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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83) (283/310)

〈 283화 〉 지구 *

* * *

끼익, 끽.

연식이 오래된 오피스텔의 1층 유리문은 앞뒤로 흔들리며 거슬리는 소음을 내었다.

심지어는 그 흔하다는 공동현관 비밀번호조차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대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월세로 그쳤다.

그런 낡디 낡은 강화 유리 너머.

고다연은 자신을 향해서 손을 흔드는 남자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남자에 비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움직임을 확실히 인지한 듯했다.

기분 좋다는 듯,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으니까.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자는 뒤로 돌아섰다.

길었던 데이트도 끝났고, 방금 여자 친구도 자택의 공동 현관 안쪽까지 바래다주었지 않은가?

이젠 그도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현관 유리문 안쪽에서 남자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다연은,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 밖으로 사라졌음에도 계단을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흔들던 손은 아래로 내렸다.

“……”

잠깐의 시간 뒤.

결국 1층 현관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천장에 달린 움직임 감지 센서는 석상처럼 굳은 사람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고요한 어둠 속에서 숨을 골랐다.

천천히. 천천히.

픽, 1층 현관을 집어삼킨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명 센서가 그녀의 오른팔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빛이 환하게 밝혀준 고다연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과장을 조금 섞으면, 그녀가 한창 손으로 매만지고 있는 입술의 색만큼이나.

“하아아으……!!”

기묘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겨우겨우 억누른다면 이런 신음이 나오지 않을까?

“헙?!”

고다연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꽉 틀어막았다.

나름 열심히 억눌렀음에도, 감정을 못 이겨 터져 나온 소리는 전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1층에 사는 그녀의 이웃은 들었으리라.

보통은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겠지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현관문을 열 수도 있다.

그리고 고다연은 자신의 이웃이 호기심쟁이인지 아닌지 이대로 기다리며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 탁탁탁!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갔다.

홍조는 단 한치도 가라앉지 않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가족들이 자취방에 있을 리 없으니까.

현관문을 열고 몸을 던지듯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어두운 자취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이미 가셨으려나?”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 저 멀리 골목길까지 살펴봤다.

방의 불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래야 혹시 남자를 발견하더라도,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후로 5분이 훌쩍 지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쉬움이 가슴을 괴롭혔고, 안도감이 긴장을 탁 풀게 했다.

고다연은 벽에 등을 기대고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앉았다.

“나… 우와… 나…”

그녀의 방, 익숙하던 장소에 앉아있으니 마음이 한층 편안해짐을 느꼈다.

저절로 방금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잊혀지기엔 너무나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키스. 또는 입맞춤.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연인의 대표 격인 스킨십 진도까지 닿고야 말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항상 키스 정도야 애들 장난이라 말하고 다녔다.

살면서 키스를 해본 적 없는 고다연이기에 그렇구나 하고 넘겨왔지만, 이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결코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그만큼 가슴이 두근거렸고, 선명했으며,

눈 굴리듯 천천히 크기를 불리던 애정이 고작 1~2초 사이에 유례 없을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다,다들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믿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마주치면 자신이 보고 있음에도 인사하듯 가볍게 입맞춤을 나누던 그녀의 친구도,

밤의 공원을 산책할 때면 종종 보이던 벤치 위 커플의 애정행각도…

방금 겪었던 키스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유별날 정도로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이 아닌, 그냥 평범한 수준으로 설레하는 것이라면…

다들 어찌 그리 태연 할 수 있을까?

‘물론… 나도 찬영씨랑 손잡는 게 점차 익숙해지는 건 경험해봤지만…’

손잡기와 입맞춤은 그 크기부터가 달랐다.

마음을 채우는 감정의 농도가 대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 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키스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바닥에 쏟은 물 한 컵이 마르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압도적으로 물결치는 한강이 메마르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듯이.

100번을 해도 1,000번을 해도 과연 무덤덤해질 날이 올까?

아니, 절대 없다.

고다연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첫키스의 여파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으으… 오늘 잠 다 잤네…!”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탓에 피곤에 절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온몸에서 정신을 일깨우는 호르몬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페인을 섭취한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약성 각성제라도 삼킨 것 마냥 활기가 넘쳐흘렀다.

“내일… 찬영씨 얼굴 어떻게 보지?…”

다음날은 일요일.

팀에 소속된 크루원들이 빠짐없이 모여야 하는 날이다.

도망칠 수 없었다.

아프단 핑계를 대면 빠질 수야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그를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콩닥거리는 가슴은 방금 헤어졌음에도 또 보고 싶다 말하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은 건, 그냥 직감했을 뿐이다.

이 부풀어 오른 애정이 가라앉지 않은 채 그를 다시 보게 된다면…

여태까지와 달리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남자에게 빠지리란 것을.

위험했다.

애정이 가득 차올라서, 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혹시나 그가 헤어지자고 한다면, 지금의 고다연은 울면서 붙잡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떠나지 말아 달라며, 한 번의 기회를 달라고 자존심도 버린 채 부탁할 것이다.

마음이 떠난 상대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건 더없이 추하고 멍청한 짓이라 생각해 왔던 그녀가.

“…은미가 첫 연애에는 너무 깊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마음을 퍼줬다 헤어지면 맨정신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친구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여러 조언 중에서도 엄중히 경고했던 축에 속한 말이다.

박은미가 하는 말은 어지간해선 새겨듣던 고다연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아무래도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 상태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던 그녀다.

허나 직전만 해도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기대를 품고 창밖에 남자가 있는지를 살폈지 않은가?

마음을 더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

내심 무얼 선택하고 싶은지 드러나 버린 것이다.

이별하게 된다면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하게 되겠으나…

반대로 이별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할 시간이 배로 행복하게 되리라.

박은미가 경고한 미래가 두려웠다.

하지만 너무나 커다란 유혹이기에, 알면서도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그리고 꾀병은 나쁜 거니까. 성실함에 예외를 둬선 안 된다고도 하고!”

일단 내일 연습실에 나가고 생각해보자.

그리 결정한 고다연은 빠르게 세안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억지로 이불을 덮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쓸데없이 선명한 정신은 방금 느꼈던 입술의 촉각을 연거푸 재생하고 있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머리가 그녀의 의지를 무시한 채 묵묵히 감촉을 되새겼을 뿐이었다.

결국 고다연이 잠이 든 것은 날이 밝아오기 직전이었다.

오늘 몸의 피로를 무시한 후유증은 일어난 뒤에 감당해야 하리라.

*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연습실로 향했다.

어제 입맞춤을 한 뒤 그녀가 보여준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 몽롱해 하면서도 기쁨에 찬 얼굴은 정말이지…

남자를 홀릴 줄 아는 요망한 여우 같았다.

오늘 마주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혹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오늘은 빠지려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내 여자친구는 스킨십에 극도로 취약하니까.

‘뭐, 정말 그렇다면 문자로 병문안 간다고 연락하면 되지.’

도망치는 건 용서 못 한다.

나는 오늘 부끄러움에 찬 그녀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

만약 도망치지 않고 연습에 나왔다면 더 재밌는 상황이 펼쳐진다.

나는 댄스팀의 막내로써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 준비를 하는 편이고,

성실함의 대표인 고다연도 언제나 30분 일찍 나왔으니까.

지금까지 그 시간을 바닥을 청소하며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것에 사용했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더 연인답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끼익.

“어라? 문이 열려있네. 다연씨, 있나요?”

연습실의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정황상 고다연일 가능성이 유력하겠지.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완전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온 나를 마중한 건 텅 빈 연습실도,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는 고다연도 아니었다.

연습실 뒤편.

쭉 이어 붙인 의자 위에 누워 쪽잠을 자는 고다연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내가 들어온 걸 눈치챘으면서도 열심히 자는 척을 하는 고다연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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