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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82) (282/310)

〈 282화 〉 지구 *

* * *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단톡 팠으니까 가끔 연락하기에요? 그리고 다연이는… 으음… 쿡쿡.”

박은미가 아까부터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고다연을 보곤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확실히 가만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긴 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세운 계획안에는 친구에게 연애 행각이 들키는 일 따윈 없었나 보다.

하물며 첫 키스 직전인 분위기였으니 오죽할까.

도망치지 않는 것만으로 열심히 수치를 참고 있는 것이다.

박은미는 그때 이후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고다연에게 해를 끼칠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이 선 듯했다.

그만큼 우리가 잘 어울려 보였나 보다.

박은미의 염려는 이해가 가지만, 단언컨대 기우다.

난 지구에 한정해선 바람 같은 걸 피우지는 않을 예정이니까.

그 이전에 내 인간관계는 극도로 좁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전부 고다연과 연결이 되어 있는 댄스 크루의 사람들이지 않은가?

나 또한 인맥 관리에 시간을 잡아먹히지 않는 현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으니,

당분간 이러한 스탠스는 변하지 않으리라.

“다연씨는 제가 바래다줄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걱정은 무슨. 쟤 좋아서 저러는 거예요. 내가 다 봤어. 아주 헤벌쭉하던데?”

“은미 너 빨리 안 가?! 체크인 늦겠다!”

“바보야. 선불 호텔인데 체크인이 왜 있어?”

“아무튼!”

참지 못한 고다연이 박은미의 등을 떠밀며 지하철역으로 보내려 들었다.

박은미는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내 여자 친구를 조금 더 놀리고 싶지만…

이 정도면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였나보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형님!”

“…그래요. 저도 재밌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형님 말고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불러도 되고요.”

“하핫, 알겠습니다!”

둘은 그렇게 역 안쪽으로 사라졌다.

박은미가 실은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졌다는 걸 아는 만큼,

서울의 복잡한 지리라고 길을 잃을 수도 있단 걱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진 밤,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

멀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걸으면 그녀의 자취방이 나오니까.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 전에 있었던 첫 키스의 실패 때문인 걸까?

버스 안에서도, 버스에서 내리고 걷기 시작했을 때도.

약간의 침묵과 어색함이 존재했다.

­ 저벅. 저벅.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채 걸었을 것이다.

진도가 그 정도 까진 발전 했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은 그조차 없었다.

마치…

인생 첫 여자친구와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 날에 생기는 특유의 풋풋함과 어색함의 마이너 버전 같았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진도가 퇴보한 듯 보이지만, 서로가 싫어진 건 결코 아니란 뜻이다.

오히려 상대를 향한 의식이 강해졌다면 강해졌겠지.

“……”

“……”

그럼 이 어색함을 깨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간단하다.

침묵을 모르는 척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조금의 용기만 내면 된다.

­ 스윽.

한걸음 가까이 곁으로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먼저 다가서기 어렵던 분위기를 부수는 주체성이 가득 찬 행동이었다.

맞잡은 손이 크게 떨었다.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성큼 다가올 줄 몰랐나 보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를 향해 푹 숙여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다연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싫어진 것이 아니다.

아까의 입맞춤 직전이던 분위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에 전처럼 편하게 대하지를 못하고 있을 뿐.

연인을 한층 더 깊게 의식하게 된 것, 어찌 보면 관계의 발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연애’란 스킨십 같은 신체 접촉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다연씨. 손, 잡아도 되죠?”

“이미 잡으셨…잖아요.”

“하하하. 그건 그렇네요. 그럼 계속 잡고 있을게요.”

요즘 들어 매일같이 하고 다닌 손 잡기.

지금도 전날과 다를 바 없이 손을 잡고 보폭을 공유할 뿐이지만…

익숙함에 점차 잦아들었어야 할 설렘이, 오늘따라 처음 손을 맞잡았던 그 날처럼 가슴을 떨게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것을 그녀 또한 느끼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내 말에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시선을 발끝으로 돌리고,

손가락이 미약하게 꼼지락거리며 내 손바닥을 간질이기 시작한 것이겠지.

­ 저벅. 저벅.

손을 맞잡으며 어색함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대신한 건 색다른 종류의 설렘이었다.

좋은 느낌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방금의 대화를 끝으로, 우리 사이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때로는 고요함도 필요한 법이다.

지금처럼 침묵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해줄 때는 더욱.

‘…곧 도착이네.’

눈앞에 차 한 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좁은 골목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오피스텔의 등장과 함께 오늘의 데이트가 끝난다.

아쉬웠다.

분명 이럴 걸 대비해서 포옹이라는 대가를 받아냈지만,

심지어 오늘도 그녀와 짧지 않은 스킨십까지 나누었지만,

도무지 내 마음은 만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더.

나는 그러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극심한 갈증 속, 단 한 모금만을 허락받은 이가 한층 더 물을 갈구하게 되는 것처럼.

효과음을 넣는다면 ‘힐끗’일까?

나는 눈동자만을 옮겨 고다연의 상태를 살폈다.

사실…

이렇게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그녀의 의향쯤은 이미 알고 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 드러난 행동, 어떤 속마음을 내비치는지는 뻔했다.

그녀 또한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으리라.

이건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다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누군가 나더러 정당화가 짝이 없다 하면 반박은 못 하겠으나, 그렇다고 결정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올바른 길로 가는 대신, 옆쪽에 난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어? 찬영…씨?”

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인 걸까?

고다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상체를 숙여 얼굴만 조금 빼 나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잠깐 발걸음을 멈춰버렸을 정도로 귀여웠다.

아무래도 내가 길을 잊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건가 보다.

나는 피식 웃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표현을 말 대신에 한 것이다.

“다연씨. 혹시 피곤하시나요?”

“아뇨…! 아직 쌩쌩해요!”

“풋. 건강해 보여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저희, 조금만 더 걸을까요?”

커다란 눈이 두어 번 깜빡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나보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조용히 기다렸고, 덕분에 꽤 보람 있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큼! 잠시만요!”

고다연은 신속히 고개를 끄덕이려는 자신의 턱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는 등 열심히 바쁜 척을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났다는 듯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내가 그녀의 통금시간을 알고 있다는 걸 잊었나 보다.

자취를 하면서도 통금이 있다는 것이 무척 특이했기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가 진 건 고작해야 한 시간 전.

당연히 통금까지는 시간이 넉넉할 정도로 남았다.

즉, 저 행동은…

밀당을 위한 허세라고 볼 수 있었다.

“하하핫!”

“…왜 웃으세요.”

“크흡. 미안해요. 다연씨가 너무 알기 쉬우셔서. 방금 그거 밀당이죠?”

“네,네에?”

고다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한층 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하면 웃음을 참으려 했는데, 솔직히 참기 힘들었다.

평소에는 표정 관리와 이미지 관리를 숨 쉬듯 해내던 그녀 아닌가?

물론 연애 관련된 부분은 경험도, 연습도 해본 적 없을 테니 완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백하민’으로써 몇 번의 고백을 거절했던 고다연과, 지금 내 앞에서 수치에 얼굴을 붉힌 그녀.

둘의 이미지 차이가 적당히 나야지…

나로선 그녀가 이리 미숙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너무나 새로웠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익! 그만 웃어요!”

“그럼 이것만 대답해 주세요. 그거, 은미씨가 알려줬나요? 이런 제안 받으면 바로 수락하지 말고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것.”

“……”

울상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이 곧 대답이었다.

가까스로 멈추는 것에 성공한 웃음이 다시 한번 터졌다.

이걸 어떻게 참아?

고다연이 입을 막고 웃는 나를 삐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속내가 적나라하게 들키고, 또 그걸 보고 웃는 내가 미웠나 보다.

어쩐지 그녀를 마구 끌어안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 와락!

이번에도 나는 참지 않기로 했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끌어당겨,

아랫입술이 삐져나와 한창 화났음을 어필 중인 여자친구를 품 안에 가뒀다.

이번에는 좀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읏? 가,갑자기 왜…”

“으음… 화해하고 싶어서? 놀려서 미안해요.”

“…그냥 안고 싶었다고 말하시죠?”

“맞아요. 그냥 안고 싶었어요.”

내 솔직한 고백에 고다연이 몸을 한번 움찔거렸다.

꽉 껴안고 있어 그 떨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진짜 말은 잘해.”

고다연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들으면 투덜대는 듯했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면 이미 화가 풀려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포옹에 솔직한 애정표현 한 번이면 화가 전부 사라진다니…

이 정도면 너무 쉬워서 오히려 걱정인 수준이다.

­ 툭.

“…바보.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어디 덧났어요?”

“그러기엔 발상이 너무 귀여워서.”

“으으읏…! …앞으로는 이런 거 시도도 안 할 거예요! 은미 걔는 왜 이상한 조언을 해서…”

고다연은 껴안은 상태로 내 등을 툭 치며 변명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 조용히 뒷머리를 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길을 즐기기 시작했는지 점차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비밀이지만…

솔직하지 못하는 고양이 한 마리를 길들이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등을 토닥여 주고 싶은데… 옷이 얇아서 브라끈이 손에 걸릴 것 같네.’

그런 참사가 벌어지면 고다연은 내 품에서 도망치려고 들 테고, 떨어진 이후에도 무척이나 어색해지리라.

이 좋은 분위기를 실수 하나로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

조금 더 걷기로 했으면서 이대로 껴안고 있기를 몇 분.

우리 중 그 누구도 떨어지자고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근거림 속. 차분하게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이 상황이 좋았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느끼고 싶어 눈을 감았고,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고다연 또한 말없이 내게 편히 기대는 걸 보면 마찬가지로 눈을 감은 게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찬영씨는 가끔 보면 엄청 여유로운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제가 말하기 뭐하지만… 아까 노래방에서… 그… 분위기 타서 할 수 있었잖아요?”

뒷말은 흐려졌지만 무슨 말이 하고픈지 단번에 눈치챘다.

자신은 분위기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렸는데, 어떻게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냐는 질문이다.

비록 그 상황에서 첫 키스를 했다면 후회할 게 뻔했다곤 하더라도…

어찌 보면 나는 첫 키스를 뒤로 미룬 것이 된다.

내가 그녀에게 푹 빠져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고다연으로선,

혹시 애정이 조금 식었는지 불안해할 법도 했다.

“미안해요. 사실, 긴장했거든요. 저 키스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르고.”

그렇기에 나는 연애 초보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번이 내 인생 첫 연애로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설마… 여유로운 척 연기한 거였어요?”

“정확해요. 키스할 용기보다, 어떻게 실수하지 않고 키스할지에 대한 걱정이 한발 앞서서…”

고다연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어깨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내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란 걸 알며, 미약하게 선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남자답지 못한데… 혹시 실망한 건 아니죠?”

“풋.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찬영씨다워서 안심했어요. 킥킥.”

“다행이네요. 그래서… 지금은 걱정보다 용기를 내보려고요.”

“…네…?”

나는 고다연을 품에서 아주 조금 떨어뜨렸다.

약간의 거리가 생기며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용기를 낼 것이다,

이 말을 이해 못 한 고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았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 주었다.

“저도 남자다운 면은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이대로 또 도망가면… 변명 못 할 겁쟁이니까. 그리고 마침, 분위기잖아요?”

“흐,흐앗…?!”

“설마 아직도 이해 못 한 건 아니죠?”

“앗. 아뇨…! 응… 네에…”

고다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곧 있을 미래를 직감했는지 얼굴이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말로 하는 어떠한 대답보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이해 했다는 신호가 되어주었다.

달빛이 들지 않는 좁은 골목.

LED 가로등의 하얀 빛만이 비추는 주택가 골목은 이상하게도 운치가 있었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소음도 없었고, 이렇게 애틋이 껴안고 있으니 마음끼리 공명하는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확실한 건…

주변에 지인이 지켜보고 있거나, 조창호가 거대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장소보다는 훨씬 키스하기 알맞은 장소라는 것이다.

­ 스윽.

푹 숙인 고다연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부드럽게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저항 없이 내 손을 따라 올라왔다.

뻣뻣하게 굳은 입술.

빨갛게 익은 얼굴.

꼭 감은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것까지.

왜 사소한 것 전부가 마음이 가득 찰 정도로 마음에 들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와 그녀의 입술이 점차 가까워진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가 선명히 보이는 거리.

상대의 콧숨이 느껴지는 거리.

피부의 떨림이 공기를 타고 느껴지는 거리.

그리고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

“…사랑해요.”

“흣…!”

작은 사랑 고백과 함께,

나는 오늘 그녀의 첫키스를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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