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지구 *
* * *
이제 막 해가 진 저녁.
핸드폰이 우웅 거리며 몸을 떨었다.
문자는 아니었다.
어서 받아달라는 듯 핸드폰이 계속 떨어대었지만, 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을 먹었나 보네?”
아직 전화를 받은 것도 아니고, 오늘 고다연을 만났을 때 별다른 언질을 받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은근슬쩍 권유한 초대, 그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었나보다.
여태 나는 답변을 재촉하긴커녕, 아예 화제로조차 올리지 않았다.
첫째로는 이리 행동해야 흑심이 없어 보이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둘째론 진심으로 급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떤 상처를 가졌는지 아는 만큼 부담스러워하면 깔끔히 포기할 생각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대었다.
생각이 이 이상 길어지면 전화가 끊길 수도 있으니.
“다연씨?”
앗. 다행이다. 못 받는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씻고 있었거든요.”
제가 너무 늦게 전화했나요?
“전혀요? 마침 목소리 듣고 싶었거든. 킥킥.”
꺅! 뭐야! 오글거려!
전화 너머로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랑 전화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연애하는 맛이 난다.
내가 뭘 해도 반응이 좋거든.
이후로 사소한 잡담이 오갔다.
전화를 건 것은 고다연이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낌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마음을 정했음에도 화제 전환을 미루는지 알 것만 같다.
제 입으로 내 집에 가고 싶다 말을 꺼내기 힘든 것 같으니, 내 쪽에서 자연스럽게 화제 전환을 하기로 했다.
“혹시 이번 주말에도 바빠요?”
이번 주말이요? 아뇨. 아무런 일정 없어요. 하나 있다면 댄스 크루 연습?
“오. 그럼 이번 주말은 저랑 종일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죠?”
…상관없어요!
“으음… 그럼 데이트 장소가 문제인데…”
나는 고민에 잠기는 척을 했다.
수화기 너머로 주저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아마도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는 것 같다.
이대로 기다리는 것도 좋겠지만…
약간 배려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큼. 찬영씨 그…
“앗! 그러고 보니, 다연씨 저번의 그거 기억나시나요?”
네? 그거라면…
“며칠 전 제가 생각해보라고 했잖아요. 저희 집 구경 오시는 것. 어때요, 생각 정리됐어요?”
아! 아하! 그거요? 네네. 아이참, 사실 저 방금까지 깜빡하고 있었는데…
“하하핫. 제가 권유해놓고 죄송하지만… 저도 잊고 있었네요.”
우리는 둘 다 약속을 잊지 않았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이제서야 기억이 난 척을 했다.
열심히 모르는 척을 하는 고다연이 귀여워 조금 찔러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원래 수락하기로 결정했었는데, 혹시 삐져서 마음이 바뀌어버리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결정은 하셨나요? 혹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해도 되려나?”
……으음… 찬영씨는 제가… 왔으면 좋겠어요…? 찬영씨의 집…
소리를 확 줄인 조곤조곤한 미성이 수화기를 타고 내 귀를 간지럽혔다.
전화를 하면서 속삭이는 건 이래서 위험하다.
귀 바로 옆에 입을 대고 속삭임 당하는 것 같아서, 저절로 야릇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연애에 미숙한 그녀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깊은 뜻 없이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물어보려고 한 것이 전부이리라.
그러니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나 또한 목소리를 낮춘 채 대답하기로 했다.
중저음, 직접 겪어 봐야 야릇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지.
“…저보고 왔으면 좋겠냐니… 질문이 너무 의미심장하네요.”
네? 네에?
“저희, 사춘기적인 시선은 빼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앗…! 그,그런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읏…
당황이 전파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평소라면 두 팔 벌려 환영했을 분위기지만…
지금만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 일이 치러질 것만 같은 예감이 걷어지지 않는다면, 부담을 느낀 고다연이 초대를 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했다.
“하하핫.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속에 의미심장한 뜻을 담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질문이죠? 제 생각은 어떠냐는.”
맞아요…! 정말로 이,이상한 뜻 없이 물어본 거니까!
“그럼, 다연씨의 해명대로 이상한 오해는 버릴게요.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대답하자면… 활짝 웃으며 환영이죠.”
호쾌한 목소리로 오해를 하지 않겠다 말하자, 고다연이 안도한 듯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걱정됐나보다.
“혹시 본다면 조금 일찍… 정확히는 점심 식사 전에 볼까요? 오전동안 놀다가 댄스 연습실로 같이 출발하면 되겠네요. 그 왜, 연습 끝나고 만나면 해가 져버릴 테고.”
……고마워요. 그렇게 티가 잔뜩 나는 배려… 상냥해, 정말로.
“이런. 티가 너무 났나요?”
후훗!
“그래서, 이번 주말에 오시는 건가요? 참고로 손수 만든 식사를 대접할 예정입니다. 저 자신 있어요.”
음… 이래놓고 안 간다고 하면 삐지는 거 아니에요??
긴장이 확실하게 풀어진 듯했다.
이제는 목소리에 장난기까지 담긴 것을 보면.
조금 안달 난 척을 해줬더니, 역시나 티 나게 좋아했다.
여전히 주도권을 잡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다웠다.
정확히는 주도권을 잡는 것 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티를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해야 옳았지만.
“삐지지는 않겠지만, 조금 아쉽긴 하겠죠.”
그럼……
말꼬리가 늘어졌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고, 밀당의 한 종류라는 걸 알지만,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믿을…게요?
“……”
순간적으로 입이 굳고 말았다.
방금의 믿겠다는 말, 꽤 심장에 타격을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일에 나를 보고 직접 말했다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었다.
믿고 있다, 없던 음심도 생기게 만드는 마법이 깃든 단어 아닌가?
가까스로 마음을 억눌렀다.
내가 줘도 못 먹는 고자는 결코 아니지만, 주지 않으려 했는데 뺏어 먹으려 드는 무뢰배는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요. 정확한 요일은 언제가 좋을까요? 음. 둘 다 상관없으시다면 토요일로 하시죠.”
혹시, 그래야 하루라도 더 일찍 보니까?
“정답.”
고다연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무튼, 자연스럽게 안젤리가 자리를 비우는 토요일로 약속을 잡는 것에 성공했다.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다른 동거인인, 크리스에게 토요일 날 자리를 비우도록 유도할 일만 남았다.
미룰 이유는 없다.
나는 곧장 크리스의 방으로 가 노크를 했다.
허락이 담긴 대답을 듣자마자 방문을 열었다.
동시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꾸며냈다.
“찬영?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으음… 조금 곤란한 사정이 생겨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크리스가 내 얼굴을 보고 상체를 번쩍 세웠다.
나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으며 시작했다.
거짓과 진실을 적당히 섞은 설명을.
“토요일에 스케줄이 생겼어.”
“저번처럼 일 나가는 거야? 반쯤 취미로 모델 알바한다고 했지?”
“비슷한데 조금 달라. 왜냐하면, 이번엔 중요한 회의를 하기로 했거든. 문제가 되는 건 그 회의를 하기로 한 장소야.”
“혹시… 먼 곳까지 가야 하는 거야? 돌아오는데 며칠이나 걸려…?”
“아니. 그 반대. 우리 집을 회의실 및 촬영 장소로 빌리고 싶다 하셔서. 신세 진 적이 있는 분이라, 부탁을 거절하기 좀 곤란하네.”
“아……”
들키면 안 되는 비밀.
모든 것을 숨기려 드는 것은 하수다.
그리고 나는 하수는 못 되었다.
몰래 고다연을 들여보냈다가, 크리스가 바닥에 긴 머리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수라장은 너무 철 지난 클리셰 아닌가?
기본적으로 흔적은 최대한 지울 것이지만…
혹시 내가 놓친 증거를 들키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면 된다.
미리 이런 식으로 허락을 구해 놓으면, 사적으로 만난 것이 아닌 공적으로 만난 것이란 변명이 가능하니까.
“어어… 혹시 나도… 인사… 드려야 하나?…”
“나야 애인을 주변에 소개하면 좋은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네. 네 신상을 타인에게 함부로 공개했다간 혹시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렇지… 비슷하긴 해도, 이 지구는 내 고향이 아니니까. …신분증도 없고……”
“너의 그 엄청 자연스러운 한국말도, 다른 사람이 보면 신기하게 여겨질걸? 아마 엄청 질문할 거야. 한국말 어디서 배웠냐며.”
“아! 그것도 있구나. 응. 이해했어.”
집 근처로 쇼핑하는 것 정도는 크리스도 가끔 다녀오기는 했다.
허나, 내 지인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연히 미리 말을 맞춰 놓은 것도 전혀 없을 수밖에 없다.
“…방문 꽉 닫고 있을까?”
“그거보다 훨씬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이 있긴 하지. 네가 잠깐 쉘터에서 내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
“앗! 뭔지 알겠다! 나 쉘터에 있는 동안 그 세계 시간을 멈춰 놓으면 되잖아? 그럼 나는 기다릴 필요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좋은 아이디어지만, 그런 위험한 가능성이 담긴 방법은 불가능해.”
띠링!
=
* Tip
[파티원 지정]
소설 속 인물을 지정해 파티원으로 등록합니다.
파티원은 시스템의 주인이 이동한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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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지구의 인물은 파티원으로 지정할 수 없습니다.
파티원을 남기고 혼자 연재 중인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의 주인과 다른 시간대에 있지 못합니다.
파티원을 한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나는 오래전에 한번 봤던 도움글을 불러왔다.
예전에 달달 외워놨듯이…
파티원은 시스템의 주인과 다른 시간대에 있지는 못한다, 이 구절이 나와 크리스를 1:1 비율의 시간대에 있도록 강요했다.
나와 그녀가 다른 차원에 있을 수는 있으나 시간의 흐름은 언제나 동등해야 했다.
우리 집에 아기천사가 있을 때, 안젤리가 지구의 시간을 멈추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이해했다.
파티원이 된다는 것.
지구의 차원보다 낮은 소설 속 차원에 속한 존재이던 그녀들이,
나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기에.
‘…파티원을 시간이 멈춘 차원에 영원히 가두는 그런 건 불가능 하다는 뜻이지.’
가능하다고 한들 할 생각도 없지만,
원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하게?”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과 회의할 동안, 크리스는 그쪽 세계에서 쉘터의 업무나 보고 있을래? 나는 쉘터장에게 휴가 하루를 내고 방에 틀어박힌 척할게.”
“아하! 그럼 되겠네! 나는 상관없어!”
“…응. 번거롭게 만들어서 미안해. 토요일날 미팅이 끝나면 데리러 갈게."
종종 있는 내 외출에 내심 외로워하던 그녀지만,
혹시 자신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녀다.
내 제안에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크리스의 순수한 배려심을 이용하고 있는 만큼 양심이 무척이나 아파졌지만…
평소에 내 시간과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그녀이니 딱 한 번만 양보해달라 속으로 빌었다.
‘…나중에 많이 안아줘야겠네.’
아무튼, 이렇게 무사히 토요일 하루의 시간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어렵게 만든 시간인 만큼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
샀다.
결국 사버리고 말았다.
고다연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쇼핑백을 보고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결코 박은미가 한 말 때문에 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침 속옷을 살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응…! 평소에도 오래된 속옷밖에 없어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그리고 외출할 때 새로운 속옷을 입고 가는 건 당연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새 속옷을 집 안에서만 입는 건 아까운 짓이니까.
고다연이 의미 없는 변명을 하든 말든, 새 속옷은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직 빨지도 못한 속옷은 주말까지 꺼내지는 일이 없었다.
스윽.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멀게만 느껴졌던 주말의 아침이 밝았다.
현관 앞.
옷 안쪽의 감촉이 낯설다는 듯 브라끈이 위치한 쇄골 부분을 연신 매만지던 고다연은 살짝 상기 된 얼굴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보내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어라? 여기 맞는…데?”
상상을 훨씬 초월한 집의 크기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 집의 문을 열고 나온 인물을 보곤 한층 더 당황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어라? 다연씨? 벌써 오셨어요?? 이런, 미리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커다란 집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항상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자취방’이 맞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