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지구 *
* * *
“으아…….”
고다연은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던져진 핸드폰은 쏟아지는 연락들과 반대로 고요했다.
죄다 알람을 꺼놓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반쯤 포기하게 되었다.
읽지 않은 메세지들이 걷잡을 수 없이 쌓여서, 꼬박 하루를 소비해도 그 전부를 읽을 수 없을 지경에 달했기에.
이들은 지치지도 않나?
어떻게 며칠이나 그리 사람을 달달 볶을 수 있을까?
SNS 및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으로 연애 중인 것을 티 내기 시작한 이후.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질문은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우우웅.
그러던 중.
소음 하나 없던 핸드폰이 진동에 떨었다.
지쳐 축 처진 고개가 번쩍 들리고, 보기도 싫어서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향해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알람을 끄지 않은 사람은 몇 없었는데, 그중 언제나 연락을 기다리던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찬영씨다….”
메세지의 송신인을 확인한 고다연은 예상하던 이가 맞았음에 기뻐했다.
밀리고 밀린 수천 개의 메세지는 ‘자요?’라는 짤막한 글자에 우선순위가 저 뒤로 밀려났다.
이대로 문자를 이어 하는 것도 좋지만, 둘이 연락을 할 때는 항상 전화로 하고는 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게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고다연이 통화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신호음이 한번을 채 울리기도 전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직 안 자요.”
질문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다행이네요. 다연씨 내일도 강의 있으시죠?”
“대학교 수업 말인가요?”
“네.”
내일은 평일이니 당연히 들어야 하는 강의가 있다.
하물며 그녀의 시간표는 중간에 공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빡빡한 편.
이렇게 시간표를 꽉 채워 놓으면 시험 기간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 힘들 법도 한데,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고다연다웠다.
“있어요. 평소처럼 5~6시쯤 끝날 것 같네요.”
“5시라….”
수업이 끝나고 가벼운 저녁을 먹으며 연습실로 향하거나,
그냥 연습이 끝난 뒤 늦은 저녁을 먹는 것이 평일 고다연의 생활 패턴이었다.
요즘은 그녀의 연인과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연습이 끝난 뒤 먹는 것이 고정되긴 했지만.
“그럼, 혹시 제가 데리러 가도 될까요? 5시에.”
살짝 놀랐다.
의외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고다연의 대학에 재학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데리고 오려 한 적은 없었다.
“저야 괜찮지만… 찬영씨는 괜찮으세요?”
“저요? 제가 왜요?”
“아니… 그, 자퇴…하셨으니까? 오시기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하하!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없어요.”
그 시원한 웃음에 고다연은 안도했다.
불편한 감정은 하나 없어 보이는 눈치였기에.
하긴, 그가 돈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자퇴를 한 건 분명히 아니지 않던가?
그 커다란 집을 제외하더라도, 항상 금전에 대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왔었다.
또한 학사경고의 위기가 찾아온 것도 아닐 것이다.
그가 여태 보여준 행실이 워낙 성실했어야지.
“생각해 보니 찬영씨는 정말 자의로 학교를 그만두신 것 같네요.”
“맞아요. 그럼 내일 찾아가도 괜찮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종합 강의관 B동 앞으로 오시면 돼요… 캠퍼스 지리는 찬영씨도 아시죠?”
“네. 저도 한때는 다녀봤으니까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데리러 와준다고 하시고.”
“으음….”
남자가 고민에 빠졌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살짝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 생긴 차 자랑 좀 하려고요.”
*
면허증을 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도로 주행 역시 긴장하지 않은 채 강형철에게 배운 것을 떠올리면 되었으니까.
결국 면허증을 손에 쥔 나는 실제로 차를 움직여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 상태였다.
비록 잉크도 마르지 않았지만…
멀티 테스킹과 반사신경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사고를 내지 않으리란 장담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형철이 당부한 대로, 핸들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대로로 다닐 예정이기도 하다.
“연습실 입구는 너무 골목에 있으니까 거기까지는 못 들어가고… 대충 근처에 주차하면 되겠네.”
그 차에 자부심이 넘치는 강형철조차 외제차를 좁은 골목으로 끌고 가기를 삼갔다.
차체가 낮은 차는 방지턱이 많은 한국의 골목에 상당히 취약하지 않던가?
멋도 모르고 끌고 갔다가는 높은 방지턱을 넘다 밑 범퍼가 박살 나버린다.
이것이야말로 강형철이 여태 연습실까지 차를 끌고 오지 않은 이유였다.
크루원들에게 차자랑은 못하겠지만, 굳이 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냥저냥 친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과도한 관심이 쏠리는 건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번에 뽑은 차로 고다연과 여태 하지 못했던 여러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우우웅.
부드럽고 무게감 있는 엔진음과 함께 엑셀을 밟았다.
명백한 초보 운전이었지만 깜빡이만 켜면 대부분의 차가 순한 양이 되어 양보해주었다.
겉으로도 부티가 나는 차인 덕에 편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대학의 정문.
이제 외부인이 된 나였기에 일반 요금용 주차권을 끊고,
작은 마을과 비교해도 될 정도의 커다란 캠퍼스로 들어갔다.
시간은 5시 반,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캠퍼스 거리에는 오가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내게로 쏠렸다.
자차로 통학하는 학생은 종종 있겠지만, 이런류의 차는 흔히 볼 수 없기에 당연하리라.
그나마 선팅이 진하게 되어있어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 학생 식당에 카페가 있었지?”
주차장도 식당 앞에 있으니 그곳에다 주차를 한 뒤,
고다연에게 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종합 강의관 B동을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덜컹, 어렵지 않게 차를 주차한 뒤 문을 열고 나왔다.
저녁 시간답게 식당 앞에는 사람이 그 어느 곳보다 미어터졌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차에서 내린 내게로 몰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외제차 차주 저거 교수님이 아니었어?!”
“…우리랑 동갑…처럼 보이는데?”
“아. 금수저 시발…. 저녁값 아끼려고 질리도록 우동 정식만 먹는 나는 뭐가 되냐….”
“진짜 삶이 괴롭다….”
그들과 나는 멀리 떨어졌으나, 중얼거림이 귀에 들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타가 오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나도 한때는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하는 것조차 고민할 정도로 지갑 사정이 평범했으니까.
허나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식당 안쪽의 카페로 향했다.
“와. 돈에 얼굴, 키빨까지… 지랄 났네. 이게 인생이냐?”
“제발 꼬추는 3㎝…!”
“…돈 오지게 부어서 관리받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
“되겠냐고.”
나를 보고 떠드는 것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여대생들은 그저 자신의 친구를 툭툭 치며 나를 몰래 손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그러나…
허탈하게 욕 한번 뱉고 시선을 돌리는 남자보다, 뚫어질 듯이 나를 쳐다보는 여자들이 더 위기 본능을 자극했다.
‘…빨리 사고 가야겠다.’
꿋꿋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를 확보한 나는 곧장 종합 강의관 B동을 향해 움직였다.
놀라운 것이,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산 것을 본 여자들은 작게 탄식을 흘렸다.
이런 작은 행동만으로 내게 여자친구가 있을 확률이 무척이나 높다는 것을 유추해 낸 것이다.
그렇게 B동 앞에서 기다리길 수분.
슬슬 따라온 여자 몇몇이 내게 말을 걸려는 용기를 내던 그때.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상대 쪽은, 나를 전혀 잊지 못했던 것 같지만.
“바,바,바,박…!!”
“…너가 왜 여깄냐?”
나를 보고는 딱딱하게 굳어 어버버거리는 백하민을 보고 물었다.
동시에,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당연히 이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내 머릿속 저장 공간에 넣을 가치도 없었기에, 뇌가 백하민의 관한 일을 무의식 깊숙한 곳에 박아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연도 처음에는 이 새끼 골려주려고 가까워지려 했지? 지금은 서로에게 진심이 되었지만….’
솔직히 놈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아니었다면 전혀 몰라 볼 뻔했다.
녀석의 모습이… 참…
오래전 나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역변했기 때문이다.
“이야. 너 좀 변했다?”
“……으윽…!!”
백하민이 몸을 움츠러뜨렸다.
변하긴 했으나, 예전 ‘박찬영’의 모습을 닮은 것도 아니었다.
놈의 원본은 뒤룩뒤룩 살찌고, 여드름투성이에, 단신이었으니까.
지금의 백하민은 뒤룩뒤룩 살찌긴 했지만…
여드름은 심할 정도론 없다.
키도 커서 꽤 덩치가 있다.
결정적으로…
나름 꾸민 흔적이 있단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꾸밈이라는 것이 참 동대문 시장스러웠다는 것이지만.
당연하지만 패션의 성지라는 긍정적인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
“뭐해? 꺼져.”
“…어?”
“너 갈 길 가라고. 말 섞기 싫으니까. 뭐 어떻게, 일찐 놀이라도 해줘?”
나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백하민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야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이 새끼를 골려주는 것에 고다연을 이용하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생각이 변했다.
그녀는 놈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했지 않은가?
그런 고다연에게 녀석의 얼굴을 보이며 기분 나빴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짓이 못 된다.
기껏 세워놓은 계획을 중간에 그만둬 버린 것은…
그녀에게 반해버린 내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
그러니 나는 놈에게 어서 떠나라고 턱짓했다.
곧 있으면 이 자리에 고다연이 올 테니까.
하지만…
“찬영씨! 기다리고 있었…”
타이밍이 어찌 이럴까.
기다리던 고다연이 등장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미안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발견하고는 살갑게 웃으며 달려오던 그녀는,
백하민을 보고 얼굴을 싹 굳혔다.
내 앞이 아닌 대학에서 보여오던 그녀의 이미지답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차갑게.
“…당신이 여기 왜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