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지구 *
* * *
고다연의 하루는 시작부터 고단했다.
어찌어찌 알람을 듣곤 일어났으나 피곤하기 그지없는 아침이었다.
잠을 설쳤으니 당연할까.
그냥 30분 더 자고 약속 시각에 딱 맞춰 나갈까 하는 유혹을 겨우 이겨내고,
반쯤 좀비가 된 상태로 연습실에 나왔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
대여 기간을 원칙대로 따져 본다면 30분 이후부터 들어가야 옳지만…
관리인에게 실 사용이 아닌 청소 정도는 괜찮다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기껏 평소와 같이 30분 일찍 나왔지만…
오늘은 도저히 청소를 못 할 것 같았다.
쏟아지는 피로에 항복한 고다연은 뒤편의 휴식용 의자를 일렬로 붙였다.
물론, 눕기 전에 의자의 좌판을 깨끗이 닦는 건 아무리 피곤해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 오기 전에 조금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남자 친구가 오기 전까지만.
보통 그는 그녀가 도착한 뒤 10분 뒤쯤에 나타나곤 했으니까…
5분의 알람을 맞춰놓고 쪽잠을 자면 되리라.
덜컹, 끼익.
“…있나요?”
그러나 고다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가 연인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다는 것을.
‘차,찬영씨?! 어째서 지금…?’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심지어 들려온 목소리는 상황이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평소라면 반갑게 반겨주던 따스한 미성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결코.
그러고 보면 아직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생각해 놓지 않았는데…
이런 망설임이 몸을 막은 사이.
남자는 완전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문을 등진 채 움직임 없이 가만 서 있는 듯했다.
의자에 누워서 몰래 쪽잠을 자려던 그녀를 발견했다는 뜻이 되었다.
‘왜? 오늘은 왜 벌써 와요?! 왜?! 왜애…!!’
울상이 지어지는 걸 최대한 막아섰다.
이제는 일어날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으니, 고다연은 휘몰아치는 당황을 무시하며 표정을 편안히 풀었다.
당장의 쪽팔림을 피하고자 자는 척을 하길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대로 계속 자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남자뿐만이 아니라 크루원 전원에게 잠에 빠진 모습을 보이게 생겼지 않았는가?
하지만 남자가 보고 있는 중에선 일어난 척을 연기할 자신은 없었다.
장담하는데,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연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얼굴의 표정을 풀고 숨을 고르게 하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사실 이조차 불안해서 남자가 혹시 눈치채지 않았는지 불안할 지경이었다.
대안이 필요해진 고다연은 급하게 계획 하나를 세웠다.
그가 바닥 청소를 위해 탈의실 내부에 있는 청소 도구 보관함으로 향하면,
홀에 혼자 남은 사이 잠에서 깼다는 듯이 일어나면 된다.
그나마 수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곧바로 탈의실로 향해라앗! 이쪽으로 오지 말고! 찬영씨, 부탁이니까 한 번만 못 본 척해주세요…!!’
속으로 강한 염원을 담아 기도했다.
그러나 바램은 닿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는 무척이나 희미했지만, 확실하게 고다연을 향해 가까워져 왔기 때문이다.
혹시 지나쳐서 탈의실로 향하려나 하는 가능성 없는 기대도 해봤으나…
당연히 그런 변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도저히 부정하지 못했다.
고작 1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아… 난 망했다…’
고다연은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혹시 사진을 찍히면 되돌릴 수 없다.
은근히 장난기가 많은 그녀의 연인은 순순히 사진을 지워주지 않을 것이다.
한창 고민에 잠겨있던 그때.
고다연의 몸 위로 가볍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언젠가 맡아 봤던, 익숙하고도 포근한 향기가 났다.
남자의 가디건이었다.
“…감기 걸려요.”
따스한 말이 귀를 울렸다.
최선을 다해 낮춘 목소리였다.
주변이 무척 고요하거나, 그가 이처럼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결코 듣지 못했을 정도로.
고다연은 어째서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했는지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든 그녀가 깰까봐 배려한 것 같았다.
‘으으으으…! 이러면… 이런 찬영씨를 의심한 난…?’
죄책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장난을 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몸을 건들긴커녕 말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가슴 속부터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어진 고다연은 말아쥔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위험한 행동이지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보다야 나았다.
깨어 있을 때 이렇게 소중히 다뤄주면 어디 덧날까?
부끄러움을 덜어내 보고자 속으로 작게 투덜대었다.
하지만…
도리어 잠든 척 하는 사이에 이런 행동을 보였기에, 꾸밈 하나 없는 진심 같이 느껴졌다.
…스윽.
남자는 외투를 덮어준 것을 끝으로 조용히 떨어졌다.
정말로 장난 하나 없이 그녀를 쉬게 놔둔 채, 탈의실로 향하는 것이다.
점차 멀어지는 인기척.
고다연은 한쪽 눈만 실눈을 떠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도 아니겠다,
심지어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할 테니 안심하고 바라볼 수 있었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이대로 계속 바라보고 싶어졌다.
가디건에서 은은히 나는 향기는 그녀의 기묘한 감정을 부추겼다.
어찌 보면 변태 같은 말이지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나?
“…다연씨?”
그때.
남자가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았다.
깜짝 놀란 고다연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녀의 방향을 향해 인기척이 다가온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설마 시선을 느낀 걸까?
“진짜… 자는 거 맞죠?”
고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헤헤. 사실은 여태 자는 척하고 있었어요.’라 말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불가능한 요구였다.
잠깐의 정적.
아주 가까이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가디건에서 약하게 풍기던 향기가 갑작스레 강해졌으며…
이마에 무언가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어?’
소리 없이 닿은 무언가는 소리 없이 떨어졌다.
고다연이 당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이.
저 멀리 탈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떠나며 홀에 고다연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벌떡!
“바,방금…”
고다연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물론 만진다고 무언가가 묻어 나올 리는 없었다.
그녀의 연인이 틴트나 립스틱 같은 걸 쓸 리 없으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감촉이었다.
어젯밤 해가 뜰 때까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 않은가?
그리고 정황상 확실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잠들었는지 재차 확인했을 이유가 없었다.
덜컹.
“어라? 다연씨. 일어났어요?”
“…아…!”
멍하니 그의 가디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탈의실의 문이 열리며 박찬영이 걸어 나왔다.
그 얼굴을 마주한 뒤에야 고다연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태연한 척. 태연한 척.
있는 힘껏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열기에 이미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을 뿐이다.
‘괘,괜찮아. 침착하자. 자려고 연습실 불도 꺼놨고, 거리도 멀잖아? 분명 안 보일 거야…!’
희소식은 하나 더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남자가 그녀에게 곧바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나쁘지 않은 시력을 가진 그녀지만, 남자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남자 역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고다연은 그러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푸흡.”
“무,뭔데요! 왜 웃어요…!”
저 웃음 역시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을 확인해서가 아닌,
그냥 쪽잠을 자던 연인이 귀여웠기에 터진 것이리라.
그래야만 했다.
만약 정황을 전부 들킨 것이라면 버틸 자신이 없었으니까.
“아뇨. 연습실에 나온 지 꽤 됐지만, 다연씨가 그렇게 주무시는 건 처음 봐서. 많이 피곤했어요?”
“…저도 원래 안 이러는데,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서…”
“하하핫. 그렇군요! 물론 믿을게요.”
“씨이… 정말 이번이 처음인데…!”
“믿는다니까?”
“그런 목소리가 아니잖아요!”
고다연은 남자의 실루엣을 살폈다.
설마 방금 그녀의 이마에 했던 입맞춤은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갈 생각인 걸까?
‘……아아앗!! 알겠다! 찬영씨도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거구나?’
어째서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방금 몰래 한 스킨십의 여파로 그의 얼굴도 붉어져 있는 것이다.
마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그녀처럼.
그제야 고다연은 안심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으니, 얼굴을 가라앉힐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사실 박찬영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열심히 홍조를 숨기는 고다연을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로서는 자신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단 비밀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잠. 설쳤나 봐요?”
“……아,아닌데요.”
“하하하. 안 숨겨도 되는데. 저도 좀 설쳤거든요.”
“…찬영씨도?”
“잊었어요? 제 쪽도 첫 키스였잖아요.”
“아!”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직 얼굴이 식지 않은 그녀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이 화제가 시작된 이상 냉정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
아무리 그녀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 피곤해 보이나요?”
얼굴이 전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온 그가 물었다.
오늘 처음 보는 맨얼굴.
억지로 동공을 그의 눈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무의식이 시선을 남자의 입술로 옮기려 들었으니까.
“큼. 멀쩡해 보여요.”
“다행이네요. 커플이 둘 다 피곤해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기 딱 좋으니까.”
“저,저 엄청 피곤해 보인단 뜻인가요?”
“어… 대답해 줄까요?”
“……괜찮아요…”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당장 이 연습실만 해도 한쪽 벽면이 거울로 되어 있으니까.
“…흣?”
고다연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남자를 보고 숨을 굳혔다.
혹시 껴안으려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 듬직한 손은 가디건을 회수해 갔을 뿐이다.
고다연이 멍하니 멀어지는 손을 바라보고자, 남자가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안아줘요?”
“아,아,아니요!! 됐거든요!!”
내심 바라고 있던 것이 들통난 고다연은 남자의 손에서 청소 도구를 빼앗았다.
예상했던 대로, 저 얼굴을 마주하면 이성적이게 되지 못한다.
연습실의 청소는 도망치기에 괜찮은 핑곗거리였다.
“찬영씨도 빨리 청소해요! 곧 다들 오겠다! 입구 쪽, 맡길게요?”
“흐으음…”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푸흡. 좋아. 속 보이는데, 그냥 넘어가 줄게요. 오늘은 이미 만족했으니까.”
무엇에 만족했다는 건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고다연의 정신력은 많이 닳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