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90) (290/310)

〈 290화 〉 지구 *

* * *

고다연은 주변에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연애 지식만 있지,

남들이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연애의 심화 과정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부풀어 오르는 감정에 대처하는 것도 서툴러 저도 모르게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랑은 처음이니까.

하지만 이는 연애에 한정되었을 뿐…

근본적인 눈치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다연이란 사람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녀가 다 자라기 전에는 인간관계마저 서툴렀던 때가 있었으나,

그것은 과거에 한정된 이야기.

친구의 도움으로, 지금의 고다연은 타인의 감정 변화에 민감했다.

‘혹시 찬영씨도 나와 똑 닮지 않았을까 의심하긴 했지만… 완전 헛짚었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품는 감정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고다연의 경험상,

대부분의 남자가 친구 관계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의도적으로 남사친과 거리를 뒀던 것이다.

사실은 박찬영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고백과 거절, 그사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구설수가 싫어 의도적으로 이성을 멀리하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은 여자에게 적극적인 대시를 받은 적이 없다 했으나, 그렇다고 남중 남고를 나온 것은 아니라 하지 않았던가?

외모를 전부 제하더라도 남자가 흔치 않은 선인임을 아는 고다연으로썬 잘 믿기지 않는 해명이다.

물론 연애에 관해선 유독 눈치 없던 그의 언행을 직접 보고는 생각이 흔들리긴 했다.

허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했을 때…

실은 스스로가 인기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연인인 고다연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쑥맥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이 훨씬 개연성에 들어맞았으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제 망상이고, 정말로 연애에 서투르셨던 거라니…!!”

“이렇게 바뀌기 전까지는 여자와 대화도 안 한 삶을 살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지만요.”

“으으으으…”

고다연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고다연이 매일 밤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절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제가 인기 없다고 한 것, 믿지 않으셨나 봐요?”

“어… 어어… 그게……”

“추궁하는 거 아닙니다. 솔직히 대답해 줘요.”

“읏… 많이는 아니고… 조금? 의심해서 미안해요… ……혹시 화나셨나요?”

“화가 났냐고요? 하하핫! 오히려 엄청 기분 좋죠. 그만큼 다연씨의 눈에 제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니까.”

그게 그렇게도 해석되나?

고다연은 자신의 불신을 잔뜩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봐준 연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고마움 반, 미안함 반씩 섞인 눈빛으로.

언제나처럼 그늘 한점 없는 미소가 보인다.

그가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죄스러움을 한결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때랑 큰 차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람이 된 건 대학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거든요. 키는 좀 컸지만… 몸무게를 비롯해 다른 건 거기서 거기였죠.”

“그럼 그 짧은 시간 내에?!”

많아야 1, 2년 사이에 이만한 변화를 이룩해내었다는 뜻이다.

항상 겸손함이 몸에 밴 남자기에 과장이 섞였으리라 짐작은 갔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무척이나 놀라운 사실이다.

“몇 년 전 찬영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사실 이건 비밀인데… 저, 특수 혈정을 맞고 슈퍼 솔져가 되는 실험에 참여했거든요.”

“헙! 인체실험?! 정말로? 어,어떡하지… 이거 들으면 안 되는 극비사항 아닌가요?!”

“저기… 다연씨? 상식적으로 농담이잖아요.”

“……농담?”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황당하다는 눈을 한 채 고다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찬물을 끼얹듯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가워졌다.

당황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남자가 말해준 비밀은 어디선가 들어 봤던 이야기다.

동시에 머리 안쪽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대충 튼튼한 방패를 들고 무쌍을 찍는 주인공이 나오는 히어로 영화가.

“아. 슈퍼 솔져… 으읏! 이 타이밍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농담으로 안 들리거든요? 그냥 당황해서 잠깐… ……왜,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귀여워서. 변명 계속 안 해요?”

“으… 더 안 할 거예요… 이미 제 이미지는 끝장난 것 같으니…”

열심히 변명해 봤자 점점 허망해질 뿐임을 깨닫게 된 고다연은 울상을 지었다.

자신은 분명 다른 이들 앞에선 명문대생이자, 선망받는 댄스 동아리의 리더인데…

왜 이 남자 앞에서만 이리 바보 같아질까?

“하하. 다연씨의 이미지라… 끝장난 건 모르겠지만, 사귀게 된 이후 바뀐 건 확실하네요.”

“저랑 만나기 전의 제 이미지는 어땠는데요?…”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평범하고 흔한 일상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며… 감히 고백할 엄두도 못 내게 돼버리는 아우라를 둘러싼? 대학에서 본 다연씨는 그랬죠.”

남자가 아련한 무언가를 추억하듯이 말했다.

칭찬이 가득한 말.

게다가 방금 남자가 말해준 고다연의 이미지는 그녀가 의도해서 꾸며낸 겉모습이었다.

평소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던 그녀이니,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기분이 한층 상승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들은 칭찬들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생각이 바뀌기 전.

즉…

저 마음에 쏙 드는 평가가 변해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치… 지금은 아니란 뜻이죠? 네?”

“많이 달라진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제 기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이고요.”

“…그래요? 조금 더 정확히는?”

고다연은 속으로 이런저런 셈을 해본 뒤, 삐진 척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청각은 곤두세운 채였다.

그야,

남자의 솔직한 애정 표현을 들을 기회였기 때문이다.

‘찬영씨. 요즘 들어 장난기가 심해져서인지… 의도적으로 애정 표현하는 횟수를 줄였잖아? 그러니 삐친 척을 하는 정도는 무죄야…!’

대놓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달라 할 용기는 고다연에게 없었다.

그러니 들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다행인지…

남자는 별다른 반박 없이 고다연의 바람대로 행동해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상냥하셔서 놀랐어요. 또 여러 분야에서 능숙하신 것에 비해, 연애 쪽에선 저만큼이나 순수한 것도 기뻤네요. 그리고…”

“그리고?”

“의외로 허당인 구석이 많다 정도?”

“마지막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한 겁니다.”

화난 척을 했지만 정말로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고 부들거리는 것을 억제해야 했다.

그의 칭찬은 유독 그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이리 듣기 위해서 용을 쓰고 있는 것이지만.

“다연씨. 괜찮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본론? 아. 이 사진이요?”

“맞아요. 그……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제 과거가 이래서 실망하셨나요?”

“네에? 제가? 바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번에는 고다연이 황당하다는 눈을 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조금 부족한 과거가 있었다고 마음이 식을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왔다.

정확히는 첫 입맞춤 이후,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뒤부터.

사랑이 식었냐는 질문.

어떤이는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냐며 불만을 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다연으로써는 다른 무엇보다 죄책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그 원인은 본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찬영씨에 비해 너무 애정 표현이 없지… 으… 매번 반성하는데도…’

고다연도 알다시피 남자는 연애 관계에 대해 그녀만큼이나 서툴다.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가 불안해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죄였다.

적어도, 고다연이 생각하기로는.

의심하는 듯한 질문한 것을 자각하는지, 남자는 안도와 미안함이 절반쯤 뒤섞인 눈을 했다.

그것이 고다연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과할 기세였으니까.

그만큼 고다연을 아끼기에, 혹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려는 예쁜 마음씨리라.

아무리 봐도 과분할 정도로 좋은 남자였다.

그녀의 첫 연인이자, 마지막이고픈 연인은.

“찬영씨?”

그런 남자친구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가 가능한 최선의 상냥함을 담아서.

“부르셨어요?”

“저희… 아까 껴안기로 했었죠? 지금 안을까요?”

“어… 방금 저 이상한 질문 했는데, 화난 거 아니었어요?”

“아뇨. 전혀 안 났어요. 그냥… 제가 찬영씨를 안고 싶어져서!”

남자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나서서 스킨십을 조르는 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일이라, 고다연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 용기가 전해졌나 보다.

그녀의 몸은 금방 듬직한 품 안에 포옥­하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심박 수가 올라갔다.

금방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이것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용기는 평소에도 가능했으니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한층 더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찬영씨. 저… 그러니까… 사,사…”

“사?”

“사랑… 으…… 조,좋아해요오…”

한 조각의 용기가 부족했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항복한 고다연은 조금 더 쉬운 길로 가길 택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전달되기에는 충분했다.

항상 따뜻한 미소를 한 채 흔들림 없던 그녀의 연인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으니까.

“…웬일인가요? 저희 기념일 아직 멀었는데?”

“그,그런거 아니어도 해주거든요?! 저도 가끔 정도는…!”

서로 체온을 나누는 중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던 것이 호재였다.

만약 얼굴을 마주한 채였다면 도망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꽉 안겨있어서야,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고다연은 남자의 등에 두른 손에 한층 더 힘을 주며 그리 변명했다.

“…그럼 저도, 보답 삼아서 다연씨가 기뻐할 만한 말 하나 해줄게요.”

“네?”

“왜 제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냐고 물으셨죠? 사실 이미 알고 계실 텐데, 잊으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미 알고 있다니? 제가요?”

기억을 짜내보아도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래도 재촉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까.

“저희가 사귀기로 한 날. 제가 말했었죠? 한참 전, 제가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 다연씨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네에… 기억나요.”

“그럼… 별 볼 일 없던 남자가 어느 순간 자신을 가꾸는 것에 목메게 될만한 사건. 뭐가 있을까요?”

대학에 입학 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앞에 대놓고 힌트가 놓여 있지 않은가?

이를 조합하는 것쯤은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가능한 일이리라.

충격에 몸이 떨려왔다.

끈적한 무언가가 고다연을 휘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기분 나쁘긴커녕 너무나 아늑했다.

이대로 몸에 힘을 빼고 늪 안쪽에 자신을 맡기고 싶을 만큼이나.

“다행히 제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니면 좀 재능이 있었는지… 부끄럽지 않을 수준까지는 됐네요.”

말로는 담담히 말하고 있는 남자지만,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과장이거나 거짓말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허나 고다연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박찬영은 이럴 때 거짓을 입에 담는 남자가 아니다.

“흐읏… 고백. 고백은 왜 안 했어요? 그렇게 노력해 놓고? 왜?”

“사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다연씨는 고백 상대가 얼마나 잘났든 죄다 거절한다는 소문은 뭐 워낙 유명하고, 제가 조금 전에 말했죠? 대학에서의 다연씨의 인상.”

“…고백할 엄두도 안 날 정도로 분위기가 흐르고…있었…”

“그렇게 된 겁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백하길 포기한 거죠. 이거 참, 제가 다연씨에게 고백받은 그날. 운명이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겠나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최근, 첫 입맞춤을 한 이후.

본인의 애정이 남자의 애정보다 덜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던 그녀였다.

허나…

아직 턱없이 부족함을 실감했다.

비교하기 민망할 수준이었다.

너무 과분한 애정에 마음이 가득 차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한동안은 밥을 먹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스윽.

남자가 품에서 조금 떨어졌다.

점차 가까워지는 입술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할 것은,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애들의 키스가 아니다.

어른들의…

그녀의 친구가 그리 말하던, 연인의 키스였다.

원래라면 거부해야 옳았다.

이 분위기에서 그런 키스를 해버리면 어디까지 허락을 해버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허리에 둘러진 손은 치워지지 않았다.

뿌리치면 남자가 상처 받을 테니, 키스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고다연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