지는 못하리라.

그 밖에는…

내가 아주 잘살고 있다는 것이 백하민의 귀에 들어가면 놈의 배알이 좀 꼬이겠지만,

그야말로 원하는 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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