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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89) (289/310)

〈 289화 〉 지구 *

* * *

앞서 들어간 고다연은 움직이지 않고, 다만 다소곳이 서 있었다.

허나 방 풍경이 궁금하기는 하나 보다.

살짝 고개 숙인 채 눈만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이대로 계속 서 있기는 어색하니 의자를 가져다주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고다연이 바닥에 앉는 것이 빨랐다.

무엇을 의식하는지 알만했다.

혹시 내가 그녀를 침대에 앉힐까 봐 걱정했나보다.

“너무 굳어 계시는데?”

“아,아뇨… 그냥 신기해서.”

“생각보다 볼 것 없죠? 평범하니까 당연하지만요.”

그녀의 기대를 잔뜩 끌어 모아놓은 내가 말하기 무안하나, 내 방은 정말로 볼 것이 없었다.

매년 시즌별로 사던 옷도 이제는 필요한 옷만 사고…

책장에는 꽤 많은 책이 들어차 있지만, 저건 전부 대학 다닐 때 쓰던 전공서다.

이제는 펼치지 않게 된 지 오래란 뜻이다.

그밖에는 심심할 때 만지작거리기 위해 사둔 아령 몇 개.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 컴퓨터가 끝이다.

“어라? 찬영씨, 컴퓨터에 취미가 있었나요?”

“…아뇨. 이건 어쩌다 보니 생긴 거라… 실제로는 잘 안 써요.”

이 몸의 원래 주인이던 그 새끼는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본체의 내부를 채운 부품들은 물론, 외견까지 멋들어진 놈으로 커스텀 해둔 이 PC는…

놈이 이 집에 남긴 흔적들 중 유일하게 치우지 않은 물건이다.

‘진열장에 가득하던 피규어는 전부 팔았지만… 컴퓨터는 나도 가끔 사용할 일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고사양의 PC를 맞추는 취미가 있었나 보다.

그것도 기업이나 전문가나 사용할 법한 최신식 부품들로.

그 별 볼 일 없던 놈에게 이 무식한 성능을 전부 활용할 능력이 있었을 리 없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취미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나 역시 이 컴퓨터의 자세한 가격을 알아본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 찍혀있던 돈을 본 뒤에는 납득했지만.

그 쥐꼬리만 한 은행 이자로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의 돈이 있다면,

취미에 수백을 쓰는 정도는 별 출혈도 아닐 테니까.

“인테리어용으로 케이스만 있어 보이는 것으로 샀고, 그 내부는 평범한 컴퓨터에요. 성능은 다연씨의 노트북이랑 별 차이가 없을걸요?”

“와아… 똑똑해.”

“생각보다 그럴 듯하죠?”

평범한 인싸인 고다연에게 고사양 컴퓨터를 맞추는 취미를 이해시키는 것 보다,

불필요한 것에 큰돈을 쏟지 않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그런 취미는 없단 이유도 한몫했다.

단순히 저걸 내다 팔 정도로 돈이 급한 것도 아니었길래 쓰는 것이니,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은 피하자.

“…찬영씨는 저 침대에서 자요?”

“저기서 자죠.”

“그럼 어제도 여기서 저랑 통화 한 건가요?”

“네. 의자에 앉아서 할 때도 있고, 침대에 누워서 할 때도 있네요.”

“아령… 혹시 여기서 운동도 해요?”

“거실보다는 방에서 할 때가 많네요.”

실제로 간단한 홈 트레이닝을 할 때는 방에서 했다.

거실에는 안젤리와 크리스가 다니잖아?

그녀들은 내가 운동에 집중해 땀을 흘릴 때면 묘한 눈을 하곤 다가와 툭툭 건드렸다.

성적인 의미로 놀아 달라는 신호였다.

저번에는 한 번 왜 운동할 때만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그때의 내가 유독 유혹적이라는 변명을 들었다.

솔직히 납득은 잘 안 갔다.

남자의 땀 냄새, 심지어 스스로의 체취에 대한 감흥을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아하……”

“혹시 땀 냄새 안 나죠? 열심히 탈취제 뿌리기는 했는데.”

“후훗. 걱정 마요. 찬영씨 특유의 땀 냄새는 안 나네요. 체향이라면 몰라도?”

“다연씨? 제 땀 냄새를 맡아 본 적… 아.”

어떻게 내 특유의 땀 냄새를 알고 있냐는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댄스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니까.

여태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녀를 크루에서 만나게 된 지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붙어 다니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의 체취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내 체취를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큼. 그럼 제 체향이란 건 뭔가요? 혹시 이상한 냄새는 아니죠?”

“글쎄요? 안 알려 줄 건데!”

“……다연씨 변태 같아요.”

눈을 질끈 감고 방 안의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시는 고다연을 보고 말했다.

보란 듯이 행동하는 게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으리라.

곧.

한쪽 눈만이 떠지고, 아직 앉지 않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공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에이… 아무 반응 없는 건 실망인데.”

“제 향을 조금 더 느끼고 싶으시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요.”

“……껴안는 것?”

“싫어요?”

“읏… 그,그건 아니지만… …조금 있다가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킨십을 권유하긴 했지만, 반쯤은 농담 삼아서 찔러 본 것이다.

아직 그녀를 집에 부른 또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다.

그것을 먼저 완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 터벅. 터벅.

책장으로 다가가 책들을 살폈다.

내가 찾던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백하민’이 아닌 내게도 익숙한 물건이었으니까.

“어라? 뭔가요? 그거…”

“제 중학교 때 졸업 사진이요.”

“앗!! 보고 싶어요!!”

부끄러움에 젖어있던 그녀가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팔은 이미 내 손에 들린 사진첩을 향해 뻗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애태우면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였다.

“저 줘요! 조심히 볼게요! 네??”

“하하하. 애초에 보여드리려고 가져온 거니까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자꾸 그러면…… 괜히 장난치고 싶어지잖아요.”

“…장난?”

“졸업 앨범은 다음에 오셨을 때 보여드릴까요?”

“헉…!”

내 장난어린 목소리에 순식간에 몸을 굳힌 고다연이 얌전히 팔을 내렸다.

마치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다소곳해져 있었다.

허나 눈만은 열기에 차 졸업 앨범만을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이 더욱 내 안의 짓궂음을 자극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솔직히, 이 앨범을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수가 될 수도 있다.

그야…

중학교 때의 ‘박찬영’은, 내가 아닌 그 자식이었으니까.

어제 미리 앨범 안쪽을 확인해두어서 알고 있다.

저 안에는,

지금의 봐줄 만한 외모가 아닌 추악하던 시절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 있었다.

키는 독보적인 땅딸보에, 턱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쪄 있다.

그나마 어렸을 때라 여드름이 심각할 정도로 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무리 보정이 어느 정도 들어간 졸업 사진이라고 한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연인에게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싫을 것이다.

하물며 나의 경우는 진짜 내가 아니지 않은가?

억울해서라도 더 보여주기 싫을 법했다.

‘그렇기에 더욱 다연씨에게 보여줘야 해. 백하민의 예전 모습을.’

생각해 보자.

지난번에 백하민과의 서열을 확실히 새겨 주었다고 한들…

그 자식이 내게 반격할 수 있는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와 녀석은 중학교 동창.

놈에게도 내 과거 사진이 들어간 졸업 앨범은 있다.

녀석이 고다연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박찬영’의 과거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사이를 훼방 놓으려 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어렵게 안 가더라도, ‘박찬영’의 대학 시절 사진을 구해 보여줄 수도 있겠지.

‘물론 그 새끼가 제정신으로 내게 덤벼들 것 같지는 않지만…’

변수는 최대한 막아 놓는 것이 내 취향이다.

설마 그러겠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싫다.

물론 방심하고 있다고 한들 결과적으론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도 사람이니 당황 정도는 하겠으나,

과거의 내게 못생겼던 시절이 있었다며 마음이 식을 고다연이 아니니까.

하지만 짜증 나잖아.

짧은 순간이겠지만, 본인의 계략이 통한 줄 알고 신나 할 백하민 그 새끼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비할 수 있으면 대비하는 것이 옳았다.

“…찬영씨?”

“네?”

“저… 지금 얌전히 있는데…”

내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몸이 단 고다연이 불안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졸업 앨범을 다시 집어넣을까 걱정하고 있나 보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순순히 손에 든 것을 건넸다.

작고 가녀린 두 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앨범을 가져갔다.

“중학교 때 몇 반이셨어요?”

“기억이 안 나네요.”

“읏… 그럼 하나씩 찾아봐야겠네요.”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속도를 보니 얼굴이 아닌 이름부터 보고 있나 보다.

개명을 하지 않았다면 몇 년 전에도 내 이름은 박찬영이었을 테니.

이윽고, 손이 페이지 한 장에 머물렀다.

하지만…

“…동명이인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고다연이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딱히 제지하지 않아도, 중학교 때 박찬영과 동명이인은 없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아까 넘긴 그 페이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라?…”

앨범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하지만 내 이름은 두 번 나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고다연은 아까의 내 사진이 담긴 페이지로 넘겼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쯤 되면 의심할 법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 이미지와 매칭이 안 되나보다.

“찬영…씨? 이건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거 맞아요.”

내 사진과 실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고다연에게 대답했다.

그녀는 혹시 지금 농담하는 것이냐며 눈으로 물었으나…

나는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가 이번이 첫 연애라고 한 이유, 이제 알겠죠?”

“……거짓말. 그 말에 이런 복선이 있었다고요?”

“참고로 성형한 건 아닙니다.”

“그건 더 거짓말…!”

“진짜인데.”

담담하게 뱉을수록 진정성이 있다.

그 격언대로, 나는 호들갑 떨지 않은 채 말했다.

그제야 고다연의 눈에 놀람이 담긴다.

다행히 놀라워하는 것 이상은 아닌가 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오래전 내가 오해한 대로, 사람의 스펙을 보고 가려 사귀는 여성이 아니었으니까.

나름 당당히 과거를 밝힐 수 있었던 이유다.

“저, 사람 됐나요?”

“…사람이 된 수준이 아닌데요?”

고다연이 나를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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