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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97) (297/310)

〈 297화 〉 지구 *

* * *

아침.

바른 생활이 붙어버린 몸은 늦잠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두 시간만 자도 모든 피로를 녹일 수 있기에, 개운한 아침을 맞기에는 충분했다.

누운 상태로 옆을 돌아보니 새근새근 잠에 빠진 눈코입이 보인다.

어제 껴안은 그대로 잠들었던 탓인지,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 누워 있었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차올라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지만…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팔을 내렸다.

자는 얼굴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다.

­ 스윽.

그렇게 말 없이 지켜보기를 10분 가량.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조금 흐트러지며, 어제 하도 가지고 놀아 살짝 빨깧게 부은 감이 있는 가슴이 밖으로 드러났다.

무방비한 상태에 놓인 맨 가슴은 내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으나…

그냥 감기 걸릴새라 이불을 끌어 올려 살포시 덮어 주는 것으로 그쳤다.

우선, 바닥을 나뒹구는 속옷과 목욕 가운을 챙겨 입었다.

이대로 계속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간단히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척이나 어지럽혀져 있었다.

주로 바닥이.

“아주 물 난리가 났네…”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눈 뒤,

함께 욕조로 들어가 장난을 쳤으니까.

이곳에서 본방을 하지는 않았지만, 잔뜩 애정표현을 하다보니 바닥으로 물이 넘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인테리어를 서양식 욕실로 꾸며두면 보기에는 참 이쁘긴 하지만…

맨 바닥에 배수구가 없어서 이런 참사를 보면 모텔 직원한테 미안한 생각부터 든단 말이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린 나는 원래 목적대로 세안을 했다.

깔끔해진 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 한창 꿈나라에 빠진 고다연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맞췄다.

“……우움…? 머에여?”

입술을 떼지 않자, 가라 앉았던 눈꺼플이 조금씩 들렸다.

일어나긴 했지만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그녀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쪽. 모닝키스.”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풋 하고 웃는다.

기뻐하는 걸 보니 해주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치사하게 혼자만 양치하고!”

“먼저 일어난 사람의 특권입니다.”

당연하지만 우리 둘다 씻고 잠들었기에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장난을 치는 것이리라.

고다연이 몸을 뒤척였다.

슬슬 침대에서 벗어나려나보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검지로 살포시 눌렀다.

얼굴에 물음표를 띈 그녀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옷 가져다 줄테니 그대로 있어요.”

“…앗!”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란 걸 눈치챈 고다연이 얼굴을 붉히며 화들짝 이불을 끌어 올렸다.

물론 어제야 욕실에서 서로 볼 것 못볼 것 다 봤지만…

‘그런’ 분위기 일 때 보이는 것과, 이렇게 무방비 한 채로 보이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여심이란 복잡하다지 않은가?

“…감사합니다아…”

그녀가 옷을 입을 때까지 뒤돌기로 했다.

나 역시 그녀를 등진 채 목욕 가운을 벗고 제대로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다연씨. 지금 생각난 건데… 통금 있지 않았나요?”

“아. 네에… 있어요.”

“그런데 괜찮은 건가요? 오늘 외박했잖아요.”

“으음…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확인하실 방법이 없으니 괜찮기는 한데…”

“한데?”

“사실, 어제 아침에 은미한테 전화로 부탁 하나를 했거든요… 그… 나 보러… 서울… 올라온 척 좀 해달라고……”

마지막 가서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했다.

외박이 들켰을 때를 대비해 친구에게 말을 맞춰달라 부탁했다는 뜻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박은미의 입장에서 그런 부탁을 받아버리면, 우리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눈치 챌 수밖에 없을테니까.

흑색이 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몇날 며칠이고 놀림 받을 예정인가보다.

솔직히 내 책임도 있기에 괜히 몸이 움찔거렸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렇게 우리는 좀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고 헤어졌다.

이대로 조금 더 뒹굴거리다 같이 연습실에 가고픈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커플 두명이 전날과 같은 옷을 입고 오는 건 너무 티나지 않은가?

게다가 샴푸 향까지 같으니까.

“다시 한번 묻지만… 몸은 괜찮으신거죠? 그냥 오늘 하루 정도는 연습 쉬는 게 어때요?”

“조,조금 어색하긴 한데… 정말로 괜찮아요.”

“무리하는 거 아니죠?”

“후후. 이따가 봐요?”

어제 많은 일을 겪었다보니 걱정이 되긴 했다.

그러나 고다연은 그런 내 걱정을 일축시키곤 손을 흔들며 도망갔다.

방금 모텔을 같이 나온 남녀가 그 앞에 멈춰서 이야기 하는 건…

누군가가 볼 때, 상당히 그럴듯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녀는 아름다운만큼 시선을 모으기에 더더욱.

어쩔 수 없이 마주 손을 흔들며 멀리 사라지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후, 나 역시 집으로 향했다.

*

“하아아…….”

강형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나이 27.

아직 파산 신청을 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파산 신청을 하더라도 반려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보다 중요한 그것의 가격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 씨이…… 말릴 때 들었어야 했나?”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13개월 전, 주변에서 아무리 뜯어 말려도 귀를 막은채 의견을 밀고 나간 건 강형철 본인 아닌가?

말로는 후회를 담았으나 진심으로 뉘우치지는 않았다.

꿈을 이뤘다 생각한 강형철은 주변의 시선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실 덕에 친구는 물론 가족과도 사이가 소원해졌다.

이제는 무리해서 꿈을 이룬 대가가 그의 앞에 찾아왔다.

채무 독촉고지서라는 섬뜩한 문서와 함께.

인터넷에서 수백 수천 찾아 볼 수 있는 이야기.

13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이리 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으나,

안타깝게도 강형철이라고 화가 피해가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당장에라도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집도, 마땅한 목돈도 없는 강형철이지만…

단 하나 있는 재산을 처분한다면 빚을 모조리 갚을 수 있으리라.

문제는 강형철에게 그 재산을 처분할 생각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었단 것이다.

“안돼… 내가 20대 초중반과 맞바꾼 드림카인데…! 절대, 절대 못 팔아!!”

A.Light 댄스 크루의 평단원이자,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의 정직원인 그는…

아주 심각한 상태의 카푸어(Car Poor)였다.

학생 때 차에 유독 관심이 많던 친구가 있지 않던가?

과거 강형철이 딱 그러한 아이였다.

차에 대해 많이 알고, 거대한 흥미도 있는 만큼 가지고픈 차 한대가 생기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드림카가 무척이나 비싼 외제차였고,

강형철은 흑수저에 가까운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자신의 수익과 타협하지 못 했다고 할까?

그는 갖은 장애물에도 드림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군대 제대 후 돈을 끌어 모은 끝에, 결국 억소리 나는 드림카를 뽑는 것에 성공한다.

26년간 모은 돈으로 모자라 빚까지 내가면서.

“아… 계산상 됐어야 했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중증 카푸어들의 말로를 본 강형철은 드림카를 사기 전 철저하게 계산을 마쳤다.

생활비와 월세. 차의 유지비, 빚의 이자.

그렇게 계산상 감당이 가능하단 판단이 들었기에 주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의견을 밀고 나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낭비벽이었다.

억대의 외제차를 은연중 자랑하기 위해 매일같이 대학가에 끌고 간 그는, 당연하게도 신나게 놀다가 들어오고는 했다.

음주 운전을 피하기 위해 술만 안마셨을 뿐, 매달 유흥비가 상상 이상으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잔뜩 졸라맨 생활비를 줄일 수도 없고,

한번이라도 고장나면 되돌릴 수 없어지는 외제차의 관리를 소홀이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자를 제 때 못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아아!! 이러다가 진짜로 매달 이자가 오버 나게 생겼네… ……이제부터라도 그만 놀아야지… 하… 점장 몰래 야간 알바라도 뛰어야 하나?”

이대로 계속 이자가 밀린다면, 그의 월급만으로는 원금을 갚긴 커녕 이자 감당조차 못하게 될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차 한대를 팔면 전부 갚을 수 있는 빚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파산처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완벽히 소유 아래 두고 싶다며, 드림카에 보증도 안걸지 않았던가?

빼도 박도 못하는 사유 재산.

차를 팔기 싫은 이상 낭비벽을 줄이고 몇년은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그럼 몇년은 내 차를 타고 갈 일도 거의 없어지겠네…”

속상했다.

아직 사고나서 일년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놀러다닐 수 없다니.

하지만 유지비는 차를 움직이든 말든 여전히 고정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배알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가 부른 화지만, 강형철으로썬 그런 건 모르겠고 억울할 뿐이었다.

그가 자기 객관화가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차를 팔아 치웠으리라.

“형철이형?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세요. 하긴, 오늘 연습이 좀 빡세긴 했죠. 물 드릴까요?”

“아. 찬영…”

그때.

강형철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모델 일을 하며 돈을 꽤 많이 벌고 있고…

너무나 건실해서, 모아둔 돈이 척 봐도 많을 것 같은 청년이.

한참 전에 굳어버린 강형철의 머리가 끼긱­ 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찬영이 너 군대 면제라고 했지?”

“네? 네.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요.”

“오. 그래? 그럼 차는 안뽑냐? 다들 군대 다녀온 뒤에 차 뽑으려고 미루는데, 넌 그럴 필요 없잖아.”

“아… 차요? 흐음, 글쎄요. 제가 평소 차가 필요할 정도로 먼 거리를 다니는 건 아니라… 생각은 없네요. 면허도 없고.”

차가 있어도 많이 타지는 않을 것 같다?

그야말로 호재였다.

“면허는! 하루 이틀이면 따는 거고.”

“그야 그런데……. 갑자기 차 이야기는 왜요?”

“너, 혹시 관심 있으면…… 내 차 살래?”

“…네?”

어차피 1,2년간 못 쓰게 된 차를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어떨까?

조언을 결코 듣지 않던 강형철을 손절한 동창들이나,

매번 그를 한심한 눈으로 보는 가족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그에게 빌려주는 것이 현명하리라.

당연하지만 진실로 드림카를 팔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목돈을 마련해 내야 하는 이자를 줄여서, 다시 차를 타고 놀러다니는 삶을 최대한 빨리 앞당기기 위한 묘수였다.

그래. 똑똑한 발상이었다.

적어도 강형철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박찬영에게 사정을 풀어 설명했다.

그도 상황을 이해해야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테니까.

“흐음… 일단 상황에 대한 이해는 되네요. …타인에게 판다는 건 좀… 좀… 많이 신박한? 발상이긴 하지만.”

“하핫! 나 똑똑하지?”

“…네에… 뭐… 흔치 않을 생각이긴 하네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라. 만약에 돈을 내가 마련해 온다면, 너는 산 가격 그대로 나한테 차를 팔아줘.”

“아. 법적으로는 자동차 매매, 제게 명의가 이전 되긴 하지만… 전당포 느낌이네요?”

“그렇지! 맞아! 전당포!! 그리고, 종종 내가 차를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 줄 수 있니?”

이것이 강형철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떠올린 묘수였다.

어차피 몇번 굴리지 못할 차.

마련한 목돈으로 빚을 갚아 이자를 줄이고,

나중에 돈을 모아 그대로 차를 받아 오는 것이다.

심지어 박찬영에게 차를 판 와중에도 그는 드림카를 탈 수 있었다.

동생에게 빌려타는 형식으로.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큼큼. 빌려 탄다고 해도 많지는 않을 거야! 많아야 달에 한 번? 최소한 1,2년은 뼈 빠지게 일해야 될 것 같아서… 하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거네요. 제가 그 차를 아주 싼 값에 매입하면, 형이 엔진 오일이며 세차며 관리를 다 해주고… 기름까지 넣어 준다고요? 그 대가로 종종 차를 빌려주면 되고. 형이 돈을 모아서 오면 차를 돌려주면 되는…”

“야야!! 잠깐! 너 세차나 오일 교체 함부러 하려하지 마. 큰일난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제발 건들지 말아줘. 그냥 타기만 해.”

강형철이 식겁한 채 소리쳤다.

초보가 외제차 관리에 어설프게 손대는 것 만큼 차를 망가뜨리기 쉬운 길이 없다.

언젠가 그가 다시 매입을 해올 예정이니, 사실상 강형철의 차가 아닌가?

잠깐 ‘빌려준’ 사이에 망가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다.

모든 관리는 전문가인 자신이 하는 것이 맞았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전 아직 그 차의 가격도 못들었고, 실물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후후. 실물을 보면 당장 수락할 걸?”

강형철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만큼 그의 차에 대한 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혹시 박찬영이 싼 값에 차를 먹고 도망치면 어쩌냐고?

답은 간단했다.

에이.

그렇게 착해 빠진 동생인데.

설마 그러겠어?

그가 처한 상황이 증명하듯,

강형철은 그리 똑똑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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