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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81) (281/310)

〈 281화 〉 지구 *

* * *

식사는 근처 적당한 양식집을 찾기로 했다.

식당을 선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원래 이런 유명한 데이트 코스에는 맛집에 대한 정보가 빠삭하게 알려져 있으니까.

식사를 하면서도, 나를 제외한 이들은 한가지 화제에 들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보여준 마술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 본 연극에 대해서는 이미 입이 아파질 정도로 떠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특수 제작한 동전…이 아닐까요?”

“끄응… 그것밖에 답이 없긴 한데… 혹시 정말로 힘으로 구부린 걸 수도?”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역시 그렇겠지?”

“누나도 봤죠? 눈앞에서 동전이 구부러지는 것. …아,아닌가? 내 착시 현상인가?…”

이젠 혼란이 찾아온 듯했다.

세 명이나 내 마술 아닌 마술을 봤음에도, 자신들의 기억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이 떠들든 말든 나는 묵묵히 내 몫의 파스타를 해치웠다.

간이 강하지 않아서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괜찮네. 공짜라서 더 맛있는 건가?’

박은미의 눈이 미약하게 샐쭉해졌다.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모른 체 하는 내가 얄미웠나 보다.

그녀가 고다연에게 눈짓을 하고는 속닥거리며 귓속말을 시작했다.

물론.

내 귀에는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지 전부 들렸다.

“다연이 너는 방금 마술의 비밀, 알아?”

“아니… 나도 깜짝 놀랐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지?!”

“다,당연히 궁금하지? 그게 왜?”

고다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친구를 돌아보았다.

무언가의 불안함을 감지했나 보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음흉한 표정을 지은 박은미가, 내 여자친구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

“후후후… 네 연애 코치로써 첫 번째 명령이야. 오늘 안에 한번 비밀을 알아내 봐. 그리고 나한테도 알려주고!”

“뭐? 어떻게?”

“바보야. 당연히 애교를 부려서지. 친구도 아니고 연인이잖아?”

“애,애,애교?!”

요구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임무라고 봐야 옳으리라.

나한테 애교를 부려서 비밀을 알아내라니…

음…

생각 외로 박은미라는 여자는 내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군인 것 같지도 않지만.

마술의 비밀?

핑계를 만들어 내는 것 정도는 쉽다.

대충 그들의 예상대로 손기술을 이용해 동전을 바꿔치기했다 하고,

특수 제작된 동전은 일회용이라서 아까 화장실 다녀오며 몰래 버렸다고 하면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것이 그들이 유일하게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큼. 큼. 절대 내가 비밀을 알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너의 연애 자주권 성장이라는 뜻깊은 목적이 있는 거니까.”

“…거짓말 티 나거든? 그냥 비밀도 알고 싶고, 내가 부끄러움을 참는 걸 구경하고 싶은 거면서…!”

“역시,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박은미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다.

보통은 저 이유가 끝이라 생각하고, 고다연도 그리 생각한 모양이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다연이의 애교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 생각인가? 정말로 내 속마음을 확인해 보려고?’

박은미는 남자에 대해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다.

첫인상은 의심의 계기를 주었고,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모든 언행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은연중 털털함이 느껴지는 행동은 일관되었으나, 선은 교묘하게 넘기지 않았다.

과도하게 허물이 없으면 도리어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던가?

이건 극단적인 예시지만, 대놓고 방귀나 트림을 하는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자는 적으니.

너무 친근해서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는 선.

박은미는 결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백 가지 행동을 했다면, 백 가지 전부.

우연이 이 정도로 겹치면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저런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모습들은…

차갑게 계산하여 꾸며낸 성격이란 뜻이다.

당연히 연애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피곤한 성격이네. 내가 정말 잘 알 수밖에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마치…

과거, 바뀌기 전 나의 여자 버전 같았다.

그래도 과거의 나와 딱 하나 다른 점은 있었다.

박은미에겐 마음을 어느 정도 연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친구를 아끼는 만큼 자기도 모르게 다양한 부분에서 간섭하게 될 것이다.

특히 박은미는 연애와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그녀가 고다연에게 영향을 주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소한 친구의 연인이 쓰레기인지, 아니면 절친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올바른 성격을 지녔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싶겠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정황상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어! 파이팅!”

“나는 못 해! 애교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한다 하더라도 안될 거야…”

“후훗. 다연아. 생각해 봐. 사귄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가 애교를 부리는데, 알려주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어? 특히 네 남친은 너한테 푹 빠진 상태라며?”

…아무래도 고다연은 나를 ‘자신에게 푹 빠진 남자’로 소개했나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의 앞에서 그리 보이도록 행동했으니까.

“그,그건… 그럴지… 몰라…도…”

“어휴. 이 답답아. 언제까지 그리 수동적일 거야. 너네 키스는 했니?”

“…아직.”

“참고로 나는 창호랑 뽀뽀했다? 사귄지는 이제 막 일주일 지났고.”

고다연이 깜짝 놀라서 조창호와 박은미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녀의 기준에서는 이렇게 빨리 진도를 나가는 것이 놀라울 만 했다.

내 여자친구는 이상하리만큼 연애적인 부분에서 순수했기에.

“벌써? 어,어떻게?”

“뭘 어떻게야. 입술을 비비면 끝이지 뭐. 아. 당연히 키스는 아직이고, 애들 뽀뽀까지만.”

박은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뽀뽀와 키스,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하는지 암시하는 행동이었다.

고다연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데이지랑 처음 만나기 전부터 우린 사귀고 있었지?

내가 다른 평범한 사람보다 몇 배의 시간을 더 쓰고 있다곤 하더라도…

사귀기로 한 이후 시간이 꽤 흐르긴 했다.

그런 만큼, 사귄 지 일주일 된 커플에게 진도가 뒤처진 건 충격이었나보다.

“다연아. 퓨어한 것도 좋지만, 너무 거부하면 남자 쪽에서 지친다?”

“그건 나도 아는데… 역시 너무 진도가 느린 걸까? 우리.”

“그래도 불안해하지는 마. 내 경험상, 너희 같은 커플일수록 한번 선을 넘으면 제대로 불붙더라.”

박은미는 고다연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극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드리운 의심이 큰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스킨십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고, 고다연에게 맞춰서 천천히 나가려 했기 때문인 걸까?

사실…

그 실상은 최근 연금술 공부를 시작해서 이래저래 바빴기에 신경을 못 쓴 것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진심으로 여자친구를 아껴주고 소중히 대해주는 남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진도에 목이 마른 건 남자 쪽이니.

“…알았어. 한번 열심히 해볼게…!”

“그거 알아? 너네 진짜 순수해서 보는 맛 있는 거. 킥킥.”

“으윽…”

그럼 다가올 애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박은미의 마지막 시험일 것 같았다.

무사히 통과한다면, 의심의 시선을 완전히 벗을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시험을 통과하고 말고는 별 관심 없었다.

이미 반쯤은 통과한 모양이고, 박은미는 모레면 서울 밖으로 갈 사람이지 않은가.

지금 중요한 건 고다연이 내게 부릴 응석이다.

아무래도 직접 생각해서 할 모양인데, 이 연애 초짜가 어떤 애교를 들고 올지 너무 기대되었다.

*

“일단 저희가 준비한 스케줄은 여기까지긴 한데… 이대로 헤어지는 건 좀 아쉽죠?”

“그건 그렇네요! 해도 아직 안 졌으니까?”

이제 막 노을이 생길까 말까 하는 이른 시간이지만…

서울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서 장소를 옮기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게다가 이 두 명은 오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으니 무척 피곤하지 않겠는가?

내일 중요한 볼일도 있다고 한 만큼,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무언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다음 행선지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허나 위 조건을 전부 충족한 괜찮은 선택지기도 했다.

“어때요? 다연이 남친분은 노래 좀 치시나?”

“그냥… 못 부르는 사람 중에서는 잘 부르고, 잘 부르는 사람 중에서는 못 부르는 정도입니다.”

“와! 자신 있나 보네요?”

“엇… 그게 그렇게 들렸나요? 전혀 아닌데.”

약간 아쉬울 때, 한두 시간 때우고 가기에 노래방은 적절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다.

나도 한때 노래방을 많이 찾아서인지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는 불렀고,

그에 못지않게 박은미도 잘 불렀다.

조창호는 뭐…

…많이 못 부르지는 않았다.

정말 의외인 건, 고다연이 노래를 엄청 잘 불렀다는 것이다.

마이크를 넘겨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르려 하던 것부터가 심상치 않기는 했다.

춤뿐만이 아니라 노래에도 흥미가 많나 보다.

평소에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실이,

오늘 인식이 좀 바뀌었다.

“…다연씨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았다면, 노래방 종종 갈 걸 그랬네요.”

“헤,헤헤… 고마워요?”

“노래 좋아하세요? 같이 가자고 권유하시지.”

“앗… 그… 조금 부끄러워서.”

고다연이 쑥스러워하며 내 옆에 살포시 앉았다.

수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날고 기는 노래를 들어본 내가 이리 생각했다면…

다른 사람 기준에서도 나쁘지 않게 들릴 것이다.

차례는 다시 조창호.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이 노래방을 가득 채웠다.

박은미 또한 남자친구의 노래에 열심히 호응해주는 중이라 시선이 정면을 향해 있었다.

지금 고다연이 일부러 자리를 바꿔가면서까지 내 옆에 앉아서 쭈뼛거리고 있는 건…

아까 마술의 비밀을 캐내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에 가장 알맞은 순간이란 걸 직감 했기 때문이다.

­ 스윽.

고다연이 내 팔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잡아 안았다.

팔짱이라기보다는 내 팔뚝을 끌어안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얇은 천 너머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좋은 향기 또한.

“…다,다연씨?”

나는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고다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 눈을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귓등을 빨갛게 물들이고, 한창 노래의 가사가 나오는 노래방 기기의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모르는 척을 하듯이.

좋긴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보다 약한데, 라고 생각했을 때쯤.

고다연이 나의 쇄골 쪽에 머리를 대었다.

그리고 몸의 무게중심을 내 쪽으로 옮겨 완전히 기대기 시작했다.

“……안 무겁…죠?”

“하나도 안 무거워요. 그건 그런데… 갑자기? 평소에는 스킨십에서 도망치시더니.”

“그,그런 적 없는데…!”

“포옹도 잘 안 해주시면서?”

내 팩트에 고다연의 몸이 움찔거렸다.

물론 난 어째서 그녀가 스킨십에 미약한 거부감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다.

오래전, 백하민 새끼가 첫 데이트 때 술을 먹이고 모텔로 데려가려 하지 않았는가?

이젠 확실히 잊어가는 모양이지만…

그 영향이 무의식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어요? 포옹.”

노래방답게 주변은 시끄러웠으나, 과하게 밀착 한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고다연이 움직였다.

엉거주춤 반쯤 다리를 일으키더니,

나의 무릎 위에 앉았다.

‘대담한데?’

…다리에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봤을 때,

아무래도 혹시 내가 무게감을 느낄까 봐 열심히 스쿼트 자세를 유지하고 있나 보다.

귀엽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따,딱 은미의 남자 친구분 노래가 끝날 때까지만이니…… 햣?!”

그런 그녀를 뒤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내 당김에 다리에 주던 힘이 풀리고, 완전히 내 위에 앉게 되었다.

고다연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푸근히 웃어주며 전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어필했다.

“……”

“……”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은 어쩐지 동떨어져 정적이 가득한 것만 같았다.

이제야 제대로 그녀를 안아 보는 것 같다.

비록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겠으나…

지금까지 짧았던 포옹과 달리 상대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길었다.

백허그를 한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기분이 묘해진다.

고다연 또한 나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코앞.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며,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히 생각해서는 절대 좋지 못한 분위기다.

주변에 친구도 있으며, 조창호의 노래는 명백히 소음의 종류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로맨틱했다.

직감했다.

지금 그녀에게 점차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받아들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조금 장난스럽게.

“모처럼 분위기지만… 은미 씨가 보고 있네요. 이 이상은 둘이 있을 때만 할까요?”

“네? 은미… 네에?! 앗!”

꿈에서 깨어난 고다연이 박은미의 자리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박은미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우리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분명 가려진 입가는 함박웃음이 띄워져 있을 것이 뻔했다.

­ 벌떡!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고다연이 내 다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내게 1m 이상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책상에 묻은 채 엎드렸다.

마침 노래를 끝마친 조창호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다연의 안부를 걱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보기에, 책상에 엎드린 것이 마치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을 테니까.

“저… 누나 친구분은 괜찮은 건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나와 박은미가 변명을 해줬지만,

엎드린 고다연의 어깨는 더욱더 움츠러들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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