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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85) (285/310)

〈 285화 〉 지구 *

* * *

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이 단발성으로 그친 것을 봤을 때, 문자가 온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누구에게 온 문자인지 알았다.

밖은 이미 해가 져버린 늦은 시각.

인간관계도 넓지 않은 내게 밤에 연락을 할 사람이라곤 한 명 밖에 없으니.

­ 머해요

­ ?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의 송신자가 적힌 부분을 보니 괜스레 헛기침이 나오는 애칭이 존재했다.

아무리 공개 연애 중이라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녀를 이렇게 저장해 놓은 걸 들킬까 두렵네.

여자친구의 이름 저장을 오그라들게 한 건 나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연히 자신의 연락처가 ‘다연씨’라고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본 그녀가 귀여운 불평을 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커플에 대해 로망을 가지고 있던 그녀기에,

서로 이름만 적어 놓는 건 너무 무뚝뚝하게 느껴졌나 보다.

내 기준, 연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저장된 이름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오그라드는 애칭을 붙이는 건 항마력이 버티질 못하니…

원래 이름 앞에 딱 한 글자만 더 붙여, ‘내 다연씨’로 수정하는 걸 눈앞에서 보여줬다.

이 이상의 애칭은 나조차 낯이 간지러우리라.

혹시 고다연은 이 이상을 바라는가 싶어 괜찮냐 물었으나, 그녀의 반응보곤 만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줍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기쁨의 아우라를 뿜어내었으니까.

그녀의 핸드폰에 내 이름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핸드폰을 등 뒤로 숨기며 절대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은 아직도 모르는 채다.

도대체 뭐로 저장해 놨길래…

“으음… 뭐하냐고 물어도… 10분 전까지 크리스랑 뒹굴었다곤 말 못 하는데.”

그러다가 칼 맞는다.

그러니 답장으론 운동하고 있었다 보냈다.

어떻게 보면 거짓말한 것은 아니잖아?

­ 오늘 연습 나왔는데 집에서 따로 운동을 하는 건가요?

­ 너무 성실해!!

이대로는 양심이 너무 아파왔다.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그냥 평범하죠. 요즘 가벼운 홈트정도는 다들 하잖아요?

­ 그런데 프로필 사진 바꾸셨네요? 커피?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하며 문자를 보냈다.

기존에는 멀리서 친구가 찍어준 전신 셀카였던 것이,

그냥 물건을 찍은 사진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으나…

최근 나와 데이트를 하던 중 그녀가 찍어간 사진이었다.

‘얼굴은 안 나왔지만… 손은 나와 있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왼쪽 잔을 쥔 손은 얇고 하얀 손.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듯 오른쪽 잔을 쥔 손은 굵고 두꺼웠다.

누가 보아도 남자와 여자의 손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프로필을 본 사람이라면 현재 그녀가 연애 중이란 것까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남녀가 이렇게 붙어 컨셉 사진을 찍는 경우는 그럴 때밖에 없으니까.

­ 괜찮아요?

­ 프로필 사진이면 대학 친구들도 다 알게 될 텐데.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그녀는 최근까지만 해도 작은 댄스 동호회 안에서 연애 사실을 밝히는 것조차 부끄러워했으니.

프로필 사진을 이리 바꿨다는 건…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고다연이 연인이 있음을 밝히면 나야 좋지만 갑작스런 생각의 변화에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생각에 변동이 올 수준의 큼지막한 사건이 없지는 않았다.

고다연은 어제 첫 입맞춤을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오늘 하루의 반응을 볼 때, 내게 더 마음을 열게 된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고다연이 항상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 으으… 안그래도… ㅠㅠ

­ 그래서 찬영씨한테 연락한 거에요. 살려달라고…

­ (사진)

­ 지금 알람 다 꺼놓고 안읽씹하는 중

고다연이 자신의 톡방 리스트를 캡처하여 보내주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개인톡이든 단체톡이든 읽지 않은 알림이 수십 개 단위로 쌓여 있었기에.

공통점이라면, 미리 보기에 나온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물음표로 말이 맺어져 있었다.

수많은 질문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댄스 크루 단톡방에서도 질문을 버티고 도망쳤던 우린데…

그녀가 충분히 질려 할 만 하다.

­ 다연씨. 그럼 저랑 전화할래요?

­ 통화하느라 문자 못 봤다는 핑계도 되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답장이 온 것이 아니라 전화가 오고 있었다.

지난번 내게 밀당 시도를 들킨 이후, 결코 안 하겠다는 다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 큼큼. 네! 여보입니다!

“…끊을게요.”

­ 아앗! 미,미안해요! 농담! 농담이니까!

저질 드립은 단호하게 쳐내야 한다.

방금 피식 웃은 건 농담이 웃겨서가 아닌, 순수히 쩔쩔매는 고다연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종일 제 앞에만 서면 말수가 줄더니… 전화로는 엄청 편해 보이시네?”

­ …지금은 찬영씨 얼굴이 안 보이니까…

“하하핫. 용기가 좀 생겨요?”

­ 물어보지 마세요…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

스스로도 너무 소극적이었단 자각은 있었나 보다.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 그런데 프로필 사진은 왜 갑자기 바꾼 건가요?”

­ 어어… 유독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서?

“급조한 핑계 대지 말고.”

수화기 너머 으윽­ 하는 신음이 들린다.

반응을 보니 어떤 마음으로 바꾼 것인지 예상이 갔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 저,정말로 별 뜻은 없어요! 그냥… 그냥……

“듣고 있습니다. 계속해요!”

­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한데, 이미 알면서 저 놀리는 거 아니죠?

그녀도 성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렇다고 해도 운명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지만.

“평소에는 저한테 그리 애정표현 해달라고했으면서… 본인은 이럴 때 도망치기 있어요?”

­ 네에?! 제가 언제 애정표현을 졸랐어요!

“말로는 안 해도 표정이랑 행동이 해달라고 떼를 쓰던데?”

­ 그,그건…

내가 솔직한 호감을 보일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던 것이 누구더라?

당장 오늘만 해도, 자는 척 하던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하루종일 헤실거렸으면서.

­ …착각입니다.

“착각은 무슨. 내심 좋았죠? 솔직히 말 안 하면… 앞으로는 저도 애정표현 잘 안 해줄 겁니다!”

­ 앗!! 치사해…!

“저는 항상 다연씨 얼굴을 마주한 채 말해주잖아요. 전화로 듣는 것만 해도 많이 양보하는 거예요.”

­ ……

고다연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적극적으로 애정을 내비치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물론 내비치지 않더라도 그 속마음쯤이야 훤히 알고 있지만,

용기 내 호감을 표현하는 연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 …알겠어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복을 알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얌전히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목소리에 또다시 웃음기가 가득 섞였다는 것을 들키면 정말로 도망칠지도 모른다.

­ 으으… 찬영씨가 종종 해주던 애정표현, 기뻤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 아,앞으로도 자주 해주세요……

이 말을 끝으로 수화기 너머가 신기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화면을 봐도 전화가 끊긴 건 아니었다.

상황을 어렴풋 이해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없는 것이, 아무래도 음소거를 한 모양이다.

저 멀리한 오피스텔의 원룸에서는 여성의 비명이 퍼지고 있지 않을까?

완벽한 승리에 박수가 저절로 나온다.

이 기세를 몰아가서 아까 듣지 못한 답도 듣기로 했다.

“다연씨? 다연씨. 어라, 안 들리시나?”

­ …후우. 후우. 네. 듣고 있어요…

어째선지 지쳐있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왜 대학에까지 연애 사실 공개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 다른 사람에게도 티 내고 싶다는 욕심이 들고… 나,남자친구 자랑도 좀…?

“제 자랑…? 과연 할 게 있을까요?”

­ 그건 비밀!!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한데. 제 어느 부분이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 절대 말 안 해줄 거에요…! 아직 할 말 조금 남았는데, 이 이상 추궁하면 이 얘긴 그만해버릴 거야!

“이런. 조용히 있을게요.”

무시무시한 협박에 파고들고픈 마음이 싹 가셨다.

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듣기로 하자.

정 안되면, 고다연이 나를 어떤 식으로 칭찬했는지 박은미에게 몰래 물어보면 되고.

­ 큼큼! 무엇보다… 최근 찬영 씨가 제 연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익숙해졌거든요. 이제 와서 이런 일상이 없어진다는 건 상상이 안 가고… ………싫고.

“간단히 말해서, 저희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완전 일상이 됐죠.”

­ 맞아요.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아직도 숨기는 건 좀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바꿔버렸어요. 대놓고 얼굴이 나오는 커플 사진을 올리긴 부끄러워서… 은근히 티 내는 사진을 올린 것이 제 최선의 용기였지만요.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니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못할 솔직함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아는 마음이었으나, 감흥이 없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받는 것처럼 몸 전체가 푸근해지는 걸 느꼈다.

“…어제 키스하길 잘했네요. 다연씨한테 이런 말도 듣고.”

­ 그,그거랑은 관련이 없는데요?! 없는데… 으… ……사실 있어요.

우리의 통화는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졌다.

서로 침대에 누웠음에도 끊지 않았고, 핸드폰을 충전하면서까지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갔다.

어느 한쪽이 졸음을 못 이겨 잠들기 전까지는 끊지 않겠다는 것처럼.

미래가 어느 정도 보였듯이, 잠에 빠진 쪽은 고다연이었다.

나는 그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듣지 못하겠지만 잘 자라는 말과 함께.

*

일상이 변했다.

큰 틀에서 보면 달라지지 않았으나,

사소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결코 작지 않은 변화지만.

댄스팀에 출석하고, 고다연과 가볍게 데이트를 즐긴 뒤, 그녀의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가끔.

집 근처에 사람이 없을 때면…

“……”

“…흣.”

이렇게 입을 맞추곤 했다.

떨어지는 내 입술을 아쉬운 눈빛이 붙잡을 때는 두 번, 세 번까지 맞추기도 했다.

“사람이 오네요. 오늘은 두 번이 끝인가 보네.”

“아……”

고다연이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한 명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고다연의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사소한 행동이 내 열기를 지핀다는 걸 그녀는 알까?

짧다면 짧은 키스를 할 때마다 혀를 섞고 싶은 것을 참아내야 하는 고역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네! 조심히 가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바래다줘서 고맙다, 매번 듣는 말이다.

항상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것이 빈말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나를 역으로 바래다주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생각난다.

동시에 괜찮은 아이디어도.

“다연씨. 저번에 저를 바래다주고 싶다 한 것, 진심이었나요?”

“아! 맞아요! 한 번쯤은 제가 찬영씨를 바래다주고 싶어요!”

“그럼… 바래다주는 걸 넘어서, 한번 구경 오실래요? ‘홈 데이트’라고 부르는 그거요.”

“아… 홈 데이트… 찬영씨의 집… …네?”

“네. 제 집."

“네에?! 네에엣?!”

고다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알만하다.

일부러 오해하도록 첨언을 붙이지 않은 보람이 있다.

“그,그게… 그러니까… 으으…!”

“하하핫.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요. 낮에 초대해서, 해가 지기 전에 바래다줄 거거든요.”

“…아.”

“제가 혼자 살기는 하지만… 그런 목적은 절대, 절대 아니에요. 그런 건… 서로 제대로 준비가 됐을 때 해야 한다 생각해서.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하면 후회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노래방에서도 찬영씨는…”

해명을 할 때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정말로 흑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키스, 이미 나는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은 전적이 있다.

그런 만큼 나의 장담에 어느 정도 안심하는 고다연이 보인다.

“앗! 부담스러우면 편안하게 거절하세요. 억지로 긴장 가득한 채 오시면 제가 더 죄송하니까. 그냥 색다른 데이트를 하잔 의미의 권유였는데, 다연씨가 괴로우면 본말전도잖아요?”

“아뇨! 괴롭다니, 그런 건 절대 아닌데…”

“살짝 후회 중이네요. 아무리 그런 의도가 없었다곤 해도… 조금 일렀나 싶고?”

“으으… 그렇게 말씀하시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다연씨 강의 스케줄도 있고, 당장 내일 오라는 것이 아니니까. 해봐야 다음 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배려에 고다연의 부담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내가 한 기나긴 말.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오빠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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