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지구 *
* * *
끼익, 쿵.
불 꺼진 지취방이 고다연을 반겨주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조그만 현관 앞에서 가만 서 있었다.
잠깐 뒤.
전력으로 골목을 달리느라 턱 끝까지 찼던 숨이 고르게 변하고,
송글송글 맺힌 땀은 밤공기의 서늘함에 식어 온기를 잃어 갔다.
그제야 고다연은 말없이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거칠게 벗겨진 신발이 현관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평소처럼 뒤를 돌아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커튼 쳐진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가로등의 백색 빛만이 유일하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밤길을 달려오느라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보통은 방의 불을 켜리라.
그러나 고다연에게는 전등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걷는 곳은 침대 일직선이다.
화장을 한 듯 하지 않은 듯 가벼운 수준으로 터치된 화장품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몸은 땀에 젖어 찝찝하기 그지없다.
새로 산 속옷은 여기저기 결리며 어서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걸어가, 침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아흐악!”
푹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모르는 척 잠이 든다면, 모든 것이 악몽이었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제발…! 제바알…!!”
이불에 얼굴을 묻고 고통스럽게 빌어보았다.
중력과 이불이 합심하여 코와 입을 막았다.
엎드린 채 누워 있기에 숨쉬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숨 막혀 죽을까? 그럴까?’
그대로 숨을 꾹 참는 등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자해 시도를 해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가 바보 같아진 고다연은 푸하라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얻게 된 것은 진한 자괴감뿐.
추가로 1분 만에 마시는 공기는 쓸데없이 달콤했단 것이 있었다.
물론.
개인의 의지가 강한 것과 별개로, 본인이 숨을 참아 자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숨을 참았다고 한들…
뇌 속 호흡중추가 기절 상태에 빠진 신체의 호흡 근육을 자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고다연에게는 다행인 이야기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녀가 죽었다면, 사인은 질식사가 아닌 수치사였을 테니까.
고다연은 오늘.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갱신해버렸다.
“흐아아… 미쳤어… 진짜 미쳤어…”
몇 시간 전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성욕에 제 몸 못 가누는 10대 후반의 남학생도 아니고, ‘고작’ 애정 표현 몇 번에 발정 나서 눈이 돌아가다니.
‘고작…은 아니려나? 으읏, 아무튼…!’
심지어 눈치채기 못하기가 힘들 정도로 대담한 유혹의 말도 입에 담고 말았다.
물론, 이런 곳에 한정해선 눈치가 지독하게 없던 남자가 아니던가?
한때는 조그마한 기대도 해봤다.
이후 크루원들과 함께 댄스 연습을 하던 중에 희망이 박살 나버리고 말았지만.
이성을 완전히 되찾고 안절부절 못하는 고다연을 본 그는…
‘그때는 묘한 분위기가 다연씨를 그렇게 만든 것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상냥하지만 잔혹한 위로를 해줬다.
그녀의 속내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서 저를 덮쳐주세요, 라는 색녀나 할 법한 유혹을.
과연 남자가 그녀를 무어라 생각할까?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주 주말.”
그의 집을 나오기 직전에 들었던 그 짤막한 말은 문장의 구조를 띠고 있지 않았다.
문장이 아닌 단어.
당연히 말이 나온 상황 및 배경에 따라 해석이 천지로 갈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고다연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단순히 이해했을 뿐이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해버렸다.
허락은 물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아으아아아악!!”
발을 동동 구르며 애꿎은 침대 매트릭스를 혼내주었다.
왜, 왜 그랬을까.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는데, 전날에 푹 자둬서 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무엇에 홀려 버린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다.
그녀의 머릿속은 순정 만화 속 주인공처럼 꽃밭이 아니다.
새로 산 속옷을 입고 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만일의 사태를 대비 한 것이다.
‘적어도, 적어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안 됐는데… 설마 내가 유혹하는 쪽이 되리라고는…!!’
최소한의 대비를 하긴 했지만, 진실로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성행위라는 단어는 낯섦과 거부감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했다.
그렇기에 오늘 댄스 연습이 끝난 뒤.
쭈뼛쭈뼛 남자에게 다가가, 이번 주 주말이란 이야기는 농담이었죠? 라 물었다.
떠오르기만 해도 어쩔 줄 모르게 돼버리는 약속을 은근슬쩍 없었던 일로 하기 위해서.
하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왔는가?
남자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르기는 허락 못 한다고.
“내가 내 무덤을… 으으…”
다음 주, 마지막 한 발자국을 함께 딛는 것이 반쯤 확정 되어버렸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모르게 된 고다 연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망쳤다.
이것이 남자가 오늘 그녀를 바래다주지 못한 이유였고,
동시에 고다연이 전력 질주를 한 채 땀에 젖었던 이유였다.
남자가 다음 주 주말이라는, 어찌 보면 그 스스로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의 긴 시간을 준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성적일 때 차분히 마음의 준비를 끝낸 뒤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는 뜻이다.
오늘처럼 분위기에 잡아 먹혀 어쩌다 보니 허락하지 말고.
‘…오늘 몸을 섞었다면… 티끌 정도는 후회했으려나? 아직은 좀 무서우니까…’
참 매너 있으면서, 어찌 보면 정말 욕심쟁이 같은 남자 아닌가?
후회 없도록 준비를 끝내 달라는 건…
여태 누구도 꺾은 적 없는 순결. 미세한 상처조차 나지 않은 마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달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말로는 무르기 없다고 한 남자다.
허나, 다음 주 주말에도 거절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서리라.
그런 남자니까.
그것이, 고다연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상냥함에 언제까지나 기대고 싶지는 않았다.
고다연 또한 남자와 확실한 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기에.
그냥 마음을 다질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 주 주말까지 준비를 끝낼 수 있을까?
“흐앗… 알 리가 없잖아…! 그런 거…”
고다연이 고민에 잠기든 말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다음날 만난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다연을 대해주었다.
덕분에 그녀 역시 어색하지만 조금은 그를 평범히 대할 수 있었다.
생각 외로 지난 일상과 무엇도 변하지 않은 하루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약속일의 전날인 금요일까지도.
마침내…
토요일의 아침이 밝았다.
매번 주말이 그랬듯이, 오늘도 그와 데이트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단체 연습이 끝난 뒤, 남자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장소로 출발하기 전.
그녀는 연인 몰래 박은미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
뻣뻣하게 굳어 있는 고다연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잘 안된다.
매번 연습 때 보여주는 몸놀림이 어찌나 유연한지,
한 번이라도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직관한다면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고장 난 고다연이 보였다.
손발이 같이 나가는 것처럼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나…
고작 손잡은 것 가지고, 진동 세기를 가장 높게 설정한 핸드폰처럼 떨어대는 건 구경할 수 있었다.
“지쳐 보이시네. 다연씨, 어제 잠 설쳤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사실 조금?”
“그럼… 조금 쉬었다 갈까요? 저희?”
“네,네?! 네에?! 벌써?! 저희 방금 데이트 시작했는데요?!”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고다연의 눈이 번쩍 떠지며 나를 올려다본다.
쉬었다 가자, 이 말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았나 보다.
항상 자신감 넘쳤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진 것은 꽤 귀여웠다.
그야말로 기대했던 반응 그대로다.
“푸핫, 하하핫!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농담?”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서… 조금 풀어주려고. 모처럼의 주말 데이트잖아요?”
발정 난 원숭이도 아니고…
설마 내가 대낮부터 첫 경험을 가지자고 하겠어?
오늘 해가 떠 있을 동안은 언제나처럼 데이트를 즐길 예정이다.
조금 인내심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반나절쯤이야.
“노,농담이라니… 지금 그런 농담 하기에요?!”
“그래도 효과 있는 것 같은데?”
“씨이… 그래요. 덕분에 긴장은 풀어졌어요. …이 나쁜 사람아.”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다가왔지만, 알면서도 당해줬다.
그녀의 긴장을 전부 털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조금 정도는 덜어내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니 다행이다.
저번 주처럼 실내 데이트가 아닌 실외 데이트를 선택한 이유도 부담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서니…
내 노력은 말 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댄스 연습을 끝내고 데이트를 시작한 터라 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기도 했고.
하늘의 푸르름이 노란빛에 밀려나고, 그 노란 빛마저 어둠에 먹혀갔다.
우리는 간단한 저녁을 먹고 소화할 겸 밤 가로수길을 거닐었다.
익숙하던 데이트 코스.
우리에겐 이 가로수길의 종착지에 닿는 것이 데이트의 끝을 알리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다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산책로가 끝났네요.”
“네. 그러게요.”
눈앞에 더 이상 사람이 다닐만한 인도는 없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소음을 내며 멀어지는 차도만이 보일 뿐.
하지만 우리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디론가 이동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 서서, 내달리는 차가 더 없는 절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용히 응시했다.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내가 준 숙제의 답을 냈을까?
요 일주일간,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을까?
오늘 내가 살핀 고다연의 기색은 애매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느 정도 결심이 선 것 같기도 하고…
가닥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고민을 길게 끌지는 않기로 했다.
정답은 직접 물어서 확인해 보면 그만이니까.
“다연씨. 저희, 쉬었다 갈래요?”
오늘 데이트 시작 시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물었다.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리라.
맞잡은 그녀의 손에서 힘이 들어갔다 빠진다.
멋대로 해석해 보자면…
올 게 왔다는 느낌이다.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 채 그녀를 돌아보았고…
마찬가지로 나를 돌아본 고다연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