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19) 지구 *
* * *
‘이대로 타협한 채 안기는 좀 꺼려지는데. 물론 섹스는 할 거지만.’
괜찮다.
애초에 이런 흐름으로 갈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었기에,
나름의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
그녀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오늘 고다연의 순결을 가지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한 채 왔다.
아까 가운에서 챙겨 둔 상자째의 콘돔을 그녀의 앞에 보였다.
고다연이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뭔지 알아요? 본 적 없으시려나.”
“가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살 때 진열대에 놓인걸?… 으으으…”
“네. 콘돔이에요.”
고다연이 침을 삼켰다.
긴장이 한층 더 심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방금까지 입으로 가지고 놀았던 가슴까지 그 떨림이 전해졌다.
“그럼… 이제 정말로… …후우! 네. 저 괜찮아요…!”
“아뇨.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냥 오늘은 안 하려고요. 첫 경험.”
“……네?”
내 담담한 말에 고다연이 반문했다.
어떻게든 긴장과 거부감을 억눌렀는데 오늘 섹스를 안 한다니, 당황스러울 만 하다.
“어째서?”
그녀는 당연하게도 반문했다.
내가 대답하려는 그때.
고다연이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빨랐다.
“…호,혹시 발기부전이라던…”
“흠. 만져볼래요?”
“네? 꺅!!”
자존심을 긁는 음해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고 내 팬티 위에 올렸다.
훨씬 전부터 단단해져 있던 물건이 자극을 받고 움찔거렸다.
이 태동을 느낀 고다연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때요?”
“그,그,그게… 건강…하…네요오오…?”
“그렇죠?”
천 한 장을 두고 있었지만, 그 형태와 온도를 느끼기에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처음 만져 본 남성의 감각에 당황하기도 잠시.
연신 심호흡을 하며 당황을 가라앉힌 고다연이 다시 내게 물었다.
“그… 찬영씨는 하고 싶으신 거죠? 그럼… 대체 왜?”
“처음은 특별할수록 좋잖아요.”
“…네?”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생략해서 말했네.”
슬며시 웃은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약하게 남은 고다연의 거부감과 긴장을 없애기 위한 개수작을.
“처음은 특별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저희의 일상이 특별하지 않단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첫 경험은 상대적으로 볼 때 더욱 특별하겠죠? 처음이란 건 한번 밖에 겪지 못하니.”
“……그렇죠?”
“그렇기에 첫경험 정도는 가장 행복하게 가지고 싶습니다. 당장 제가 인내를 해야 하더라도요.”
고다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한듯했으나,
나머지 절반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다.
그렇기에 조금 더 풀어 설명해주기로 했다.
“성급하게 굴지 않으려고요. 다연씨는 도망치지 않으니까.”
“하,하지만 그렇게 미루면 찬영씨만 손해 아닌가요? 남자는 그런 거 참기 힘들다고도 하고… 당장 그… 그곳만 해도… 완전… 건강하고……”
“으음… 예를 들어 평생동안 다연씨와 총합 5,000번의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해보죠. 그렇다면 오늘 하루 안 하면 앞으로 4,999번 남았겠네요?”
“오,오천번이나… …큼. 네. 미래 이야기라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네. 지금이야 당장 사랑을 나누고픈 마음이 들어도…… 4,999와 5,000. 멀리 보면 한 번쯤 안 한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어 보이지 않나요?”
궤변의 요지는 이렇다.
나중가면 섹스는 질리도록 하게 될 텐데, 조급하게 첫 경험을 망치는 건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고.
당장은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우리를 위해서 감내하겠다고.
헤어지면 떡 못 친 만큼 손해가 아니냐, 이런 질문은 멍청한 것이리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것까지 예상해서 이해득실을 따지지는 않을 테니.
애초에 ‘전 여자 친구’과 섹스 한 번 더 했던 게 이득인지도 의문이다.
‘이걸 감안해도… 세상에 둘 없는 호구나 할법한 헌신적인 발상이지.’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듣는다면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리라.
성욕 같은 것보다 그녀를 우선시한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진심이세요? 정말 그 정도로 저를… 저랑…”
아무리 고다연이라도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내가 이리도 자처해서 호구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인지,
방금 내 말에 꾸며냄 하나 없는 것인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연애 조언자는, 사랑이란 곧 상대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암투라고 했을 테니까.
나는 그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증명하기로 했다.
콘돔 박스 안 3개의 콘돔을 꺼낸 뒤, 모조리 포장을 뜯어버렸다.
곧 젤에 젖은 고무 3개가 내 손 위에 올려졌다.
멈추지 않고 말려있던 콘돔을 쭈욱 풀어버렸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미사용 상태였던 콘돔은…
안에 정액만 없을 뿐, 사용한 뒤처럼 늘어져 버렸다.
“차,찬영씨?”
이래서야 더는 쓰지도 못한다.
억지로 끼워봐도 남성기에 고무가 제대로 밀착하지 못해 피임의 기능을 잃을 것이다.
아예 손가락으로 구멍까지 내버렸다.
얇게 펴진 초박형 콘돔은 내 근력 앞에서 쉽사리 구멍 뚫렸다.
“자. 이제 오늘은 하고 싶어도 못하겠네요. 콘돔이 없으니까.”
“……”
“좀 믿겠어요?”
고다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세차게 감동한 것 같기도 하며, 어느 때보다 나를 향한 애정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사실 콘돔은 2박스가 있고,
멀쩡한 한 박스는 지금 침대 옆 서랍장의 제일 위 칸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나오는 표정이리라.
이제 내가 해야 할 행동은 간단하다.
오늘 섹스는 못 한다고 푸욱 안심한 그녀에게, 적어도 애무 정도는 허락해 달라 요구한다.
지금 나의 양보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고다연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를 달구고, 그녀의 몸을 최대한 애태운 뒤…
고다연의 입에서 당장 경험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바로 숨겨뒀던 콘돔을 꺼내면 된다.
이러면 그녀는 거부감이나 긴장도 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나는 나대로 섹스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내일 되면 진상을 알아챈 고다연이 전부 계획했던 거냐며 눈총을 쏘겠지만…
나름 최선의 첫 경험 기억을 안겨줄 수 있으니 무죄 아닐까?
포옥!
그렇게 계획을 점검하는 사이.
고다연이 내게 안겨 왔다.
실오라기 하나를 사이에 두지 않은 채 우리의 몸이 겹쳐졌다.
“다연씨?”
“…내 첫 남자가 찬영씨라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
“감동했어요?”
“응. 인정할게요…”
“다행이네. 저 그거 하나 보고 오늘 열심히 참는 거니까요.”
“…정말. 이러는데 어떻게 안 반해.”
전신으로 부드러운 살결을 만끽하고 있을 때.
계획의 첫 단계로, 그녀에게 애무 정도는 허락해 달라 요구하려 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 고다연이 내게 입을 맞춰왔다.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끌어 안아주며 그 키스를 받았다.
그런데 입을 맞추자마자 뜨거운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혀를 내민 적은 처음이기에,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래도 방금 개소리의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나보다.
키스는 짧았다.
입안을 가득 채웠던 뜨거움이 회수되고, 그녀의 입술이 멀어졌다.
어쩐지 아쉬움에 탄식이 나오려던 순간.
열기 어린 눈으로 나와 눈을 맞추던 고다연이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으으… 어떡하지. 나 당장 찬영씨랑 하고 싶은데.”
“네에?”
“모,못한다고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지금이라면, 너무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찬영씨랑 한다면, 절대 후회 안 할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고…?”
그녀의 고개가 픽 돌아간다.
아무래도 진심이었나보다.
빈말이라도 나와 하고 싶단 이야기가 나오게 하려면 한참을 애를 태워야 할 줄 알았는데…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갔다.
역시, 착하게 살면 복 받는 것 같다.
“다연씨. 방금 한 말 정말인가요?”
“…네.”
“저번 주처럼 감정에 못 이겨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그 때는 잊어주세요. 오늘은… 적어도 방금은 진짜였으니까.”
고다연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예쁘게 웃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이다.
저번처럼 이성 한 줌 찾아볼 수 없던 것이 아닌, 제대로 깊게 생각을 마쳤단 걸 알 수 있는 눈이었다.
그녀도 나도, 이제는 확답을 얻었다.
슬며시 미소 지은 나는 침대 근처의 서랍장으로 향했다.
숨겨둔 콘돔을 꺼내오기 위해서.
그 이전에…
내 다리를 얽은 그녀의 다리부터 치우기로 했다.
“…잠깐만요!”
그때.
고다연이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내 손목을 잡았다.
돌아보았더니 머뭇거리는 그녀가 보인다.
아. 혹시 옷을 입고 편의점에 다녀오려는 건 줄 안 걸까?
다시 콘돔을 사 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오해를 풀려 했으나, 말이 턱 막히고 말았다.
고다연의 떠나지 말라 호소하는 저 눈.
무언갈 말하기를 망설이듯 씰룩이는 입매가.
무척이나 빨갛게 변한 얼굴이 내 심장을 찔렀기 때문이다.
“찬영씨… 그… 오해… 하지 않고 들어줄 자신 있어요?”
“…무엇을요?”
“저, 저… 곧 댄스 오디션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바쁠 예정이라고…”
“네. 기억납니다.”
얼마 뒤 공개 오디션 때문에 바빠진다는 것.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바빠서 데이트 약속을 잡지 못하는 틈을 타, 데이지나 멜을 지구로 데려올 계획도 세워두었다.
그들의 적응을 도우려면 나 역시 데이트를 나가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낼까?
오디션… 오디션이라… 중요한 일……
설마…?
“그래서 그… 먹고 있거든요… 주기 조절하느라……”
“피임약?”
고다연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았다.
그녀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피임약은 피임을 할 때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 생리가 오지 않게끔 사용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 지금… 안전… 으으으…!”
“다연씨…”
“노,노린 건 절대 아니고…! 우연히, 정말 의도치 않게 타이밍이 맞은 것뿐… 꺄악?!”
참지 못하고 고다연의 몸 위에 내 몸을 겹쳤다.
허리를 감은 팔의 힘에 고다연이 비명을 질렀지만, 내 귀에는 들어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노콘 질내 사정해도 된다.
나는 서랍장에 들어 있는 물건을 까맣게 잊기로 했다.
예상과 달리 오늘 저것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사랑해요.”
“…응! 저도. 엄청 좋… …사랑해요.”
행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말로,
본방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