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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78) (278/310)

〈 278화 〉 지구 *

* * *

“후… 모두 수고하셨어요!”

“흐앗… 힘들어… 언니도 물??”

“앗! 고마워!”

언제와 같은 댄스 연습실.

고다연이 모두에게 물을 나누어 주는 사이,

난 흘리지도 않은 땀을 닦는 척을 하고 있었다.

과도하게 강한 체력은 이런 사소한 불편함이 있었다.

유산소 운동을 몇 시간이나 했는데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건…

아무리 그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최근 애용하는 방법은, 화장실에서 세수하는 척 얼굴을 적시는 것이다.

적당히 부주의하게 옷에 물까지 튀겨주면 금상첨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땀방울로 보이니까.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도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어… 다연아? 아무리 그래도 베스트 댓글을 지우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네에? 어째서? 저번에 이런 성희롱 댓글이 달렸을 때는 삭제했지 않나요?”

“그,그때는 여성 단원이 대상이었잖아… 지금 댓글처럼 추천도 많이 없었고…”

“이건 남녀 관계없이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인데…!”

“하하… 너무 옳은 말이고,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하하……”

연습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고다연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무척이나 곤란한 듯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고다연이 누군가가 곤란해할 행동을 하다니?

상당히, 정말 상당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잘생겼다 말하기 정말 주저 되는 생김새.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상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성규. 댄스 크루의 너튜브 채널 운영을 맡고 있고, 실제로도 너튜버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아마 코미디 영상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했었나?

“무슨 일인가요?”

나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고다연은 내 공식적인 연인이니, 일단 명분은 있었다.

하지만 최성규는 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내 등장을 무척이나 반겼기 때문이다.

“오! 마침 찬영이 왔네! 다연아,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차,찬영씨? 언제 왔어요?”

“조금 민감할 수 있는 거긴 한데, 본인이 기분 나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 없잖아? 다연이 네가 남자친구 걱정하는 건 알겠…”

“꺄악! 나,남자친구 걱정 아니에요!! 이건 그냥 단원을 악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다연이 나를 연신 힐끗거리며 변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둘 다 저런 반응이 나올까?

이쯤 오니 나도 궁금증이 일었다.

“악플? 악플 달렸나요? 저희 댄스팀 채널에.”

“으음… 이걸 악플이라고 봐야 할지… 일단 네가 직접 봐봐.”

최성규가 내미는 핸드폰의 화면을 보았다.

가장 최근에 올린 영상이었다.

특징이라면, 내가 댄스의 메인 중 하나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영상의 내용이 아니니 댓글을 확인하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저장용 01:37?”

무려 추천 수를 500개 이상이나 받으며 1위를 차지한 인기 댓글이었다.

너무 짧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곧바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튜브 댓글의 특징은, 댓글에 타임 링크를 걸어 클릭 시 영상의 특정 시간대로 이동시킬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점이다.

이 댓글의 ‘01:37’ 역시 그러했다.

저걸 클릭하면 댄스 영상의 1분 37초 지점으로 이동하리라.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링크를 클릭했고,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크흠… 무슨 상황인지 알겠지?”

“…제 복근이 만천하에 공개됐네요…”

춤을 추다가 우연히 옷이 말려 올라간 것이 영상에 찍혔나 보다.

멈춰 있는 영상 속에는 내 복근이 가슴 바로 아래까지 노출되어 있었다.

가슴이 드러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제야 댓글 앞에 붙은 ‘저장용’이란 글자의 의미가 이해됐다.

아무래도 이 댓글을 단 구독자는 내 복근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구경할 예정이었나 보다.

그리고 500명 이상의 사람이 유용한 댓글이라며 추천을 줬고.

“어… 당황스럽긴 하네요. 혹시 다연씨도 봤나요? 제 복근?”

“제,제 의도는 아니었어요!! 정말로!!”

고다연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양손을 들어 펼치는 것이, 자신의 결백함을 강하게 주장하는 듯했다.

고의로 본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일 외에도 자처해서 무언가를 하곤 하니까,

채널의 댓글을 살피다가 내 노출 장면을 발견한 것이 전말이겠지.

“아,아무튼 이 댓글은 지울 거에요.”

고다연은 결심을 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이런 부류의 성희롱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주장대로 단순히 크루원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실은 남자친구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인 건 맞나보다.

솔직히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상의 정도야 바다나 수영장만 가도 저 이상으로 노출이 되지 않던가?

게다가 모델 알바도 하는데, 이제 와서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게 배 부근이 드러났다고 별다른 감흥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고다연의 뜻에 동의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의 뒤쪽을 보니 나를 향해 연신 싹싹 비는 최성규가 보였기 때문이다.

한 번만 넘어 가달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면…

댓글을, 특히나 인기 댓글을 지운다면 민심에 크나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생긴다.

채널을 운영하는 최성규의 입장에선 최대한 불씨를 없애고 싶으리라.

“음… 다연씨? 굳이 지울 필요까지야?… 이 정도는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에? 정말로?”

“상반신 전체도 아니고, 복부만 조금 노출 된 건데요 뭘. 춤추다 보면 드러날 수도 있죠.”

“그치만…”

“다른 영상을 보면, 제가 아닌 다른 남성 단원분도 이런 노출 종종 있었잖아요?”

나의 말을 구구절절 옳았다.

당사자인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기자 고다연의 표정에 ‘그런가?’가 새겨졌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최성규가 끼어들었다.

“이야! 역시 동생이 마음이 넓네! 봐봐. 다연아. 네 남친, 아무리 봐도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잖아? 그치?”

“오히려 이런 종류의 박제는… 어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신체 관리에 대한 인정을 받은 기분?”

실제로, 안 해도 될 식단 관리까지 해가며 만든 몸을 칭찬받은 기분이라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 몸은 시스템으로 손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 전부 내 노력이란 말이지?

“으음… 찬영씨가… 그렇다면야…”

“아. 혹시 질투가 나서 댓글을 지우고 싶으신 거라면… 전 기쁜 마음으로 지우는 것에 찬성할게요!”

“지,질투요?”

“그 왜, 가벼운 노출 사진이라도 그게 연인의 것이라면… 뭔가 질투 나잖아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없는 둔탱이라도 된 것마냥.

효과는 있었다.

정곡을 찌른 건지, 고다연이 눈을 살며시 피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아닌데! 진짜 아닌데!!”

“아하. 그렇다면 다연씨는 순수한 마음으로 절 걱정한 거였군요?”

“…맞아요!”

일단은 그런 것으로 해놓기로 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오해’가 해소될 때까지 고다연이 날 풀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날, 작은 헤프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후아…”

고다연은 자취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웠다.

옷도 벗지 않고, 얼굴의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 만끽하는 메트리스의 안락함은 매혹적이었다.

딱히 지친 건 아니었다.

그냥 오늘따라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이었을 뿐.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림이 배경이던 잠금화면을 풀자,

숨겨져 있던 배경이 드러났다.

“히힛.”

남녀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카레 집에서 어렵게 어렵게 찍은 사진이자, 그날 고다연이 승리를 했다는 증거품이었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그녀보다 조금 더.

언제나 어른스럽던 남자의 흐트러진 얼굴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정말 무척이나 귀한 사진이었다.

타인에게 배경 화면을 보인다면 수치심 때문에 스턴에 걸릴 걸 알면서도 배경으로 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띠링!

오늘도 어김없이 싱글거리며 승리의 달콤함을 되새기고 있을 때.

메신저가 울렸다.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녀의 둘 없는 절친한 친구, 박은미였다.

고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에게 온 메신저를 열었다.

그리고, 몸이 딱 하고 굳고 말았다.

­ (사진)

­ 니 남친 복근 사진 ㅅㄱ ㅋㅋ

사진은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운 사진이 아주 커다랗게 확대되어 있었다.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겨우겨우 지웠던 살색의 무언가가 다시 머릿속에 새겨지고 말았다.

“…얘가 왜 이 사진을 가지고 있어!!”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건, 박은미의 갤러리에서 방금의 사진을 지우게끔 하는 것이다.

연인인 그녀도 차마 저장하지 못했던 사진 아닌가?

타인의 앨범 안에 있는 건 절대 용서하지 못했다.

설령 그 상대가 그녀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신호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작 두 번의 기계음 끝에 통화가 닿았고, 고다연은 이를 느낀 즉시 핸드폰의 마이크를 향해 소리를 쳤다.

“은미 너!! 그거 안 지워?!”

­ 올. 딱 숫처녀스러운 반응. 그렇게 좋아?

“…너 다음에 만나기만 해봐!”

­ 하하하핫! 이미 사진은 지웠으니까 진정 좀 해. 조크 조크.

“으으……”

고다연은 원망스럽게 자신의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화면 안에 박힌 박은미라는 이름을.

­ 사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한 건데… 야, 톡 보내자마자 바로 전화가 오네? 이거 효과 겁나 좋다.

“남의 나,남자친구 사진을 어떻게 그렇게…”

­ 와… 다연이 너도 슬슬 걔가 남자친구란 자각을 하는 거야? 킥킥. 귀여워 아주.

“……끊을게.”

­ 아앗! 미안해! 잠깐, 잠깐, 진짜로!

실시간으로 멘탈이 갈려 나가는 느낌에 전화를 끊을까 했지만,

다급한 핸드폰 속 목소리에 한 번만 더 참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다연은 한숨을 포옥 내쉬곤 용건을 물었다.

살짝 삐친듯한 목소리로.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뭔데?”

­ 아하… 그게 있잖아, 놀라지 마?

“뭐길래 그리 뜸을 들인담?”

­ 후후후… 나 남자친구 생김.

“…지,진짜로?! 정말?!”

깜짝 놀랐다.

그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녀의 친구는 연애 경험이 엄청 많지만, 그렇기에 더욱 연애를 신중히 시작하는 타입이니까.

“와아! 축하해! 어떤 사람이야?”

­ 곧 너한테도 소개할 수 있을 듯? 우리 1박 2일로 서울 올라가거든.

“서울?! 나 자취하는 곳 근처?”

­ 응. 그래서 연락한 거야. 알다시피, 나 우리 동네 토박이잖아? 서울 지리라곤 전혀 몰라서.

“아하! 소개시켜달라고? 할래! 할래!”

­ 히히히. 반겨줘서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서로 남친도 소개해줄 겸 나한테 서울 지리도 알려줄 겸… 2:2 데이트해 볼래?

“2:2… 데이…트?”

2:2 데이트, 두 쌍의 커플이 같이 데이트를 즐기는 것.

대학교 친구 사이에서 듣기만 해본 단어다.

확실히 재밌을 것 같았다.

고다연도 절친의 새로운 연인이 궁금했으니까.

“찬영 씨한테 한번 물어볼게!”

­ 대가로 저녁은 우리 쪽에서 살 테니까, 서울에서의 데이트 코스는 맡길게?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통화가 끊어지기 직전.

고다연은 전화를 끊으려는 친구를 막아 세웠다.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부끄러운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있잖아… 너네 사귄 지 얼마나 됐어?”

­ 응? 한 3일쯤 됐지.

“그렇지?… 얼마 안 됐지?… 그,그런데… 그… 사귄 지 3일밖에 안 지났는…데… 1박…2일 여행?…”

­ ……푸하핫!! 무슨 깜찍한 상상을 하는지 알만 한데, 그런 거 아니야. 정확한 건 나 서울 올라오면 알 수 있을 듯?

연인과의 1박 2일 여행을 상상하면, 저절로 그런 걸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의 고다연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은 넘어갔다.

친구가 서울로 올라오는 날은 생각보다 훨씬 코앞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대로, 직접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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