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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93) (293/310)

〈 293화 〉 지구 *

* * *

손을 맞잡은 채 걸었다.

내가 앞장서서 이끌고 있었고, 고다연은 몸의 반을 내 등 뒤에 숨긴 채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나의 집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외박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해 놨기에 내일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으나,

안젤리와 크리스 모두 부재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할 수도 없었다.

여자친구의 방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가 돼버리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고다연의 입장에서 보면, 혹시 우리가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걸 이웃에게 보일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일을 하며 이웃집에 소리가 들릴 수도 있고.

매너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가 걷게 된 길은 처음 보는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길이기는 하다.

이 길을 쭉 따라간다면…

내가 미리 봐둔 모텔 한 개가 나온다.

‘…요즘 유행하는 게임용 컴퓨터나 특별한 시설은 없지만…’

괜찮은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마 걷지 않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연씨?”

“넷?!”

“하하하. 그렇게 놀라지 마시고. 요 앞 편의점 다녀올 건데… 혹시 겸사겸사 사 올 것 있나요?”

“편의…점이요?”

고다연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갑자기 목이라도 말라서 음료수라도 사 오려는 건가 싶나 보다.

확실히 목이 타는 상황이긴 해도, 마실 것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가는 건 아니다.

그냥…

최소한의 피임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좋은 것을 써서.

나는 대답하기 곤란 하단 듯이 괜히 앞머리를 정리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런 내 반응만으로 무엇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다녀오는지 눈치챈 듯했다.

“앗! 아앗! 네,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아니면 같이 따라 들어 올래요?”

“아뇨! 기,기다리고 있을게요…!!”

남녀 둘이서 콘돔을 산다면 알바생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볼지는 뻔하리라.

그것을 깨달은 고다연은 얌전히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길 택했다.

모텔 앞 편의점이라서 그런 걸까?

주말임에도 꽤 인기 많은 003 알로에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첫날이기에 3개 입짜리 한 박스면 충분하겠지만…

나는 두 박스를 집어 든 뒤, 계산을 마쳤다.

괜히 돈을 낭비하기는 싫어서 다른 건 사지 않고 딱 콘돔만.

“많이 기다렸어요?”

땅을 바라본 고다연이 고개를 좌우로 휘젓는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는 시선이 모텔 건물로 향해 있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저곳이라는 걸 눈치챘나보다.

유난히 조용한 골목을 지나, 외벽마저 세련된 건물의 문을 열었다.

별로 넓지 않은 로비.

나는 우리를 바라보는 카운터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예약했어요. 박찬영으로.”

“잠시만요… 디럭스 룸, 1일 숙박 맞으시죠?”

“네.”

“601호입니다. 13시 퇴실이니 주의해주세요. 열쇠 반납은 엘리베이터에 수거함 있습니다.”

간단한 일회용품 구입까지 끝낸 뒤.

고다연의 손을 이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체크인을 할 때의 그녀는 내 등 뒤에 완전히 숨어 있었다.

카운터 직원에게 절대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그 의미 없는 노력이 귀여워, 나는 기꺼이 가림막 역할을 받아들였다.

사소하지만 배정받은 방이 1호실이란 것도 꽤 기분 좋았다.

보통 1호실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그건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먼 방이란 뜻이니까.

상대적으로 문밖이 조용할 수밖에 없단 뜻이다.

­ 띵.

좁은 엘리베이터의 안.

고다연의 눈이 이곳저곳을 향해 움직였다.

부끄러운 것과 별개로 내 집을 이리저리 구경했던 호기심은 어딜 가지 않나 보다.

엘리베이터 손잡이 부분에 놓인 열쇠 수거함에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이 머문다.

그러다 내 쪽을 힐끗 바라보기도 했는데…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말 걸기를 포기했다.

아까부터 몇 번 반복 된 일이다.

“주말이니까 혹시 몰라서 예약해 놓은 거예요.”

“네?”

“궁금하신 눈치라?”

“아하….”

“풋. 너무 긴장하지 마요. 저까지 긴장되잖아.”

“…아무리 봐도 찬영씨는 긴장한 것 같지 않은데….”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 열심히 돌렸거든요. 이럴 때 실수하기는 싫어서.”

이런 것에 익숙지 않음을 반복해서 어필했다.

정말로 떳떳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혹시 의심을 사면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음이 미약하게 울리는 복도를 지나, 내가 예약한 방문을 열었다.

뒤에서 쭈뼛대는 고다연에게 몸을 비켜주며 먼저 들어가 보기를 권했다.

“방 괜찮나요? 사진으로만 보고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넓어요. 이쁘고.”

“다행이다. 디럭스로 예약하길 잘했네요.”

“평범한 방이랑 차이가 있나요??”

“스탠다드 룸보다 넓고,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욕실에 욕조가 있죠.”

욕실을 활짝 열며 말했다.

그 말대로 꽤 큼직한 욕조가 우리를 반겼다.

“저번에 저희 집 오셨을 때 욕조 한번 써보고 싶다 했잖아요?”

“그걸 기억해 주신 건 감동인데… 요,욕실이 유리문인데요?!”

“변명하자면, 불투명해서 실루엣 밖에 안 보여요. …혹시 불합격인가요?”

“으으으…!”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내가 기껏 예약까지 해놨는데 다른 곳을 가자며 나오기에는 힘든 모양이다.

그녀의 용기는 이 모텔을 들어오며 다 사용한 만큼, 두 번 들어갈 용기가 남았는지도 미지수고.

“안 볼게요. 약속.”

“볼 거잖아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안 봐…!”

“하하핫. 어차피 수증기 때문에 실루엣도 제대로 안 보여요. 정 그러면 제가 먼저 씻어서 증명해 볼까요?”

나는 그녀에게 콘돔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까 편의점에서 산 것은 아니다.

카운터에서 산 일회용품 세트 중에 껴 있던 놈이다.

따로 준비한 것이 있으니, 이건 쓰지 않을 예정이다.

“이건 뭔가요? 설마…”

“콘돔이요.”

“읏! 여,역시…! 이게 바로 그…”

콘돔을 접하는 건 처음인지 포장지 너머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싸구려 콘돔의 포장지마저 뜯어 실제의 콘돔을 보게끔 해줬다.

고다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미끌거리는 고무를 손바닥 위에 놓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 이거, 여기서도 주네요? 이곳만 그런 건가?”

“콘돔이요? 모텔 대부분은 준다고 하는데, 별로 질이 좋지는 않다고 해서요. 그냥 샀죠.”

콘돔, 모텔.

이 단어들을 차마 입에 담기 힘들었는지 ‘이것’, ‘여기’로 칭하는 고다연에게 눈치껏 대답했다.

‘…야한 광경이네.’

그런 목적이 아니긴 했지만, 침대에 앉아 콘돔을 이리저리 만지는 고다연은 무척이나 못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에게 콘돔을 구경 시켜 준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내가 샤워할 동안 가만 서 있게 놔두면 높은 확률로 딱딱 굳어 있을 테니,

이런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방금 드린 건 어차피 안 쓸 거니까 다 열어봐도 돼요. 그럼, 전 씻고 올게요?”

“…앗! 네!”

못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콘돔을 손에서 놓친 고다연의 이마에다 입맞춤해주었다.

그렇게 욕실에서 간단하게 땀을 씻고 나온 뒤.

욕실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기가 씻는 건 보지 말라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나를 구경했나 보다.

두 개의 보급형 콘돔은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내 앞에서는 더 만지기 뭐해 버렸지만…

쓰레기통 속, 말려있던 콘돔이 완전히 풀린 것을 보니 내가 씻는 동안 신나게 가지고 놀았단 것을 알 수 있었다.

“큼큼…”

고다연의 눈이 재빠르게 내 몸을 흩고 지나간다.

말리지 않아 물기 먹은 머리에 목욕 가운만 걸친 내가 퍽 나쁘지 않았나 보다.

이대로 가까이 다가가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졌지만,

잡담을 더 이어나가긴 인내심이 바닥나 갔다.

내가 씻었으니 이제는 다음 차례다.

그녀에게 가운을 건네주었다.

“욕조는 이따 사용해주세요. 저… 오래 기다리기는 힘들 것 같아서.”

“……”

순식간에 얌전해진 고다연이 샤워실로 들어간 사이.

나는 편의점 비닐봉지 속 콘돔 2박스 중 한 개를 침대 옆 서랍 안쪽으로 숨겼다.

이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비상용이다.

메인 전등은 전부 끄고, 침대 머릿가의 작은 전등만을 켰다.

방을 전부 채우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주홍색의 불빛만이 주변을 밝혔다.

조금만 떨어져도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붙으면 연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딱 여성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첫 경험 직전에 놓인 그녀인 만큼 샤워가 길어지는 것을 걱정했다.

최대한 미루기 위해 1시간 이상을 씻는단 사람도 적지 않다니까.

­ 끼익.

하지만…

더이상 나를 애태우지 않기로 한 건지, 의외로 고다연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나왔다.

아. 혹시 씻고 있는 실루엣을 오래 보여주기 싫었던 걸까?

욕실이 유리로 된 모텔로 예약한 건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봤어요? 유리 너머…”

“글쎄요?”

“읏… 봤구나…”

“보더라도 잘 안 보이는 거 아시면서.”

“그렇긴 한데…”

불투명한 유리문 뒤로 몸을 반쯤 숨긴 고다연이 얼굴을 붉힌 채 나를 노려보았다.

걸친 것은 목욕 가운뿐.

대담하게도 속옷조차 입지 않은 걸까?

허나 어깨의 걸쳐진 끈을 보니 그것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드러난 속옷의 색을 보니 대담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했다.

“머리 푼 거, 엄청 이쁘네요.”

“그런…가?”

“진심으로. 조금 더 가까이서 보여줘요.”

빈말이 아니라…

물에 젖어 빛을 반짝이는 생머리는 너무나 공격적이었다.

특히 그녀는 평소에 포니테일을 고정적으로 하고 있으니,

그녀의 지인 중 이런 머리를 볼 수 있는 건 남자친구인 나밖에 없단 뜻이 되었다.

확실히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다.

가까이 와달라는 내 말에 조금씩 고다연의 몸이 움직였다.

한걸음 단위가 아닌, 센티미터 단위로.

본의 아니게 직전에 와서 나를 애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문에 가려졌던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숨을 삼켜야 했다.

그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고다연이 움직이는 속도는 빨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쪽에서 성큼성큼 다가가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올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함부로 움직였다간 욕실 안으로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끼익.

이윽고 결국 욕실의 문이 닫히며, 그녀의 몸이 전부 드러났다.

아슬아슬한 가운에 가려진 몸의 선이 나를 유혹했다.

분명 노출 자체는 평소의 돌핀 팬츠가 조금 더 높을 텐데, 왜 이리 선정적으로 비칠까?

그녀의 용기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차마 침대에 다가오지 못하고 자신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 끝 발가락이 귀엽게 꼼지락대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품에 안았다.

이제는 내가 리드해야 할 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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