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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6화 〉 지구 *

* * *

사실 정말로 고다연을 덮치려는 생각은 아니다.

첫키스를 한 것만 해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여태까지 우리의 진도 속도를 생각해 봤을 때, 너무 성급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질펀하게 서로 애정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참 촉박하다.

그녀는 내가 혼자 사는 줄 알지만, 사실은 동거인이 있으니까.

자넷과 멜, 데이지는 아직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지구로 데려오지 않았기에 문제가 안 된다.

다만…

‘크리스랑 안젤리는 당장 나랑 같이 살고 있잖아?’

고작 두 명에 불과한 동거인이지만, 둘이 동시에 집을 비우는 시간을 만들기는 참 어려웠다.

짧은 시간 틈을 만드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들다.

그렇다고 첫 경험을 애무도 토크도 생략한 채 후딱 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실상 덮치고 싶어도 덮칠 수 없다 해야 옳으리라.

그러면 왜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초대를 했느냐?

첫 번째로 나와 밀폐 공간에 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리도 두 번째는…

‘따로 말로는 안 했지만… 다연씨는 내 자취방을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집이라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밥을 사줄 때도, 커피를 사줄 때도.

자꾸 다음번에는 자신이 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나이대니까, 내 지갑 사정을 자신과 별달라질 바 없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고다연이 실시간으로 알바라도 하고 있으면 가끔 정도는 감사히 얻어먹었겠지만…

현재 그녀는 알바를 그만두고 학업과 댄스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다.

여태 알바를 하며 모아놓은 돈으로 월세를 내고 있다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 그 돈으로 사주는 밥을 얻어먹어라?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 입으로 나 돈 많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직접 겪게 하고 싶었다.

내가 지갑 사정이 꽤 넉넉하다는 것을.

‘혼자서 방이 몇 개나 되는 집에 사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깨닫겠지.’

계산을 하는 나에게 미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는 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던 일이다.

풀 죽은 그녀를 볼 때마다 나도 마음이 쓰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니 밥 사주는 정도는 아무렇지 않단 티를 내기로 정했다.

고다연이 내 돈이 많다고 감사함을 잃을 사람도 아니고…

단순히,

조금 정도는 내게 기대는 것이 편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후룩.

“안젤리? 언제 천계에 다녀온다고 했지?”

앞쪽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안젤리를 보고 물었다.

내 질문에 멍하니 상념에 빠져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한 점 없는 동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녀오냐고? 으음… 10일 뒤니까, 다음 주 토요일?”

“토요일이라…”

그렇게 고다연에게 은근슬쩍 내 재력을 보일 기회만을 노리던 내게 정말로 기회가 찾아왔다.

며칠 전 안젤리가 내게 양해를 구한 것이다.

잠깐 천계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며,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다고.

‘이제 다연씨와의 약속을 다음 주 토요일로 잡고, 그날 크리스가 자리를 비우게끔 하면 완벽하려나?’

나를 지켜주던 그녀의 역할을 대신하여 아기 천사가 내려온다고는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걔는 내가 안젤리와 이런 사이가 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아기 천사에게 들키는 건 별 위협적이지 않다.

녀석의 입장에서 내가 고다연과 만나는 건, 크리스와의 양다리일 뿐일 테니.

워낙 눈치가 없는 녀석이니, 어쩌면 내가 고다연을 집에 데려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확률도 존재한다.

“오래 다녀와?”

“으으… 아무리 빨라도 해가 져야 올 수 있을 거야. 중급 천사 이상은 모두 모여야 하는 초대형 안건이라서.”

“그렇구나. 음… 지구의 시간을 멈춘 채 순식간에 다녀올 수는 없는 거야?”

“내 후배가 지상에 있을 때는 시간을 멈추지 못해… 어라? 전에 한 번 말하지 않았나?”

“알긴 하는데, 그냥 아쉬워서. 그날 하루는 얼굴 못 보는 거잖아?”

“………응.”

지구에 동격의 존재가 있을 경우 시간을 멈추지 못한다,

오래전 직접 들었기에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안젤리가 자리를 비운다고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되잖아?

의도적으로 기운 없는 척 좀 한 것이다.

‘대충… 널 못 보는 그날은 조금 외롭겠네, 라는 의미가 되려나?’

안젤리는 똑똑한 편이니 쉽사리 속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역시, 나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애정표현이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베넷씨는?…”

“크리스는 일찍 잠들었어. 그래서 목소리 안 줄인 채 말하고 있었고.”

“…그래?”

안젤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나와 담소를 나누기 적합한 자리.

즉,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담소 보다 스킨십을 하기 더 적합한 곳으로 옮겨 앉았다.

내 옆에 앉았다는 뜻이다.

­ 투욱.

내게 몸을 바짝 붙인 안젤리가 그것으로도 모자라는지 몸을 기대어 왔다.

스윽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그녀와 눈이 맞았다.

애틋한 시선이 내게 물어오고 있었다.

비록 격렬한 애정 행각은 못 하지만…

조금 진한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거절할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안젤리의 허리에 둘러 끌어당겼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살포시 감았다.

잠깐 뒤.

뜨거운 차로 인해 달궈진 설육이 서로를 탐하듯 엉켜 들기 시작했다.

*

고다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선은 멍하니 핸드폰을 향하고 있었다.

그날, 그녀를 고민 가득하게 만든 제안을 받은 이후.

남자는 단 한 번을 약속에 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지 않았다.

마치 완벽하게 까먹었다는 듯.

“그런 걸 보면 정말 흑심은 없는 것 같기는 한데……”

포옥­ 작은 입에서 연거푸 한숨이 나왔다.

대답을 재촉받지 않았기에 부담이 심해지지는 않았으나,

주저가 되는 건 주저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싫기에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그런 미래를 그린다면,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불안에 찬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그냥,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채 몸이 더럽혀 질 뻔했다는 그 과거가.

음흉하게 웃는 누군가의 상판이 떠올라버려 무심코 숨이 굳고 마는 것이다.

‘…최근에는 좀 덜해졌기는 하지만…… 대학에서 가끔 마주쳐 버릴 때면 식은땀이 나서…’

그럼 그녀의 절친한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허나 박은미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고다연이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섣부른 권유로 친구가 험한 일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되면 죄책감에 시달릴 건 뻔하지 않은가?

그녀에게 있어 백하민이란 남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설명하는 건…

그 범죄에 가까운 행동을 제하더라도 쉬운 일이었다.

“으으… 혼자 생각하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물어보자.”

결국 고다연은 핸드폰을 들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수신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 여보세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묘한 안도가 들었다.

한결 편안해진 고다연은 그녀에게 짤막한 설명을 했다.

그녀의 미약한 트라우마를 제외하고.

­ 집에 놀러 오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자,잠깐. 크게 말하지 마. 놀랐잖아…”

­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데… 음흉하게 생각해도 그거고, 음흉하게 생각 안 해도 그거잖아. 상식적으로!

“그런…가?”

­ 잠깐. 그러고 보면 너네 키스도 아직이지? 으음… 그걸 생각해 보면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날 본 너네가 워낙 풋풋했어야지.

“……아. 키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첫 키스를 했다고 고백을 하는가?

다만, 고다연은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박은미라는 사람은 눈치가 장난 아니게 빠르단 것과,

그녀와 지낸 시간이 많아 사소한 언행의 변화만으로도 수상함을 느낀다는 것을.

­ …얘 좀 봐라?

“응?”

­ 너네 첫키스 했지?

확신이 서린 질문.

변명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한 고다연은 입을 뻐끔거렸다.

­ 뭘 그리 부끄러워해? 고작 뽀뽀 가지고. 늦어도 한참 늦은 거야.

“뽀뽀라니…!”

­ 그럼. 진짜 ‘키스’?

“그…건…”

고다연은 작게 불만에 찼다.

그녀가 남자 친구와 한 것은 애들 장난과 같은 뽀뽀가 아니었다.

정말로 마음이 한가득 차오르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따스한 입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은미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다연은 연애에 익숙지 않되, 그렇다고 마냥 순진하기만 한 어린애는 아니었다.

친구가 말한 ‘키스’가 무엇을 뜻하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 본론으로 돌아갈까? 그래서. 은미 네 생각에는 그 제안을 수락하는 게 맞는…”

­ 킥킥. 귀엽게 도망치기는. 너네 둘이 하는 연애가 고3인 내 남친보다 풋풋하다는 게 말이 돼?

“고딩 연애 아닌데…”

­ 좋아. 원하는대로 화제 전환에 휘말려줄게.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옳냐라… 으음……

꿀꺽,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모든 것을 친구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헷갈릴 때, 한두 번 조언을 따르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가끔 틀리긴 해도 대부분의 조언은 나쁘지 않은 상황을 불렀으니까.

곧 정적이 걷혔다.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 개인적인 생각은, 정말로 흑심은 없는 것 같은데? 너만 괜찮다면 가도 별일 없을 듯?

“역시! 역시 그렇지?”

­ …너 눈에 띄게 기뻐한다? 혹시 답정너였던 건 아니지?

“아,아닌데?”

­ 뭐.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이건 흘려들어도 되는데……

박은미가 망설이기 시작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친구는 언제나 자신감을 가지고 팍팍 일을 추진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고다연은 어째서 친구가 망설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럴만한 이야기였다.

­ 진도에는 개인차가 있다곤 하지만… 정말 첫 경험을 겪는다 해도, 막 불안해할 정도로 빠른 속도는 아니야.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볼 때.

“…보통 첫날밤을 그렇게 빨리 가져? 잘 안믿…기네.”

­ 내 주변은 그랬어. 으음… 에휴. …나도 이건 비밀로 하려 했는데…

“으응?”

­ 저번에 내 남친 봤지? 같이 서울 올라왔을 때.

“아. 창호씨…라고 했나?”

­ 응. 창호. 썸타기 시작한 지는 꽤 됐지만… 걔랑 사귄 지 며칠 안 됐고, 실제로 너한테도 ‘그런 목적’으로 서울을 올라온 건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사실은… 헤헤?

박은미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고다연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너,너,너 설마 서울에 올라왔을 때?!”

­ 뭐. 그런 거지?

“하지만 창호씨 미성년자잖아! 그리고 방까지 따로 잡았다고…!”

­ 에이. 하나만 예약하면 대놓고 헤픈 년 되잖아. 적당히 자기 전에 잡담하고 싶단 핑계로 부른 다음, 잡아 먹힌 거지.

“자,잡아 먹…혔…”

­ 이상한 오해하지 마? 정말로 썸탄지는 꽤 오래됐으니까. 그럴 만 하니까 그런거고.

그제야 고다연은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변 성인 연인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도를 나가는지에 대해서도.

과한 망상이다 싶었는데, 정말로 그런 거리라곤 상상을 못 했다.

그녀보다 훨씬 늦게 연인이 된 박은미 커플에게 진도를 뒤처졌다니.

이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 아무튼. 그런 건 아닐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 이쁜 속옷 있어?

“없어엇!!!”

­ 그럼 이참에 좀 사던가. 히힛. 나 끊는다? 바이.

그것을 마지막으로 박은미는 도망쳤다.

답을 얻으려던 고다연으로써는 혼란만 더해진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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