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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79) (279/310)

〈 279화 〉 지구 *

* * *

평일의 댄스 연습이 전부 끝난 뒤.

나를 잠깐 연습실의 구석으로 불러낸 고다연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로선 그럴 의도 하나 없었겠지만…

저 기죽은듯한 눈빛이 하나의 애교처럼 느껴지는 건, 분명 그녀가 내 연인이기 때문이리라.

애초부터 거절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음…

설령 힘든 부탁이었다 했더라도, 저런 눈을 하며 부탁을 해온다면…

‘남자인 이상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

그런 내가 고다연에게 돌려줄 대답은 정해져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데요? 2:2 데이트, 해보죠.”

“정말요?”

“예. 다연씨의 친한 친구라면 저도 궁금하네요.”

예전부터 암암리에 눈치를 챘지만, 그녀에게는 연애 코치가 있는 듯했다.

코치까지는 아니어도 연애적인 쪽에서 조언해주는 사람은 있었다.

가끔이긴 하더라도, 생초보인 그녀답지 않는 속 깊은 언행을 보일 때가 있었으니.

이번에 만나게 되는 고다연의 친구가 그 연애 조언자라곤 확신하지 못한다.

허나 감이 내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관련이 있다고.

그만큼 내 수락이 기뻤던 걸까?

고다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 약속일은 언제인가요??”

“이번주 주말이요. 앗, 그러고 보니 저녁은 제 친구가 산다고 했는데! 찬영씨 뭐 먹고 싶어요?”

며칠 뒤라…

생각보다 코 앞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첫인상을 어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고다연과의 잡담을 이어갔다.

“그건 잠깐 둘째 치고… 저희, 설마 주말까지 안 만나는 건가요?”

“네에? 주말이 오기 전에 약속 잡고 싶으신가요?”

“으으음… 2:2 데이트도 좋지만, 연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둘이 있을 때가 편하잖아요?”

기회가 왔기에 해보기는 하나…

보통의 2:2 데이트는 권태감에 젖은 연인들이 색다름을 느껴보기 위해 하곤 한다.

허나 우리는 새로움을 찾기엔 너무 연애 초창기지 않은가?

아직 나가야 할 진도가 많은 만큼, 그날이 뒤로 밀리는 건 원치 않았다.

‘우리가 지인 앞에서 스킨십을 할 정도로 뻔뻔하진 못 하잖아?’

그러한 의미를 담아 살짝 웃으며 쳐다보았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고다연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도 작은 스킨십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고다연은 망설이고 있었다.

평일, 주말 가라지 않고 언제나 바쁜 그녀다.

코앞의 약속을 연달아 잡기엔 뒷감당을 할 각오를 세워야 하나 보다.

평소라면 더이상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섰을 테지만…

물러서더라도 한가지 꾀를 내기로 했다.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매번 소득 없이 물러서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일단 약간의 억지를 부리는 척을 하기로 했다.

심한 억지는 아니다.

똑 부러지는 그녀 성격상, 정말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면 대답이 바로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을 한다는 것부터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뜻이다.

“이번 주를 2:2 데이트로 끝내면… 다연씨 할당량이 부족하단 말이에요.”

“저,저 할당량??”

“실제로 제 안에 있습니다. 둘만 있을 때 조금씩 오르고, 이렇게 손을 잡으면 오르는 게이지가.”

그녀를 향해 한걸음 살며시 다가서서 남몰래 손을 잡았다.

손에 들어온 작은 손등이 한번 작게 떨었다.

설마 주변에 단원이 있음에도 스킨십을 할 줄은 몰랐는지 흠칫 놀란 것이다.

허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얼굴을 살짝 붉히고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게 부끄러운 눈치긴 하지만…

다들 막 끝난 연습에 지쳐 휴식에 정신 팔린 것이 용기를 주었나 보다.

솔직히 들키더라도 상관없는 수준이다.

성인 커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잡는 정도로 끝난다면 장난 아니게 풋풋한 거지.

그렇지 않은가?

“아! 그러고 보니 5초 이상 껴안고 있으면, 데이트를 안 해도 될 정도로 점수가 쭈우욱 올라가는데… 정 바쁘시다면 이쪽은 어떤가요?”

데이트가 안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스킨십이라도.

이것이 내 원래의 목적이다.

시간이 없는 고다연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난 내가 세운 설계에 크게 만족했지만…

얼굴이 빨개진 눈앞의 연인을 보니 이것도 쉬운 부탁은 아니었나 보다.

“포,포옹은… 으으…”

“네? 이것도 안 되나요? 저번에는 다연씨가 저한테 안겨 왔으면서.”

“그건 사진 찍느라…!”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고다연이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 했으나,

나는 검지 손가락을 나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조용히 시켰다.

잠깐 잊은 모양이지만, 우리는 단원들 몰래 손을 잡고 있다.

언성을 높이면 이 밀회의 느낌을 풍기는 스킨십이 들킬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내 뜻을 알아들은 고다연이 번쩍 놀라며 주변을 휙휙 돌아본다.

저런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동이 더 눈에 띄게 만들어 준다는 걸 그녀는 알까?

“후후. 대답해 줄 때까지 손 안 놓아줄 겁니다. 도망은 허락하지 않아요.”

“……그 하,할당량. 꼭 채워야 하나요? 못 채운 채 다음 주로 넘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면역력이 떨어져서 잔병에 취약해질 걸요? 간 수치도 높아지고, 혈압도 약해지…”

“잠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튼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요.”

나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원래 개소리는 티가 팍팍 나게 해야 상대도 장난인 걸 알아듣는다.

고다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긴장했는지, 숨에 떨림이 담겨 있었다.

점점 붉어지는 얼굴과 나를 슬쩍 피하는 눈.

그 알아듣기 쉬운 반응에 기대가 솟았다.

“크흠! 어쩔 수 없네요. 면역력은 중요하니까…?”

“데이트? 포옹? 어느 쪽?”

“…후,후자로오…”

그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스럽게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눈치를 보니 단원 몇 명은 이미 이쪽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지만,

열심히 모르는 척해주는 그 노력이 고마워서 고다연에게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어어.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던 중.

한국 연애의 정석답게, 여자 친구의 집 앞에서 약속했던 포옹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럼… 다연씨.”

작고 얇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연신 눈을 내리깔고 쭈뼛대는 그녀를 보니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말 없이 그녀를 내 품에 상냥히 끌어당겼다.

­ 꼬옥.

“…1초. 2초…”

“어? 시간 세기 있어요?”

“…5초. 끄,끝! 할당량을 채우는 덴 5초면 충분하다면서요…!”

귀까지 홍조가 옮은 고다연이 내 가슴을 약하게 밀었다.

아쉬움을 떨쳐내고 그녀의 어깨를 둘렀던 팔을 풀었다.

품에는 아직 잔향이 남아있어, 입안에 감칠맛만이 강하게 맴돌았다.

5초는 너무 부족한데…

“우와… 그런 표정을 할 정도로 아쉬워요?”

“이 밀당의 귀신.”

“킥킥. 찬영씨가 자초했으면서. 10초라고 했다면 10초간 안겨줬을 거예요!”

“으으… 너무하셔라.”

내가 무척이나 아쉬워하자 어쩐지 고다연은 기쁜 것처럼 보였다.

연애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좋나 보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항상 내 의도에 이리저리 끌려가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후훗. 아무튼, 할당량은 채웠으니까 주말에 보는 거예요?”

“5초… 부족하지만 제가 꺼낸 말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네! 찬영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너무 짧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포옹이라는 목적은 달성했다.

이렇게 점점 스킨십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내 최종 목표다.

나는 건물의 1층 현관 유리문 안쪽에서 나를 향해 기분 좋게 손을 흔드는 고다연을 보곤 피식 웃었다.

많이 신났네.

*

서울.

영등포역.

박은미는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고향도 꽤 번화가라 그런지, 건물 자체는 생각보다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밀도로 모여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신기했다.

“창호야! 창호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밤 되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아! 주말이라 특별히 많은 건가?

“…누나. 촌놈 같아요.”

“이놈이!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 쿠욱!

“악!”

박은미는 자신의 옆에 선 남자친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옆구리를 찌르는 것에도 손을 들어올려야 하는 것이 유머라면 유머였다.

그럭저럭 평범한 커플에 속하는 둘.

190cm를 넘기는 커다란 키만을 보면 남자 쪽이 한참 연상으로 느껴졌으나,

그의 앳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확인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아니, 사실 박은미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걸 수도 있다.

그녀는 남자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 보면 좋게 봐줘야 20대 중반.

다른 건 몰라도, 군필처럼 보인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네가 연하라는 게 억울해!”

“누나가 키가 작은… …누나가 어려 보이는 걸 어째요.”

장찬호는 연상 여자 친구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바꾸었다.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키는 아무리 거대한 키를 가진 남자의 옆에 서 있는 것을 감안해도…

좀 많이 작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친구분은? 마중 와 있으시다 했죠?”

“잠깐. 전화해볼… 오! 마침 전화 오네.”

­ 위잉!

박은미는 핸드폰을 들어 받았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그녀의 오랜 친구였다.

역의 주변 지리는 꽤 복잡했지만, 두 커플이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다연도 그녀의 남자 친구도 길치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박은미와 박찬영이 한 장소, 한 시간에 만났다.

그야말로 그녀가 가장 고대해 왔던 순간이다.

“다연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두 분 엄청 친하시다면서요?”

“반가워요! 저도 다연이에게 말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남친 자랑을 하던데, 매번 들어주기 피곤해서…”

“은미야! 내가 언제!!”

“하하하!”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확실히 외모를 보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연이가 남자를 제대로 물었구나, 이 생각부터 들게 만드는 외모였으니까.

솔직히 너튜브와 SNS 페이지에 업로드되는 댄스 크루의 게시물은 전부 최소한의 보정이 들어간 줄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필터 보정은 들어가곤 했으니.

하지만 이 남자는 보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닌, 보정을 가지고 태어난 부류 같았다.

표정이 흔들릴 뻔할 정도로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애 고수인데?’

박은미가 서울로 올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러니 이 기회에 알아볼 것이다.

남자가 정말로 고다연의 말대로 연애의 숙맥인지,

아니면 연애에 도가 튼 고수인데 순수한 척을 하면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를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노는 것인지.

물론 연애 고수라고 한들,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고다연을 향한 마음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것이니까.

박은미는 이러한 속마음을 숨기고 순수한 웃음을 지어내었다.

그녀는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박은미라고 해요! 잠깐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제 여자 친구 잘 부탁드릴게요.”

마찬가지로, 박찬영 또한 순수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보였다.

검은 뜻이라곤 티끌도 없다는 것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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