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 지구 *
* * *
고다연은 내 뒤를 따라 열린 현관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색한 몸짓으로 주변을 슬쩍 둘러보는 것이, 자신이 상상했던 그런 집이 아닌가 보다.
“…정말 혼자 사시는 건가요?”
“정말로 혼자 사는 겁니다.”
“어어… 생각보다… 엄청…”
“넓죠? 저도 청소하기 불편하더라고요. 요즘은 이사할까 고민 중이에요.”
나는 그녀의 발 앞에 실내용 슬리퍼 한 짝을 놓아주며 말했다.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신는 것까지 확인하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이끌었다.
어차피 이따 댄스 연습을 하러 가야 하니 편한 옷으로 오라고도 했고, 날이 선선했기에 걸친 외투는 따로 없었다.
덕분에 곧바로 집 소개를 시작해도 되었다.
“저기가 제 방. 그리고 저쪽으로 꺾으면 메인 화장실에요.”
“메인… 화장실?”
“침실마다 화장실이 한 개씩 달려 있어서요. 비록 두 명은 못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요.”
황당하다는 고다연의 표정은 재밌었다.
집이 꽤 컸기에 방 소개는 계속되었고,
그녀의 눈꺼풀이 깜빡거리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져 갔다.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있다니… 게다가 침실이 몇 개나 있는 건가요?…”
“지금 이 앞의 방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안 쓰는 방… 앗! 열어보면 안 돼요!”
“네?”
“방치를 한 방은 청소를 자주 안 해서 보여주기 부끄럽기도 하고, 어디서 들어 왔는지 가끔 거미도 기어 다니더라고요.”
“거,거미?!”
내 말에 방문을 열어 보려던 고다연이 흠칫 놀라 문고리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열려고 한 방은 크리스나 안젤리의 방은 아닌, 진짜 빈방이지만…
다른 침실을 열어 보려는 변수는 최대한 막아 놓는 것이 좋다.
다행히 거미가 있다는 경고는 꽤 위협적으로 들렸나 보다.
고다연이 문틈을 노려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쳤으니까.
“거미… 혹시 자주 나오나요?”
“하하핫. 걱정 마요. 아직 거실 밖에서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빈방에서 거미를 본 것도 두어 번뿐이고.”
“휴우…… 미안해요. 저 절지동물은 조금…”
“빈방이 많죠? 혼자 사니까 당연하지만요. 아시다시피 제가 드레스 룸을 꾸밀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델 하시면서.”
“하하하. 그건 잠깐 하는 알바잖아요.”
요즘 시대에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단 말은 평범해선 쓰지 못할 표현이리라.
값비싼 아파트라도 집의 구조 정도는 잠깐만 거닐면 파악 가능하니까.
허나, 우리는 말 그대로 집안을 구경하듯 둘러보았다.
빛나는 눈으로 내 방을 들어가 보려는 그녀를 막고,
우리는 우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옆에 앉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리 안달 난 듯 행동하는 것도 멋없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지금은 마주 보고 앉기로 정했다.
“…찬영씨의 방, 구경하고 싶은데.”
“곧 점심시간이잖아요? 우선 식사부터 하죠. 밥 먹고 느긋하게 구경하시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치이…”
그녀는 불만인 듯 볼이 미약하게 부풀었지만,
어찌 됐든 내 방 공개는 그렇게 조금 뒤로 미뤄졌다.
그런데 고다연의 표정이 조금 어색하게 보였다.
연신 자세를 고쳐 앉기도 했고…
허리를 소파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쭉 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 소파, 엄청 비싼 소파라고 상상하고 있나 보네.’
그녀의 시선이 힐끗힐끗 소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무얼 신경 쓰는지 알만하다.
옷의 단추 같은 딱딱한 부분들로 인해 소파 가죽에 흠집이라도 날까 불안해하는 것 같다.
사실 저 소파가 얼마짜리인지는 나도 모른다.
몸이 바뀌기 전부터 있었던 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부잣집에 값싼 소파를 들여놓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고다연의 염려는 정답일 확률이 높았다.
“…어라? 찬영씨?”
“잠깐만요.”
“꺅?!”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의 뒤쪽, 정확히는 앉아있는 고다연의 뒤로 다가간 뒤…
양어깨를 가볍게 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내가 무얼 하는지 나를 돌아보며 구경하고 있던 그녀는 내 힘 때문에 저항하지 못했다.
가녀린 등이 소파에 푹 닿았다.
“너무 불편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편하게 기대요.”
“하,하지만…”
고다연이 턱을 최대한으로 들어 바로 위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예쁘고 자신감 넘쳤던 눈이 걱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으니까. 다연씨는 제가 그런 거 신경이나 쓸 성격처럼 보이나요?”
“……아니요.”
“그쵸? 하물며 여자친구가 소파에 편히 기댔다고 혼내는 못된 놈은 아닙니다.”
그 말에 손에 잡힌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점차 빠졌다.
소파에 편히 기대게 된 그녀를 보니 만족스런 웃음이 나왔다.
웃음 지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말,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엄청 헷갈리게 만들어.”
“…어라? 저 눈치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아. 알겠다. 눈치 없는 거 맞네요. 킥킥!”
즐겁다는 웃음소리를 보니 이제는 완전히 긴장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코앞에서 보는 진심 100% 미소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으음. 그런데 이 자세면 저 엄청 못생겨 보이지 않나요? 각도가 좀…”
“풋. 그런 거 신경 써요?”
“그래도 억울하잖아요. 다연씨는 예뻐 보이는 각도인데, 저는 그림자투성이에 턱선도 가려졌으니까.”
내 울상을 본 고다연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듣기 좋았다.
하지만 농담으로 시간을 흘리는 건 여기까지.
이젠 정말로 식사를 해야 하니, 나는 가볍게 쥐고 있던 그녀의 어깨에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떠나려는 내 손 위에 작은 손바닥이 올라가며 막아섰다.
누구의 손바닥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다연씨?”
손등에 덮인 따스함을 느끼며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살짝 상기 된 양 볼.
내 눈을 슬쩍 피한 눈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꺼풀이 살포시 눈 위를 덮었다.
“……”
눈치 없이 어째서 눈을 감았냐 묻지는 않았다.
그냥 조용히, 나도 그녀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내렸다.
오늘 총 몇 번의 입맞춤을 할지 모르겠으나,
그 스타트를 끊은 건 의외로 고다연 쪽이었다.
*
“맛있어요?”
치즈가 얽힌 닭갈비를 크게 한 젓갈 입으로 가져가려던 고다연이 나를 바라보았다.
큼큼, 몇 번 헛기침을 한 그녀는 젓가락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음식에 정신 팔린 것을 보인 게 부끄러웠나 보다.
“과장이 아니라 밖에서 사 먹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요리를 훨씬 잘하시네요?… 어쩌면 저보다 더…”
“혼자 살아도 밥은 잘 챙겨 먹으려고 하거든요. 양식류는 경험이 없어 잘 못 하지만, 집밥만큼은 자신 있죠.”
“…인기 많을 것 같은 숨겨진 능력이 또…”
고다연이 가정집에서 흔히 보기 힘든 철판을 보며 말했다.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취미, 맞다.
애초에 처음 요리를 시작한 건 그런 목적이었으니까.
최근까지만 해도 요리하는 남자가 유행해서 너도 나도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지 않았는가?
비록 아직까지 꾸준히 하는 사람은 드물긴 하지만.
사실 최근 요리에 다시 취미가 붙은 건 사실이다.
집이 좋아 가스레인지의 화력이 세니 못 해봤던 요리도 가능하게 됐거든.
예를 들자면 지금의 철판을 사용한 닭갈비가 있겠다.
일반 가스버너의 화력으론 철판 요리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곳에 서 있다.
“고심해서 고른 메뉴인데, 입에 맞는 것 같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치즈도 있겠다, 의도적으로 맵게 했거든요… 다연씨는 매운 거 좋아하셨죠?”
“엄청 좋아하는데… 아… 어쩐지… 방금까지 찬영씨는 매운맛 같은 자극적인 음식 싫어하시지 않으셨나? 싶었거든요.”
“싫어하는 건 아니고, 맵지 않은 음식이 더 좋을 뿐이에요.”
“제 취향에 맞춰 해줬다는 건 맞았다는 뜻이네요.”
고다연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으나…
최근 안젤리와 크리스 덕에 매운 음식을 많이 못 먹어서 고른 것 또한 있다.
가끔 매콤한 맛이 그리울 때가 있지 않던가?
“너무 고마워 안 하셔도 되는데. 손님을 초대했으면 대접하는 건 당연하니까.”
“으음… 다 좋은데… 손님?”
“정정할게요. 손님이 아니라 여자친구.”
그제야 화난 척 끌어모은 그녀의 미간이 풀린다.
장난 섞인 웃음이 식탁 위에 흘렀다.
잠시 뒤.
우리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고다연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식사 다음에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일정 때문이었다.
“자! 밥도 다 먹었고… 그럼 이제 찬영씨 방 구경하러 가도 되죠? 네??”
“안 말릴 테니 재촉하지 말아 주세요. 으음… 생각보다 좀 부끄러운데…”
“에이. 어차피 어젯밤 완전 깔끔하게 청소했을 게 뻔한데!”
“큼. 저는 원래 깔끔하게 사는 편입니다.”
아까의 방 위치를 기억하는지, 고다연이 내 손을 잡고 앞장서 이끌었다.
그녀로서도 흥미진진할 만했다.
연인의 방을 구경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일 테니.
텐션이 높은 상태의 그녀는 정말 귀엽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자.
“여기, 이 방이었죠?”
“오. 맞아요.”
아까의 거미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방문을 앞에 둔 채 망설이는 그녀를 대신하여 내가 문을 열었다.
문은 그 흔한 끼익거리는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힐끗, 고다연이 고개를 조금 빼어 내부 구조를 살폈다.
말릴 필요는 없었다.
어제 집 전체를 청소하기는 했지만, 내 방은 특히나 더 신경 써서 청소했다.
혹시 주황색 머리카락이나 금빛 머리카락이 바닥에서 발견되면 대참사잖아?
“그럼… 조금 쑥스럽지만, 들어오세요.”
나는 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허나 고다연은 여전히 방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의문스럽게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연씨? 안 들어오세요?”
“…그……”
내 질문에도 그녀의 망설임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거미 때문에 그런 건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럴 리는 없었다.
개인 방. 평범히 생각하면 청소를 가장 많이 하는 장소에 거미가 나올 것 같다며 높았던 텐션이 순식간에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
어째서 그녀가 망설이는지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눈치챌 수 있었다.
고다연은 아닌 척 내 침대를 힐끗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 혹시… 방금까지만 해도 방을 구경할 생각에 들떴었는데, 차분히 생각해 보니까 저랑 단둘이 방에 있는 게 걱정되시나요?”
“읏…!”
정곡을 찔렸는지 전신이 움찔거린다.
침대가 있는, 그것도 연인 사이인 이성의 방에 들어간다는 건…
나 잡아먹어 달라고 소리치는 꼴이니까.
하물며 이 집에는 우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으니,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들지 않기가 힘들었다.
“하긴. 약속하긴 했더라도 실제로 눈앞에 맞닥뜨리면… 불안할 법하죠.”
“아뇨…! 그, 찬영씨를 못 믿고 있다는 의미나 불안하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그……”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듯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움직이려는 손을 억눌러야 했다.
…생각해 보니 억누를 필요 없지 않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위로하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처럼 거실에서 놀까요?”
“……”
“전 상관없어요. 부담 가지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줘요.”
“그… 사실 궁금하긴 한데…”
“그럼?”
그녀의 손가락이 한창 머리를 쓸고 있던 내 손의 소매를 잡았다.
작게 털어내면 곧바로 떨어질 것 같은 미약한 힘이었기에 쓰다듬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정적.
오래 지나지 않아 고다연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안… 덮칠 거죠?…”
“다연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정말?…”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졌지만,
그런 짓궂은 행동은 상상으로만 그치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농담으로 못 듣고 덜컥 믿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제야 고다연이 한 걸음씩 내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살짝 비켜서 문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내 앞을 스쳐 지나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철컥.
조심히 방의 문을 닫았다.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끼익거리는 소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