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 지구
* * *
우리 집은 방음이 꽤 잘 되어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으나, 그 외견만큼 비싼 집인가보다.
그렇다고 모든 소리를 차단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밤.
자넷의 목소리가 커지자 옆방의 데이지는 그 소리를 들었고…
당장 지금만 해도 난 방 안에 있으나, 거실과 복도의 소리가 생생히 들려오지 않는가?
“야! 너 왜 많고 많은 욕실 중에서 찬영 방에 있는 것만 쓰려 하는데!”
“겸사겸사 찬영을 보기 위해서죠!”
“…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화장실을 쓰고 싶니?”
“처,천사는 볼일 안 보는 걸요? 제가 화장실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씻기 위해서입니다!”
“으극…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
이처럼 커다란 소리는 벽을 뚫고 들릴 수 있었다.
확실히 집에 사람이 많아졌음이 체감된다.
해가 떠 있을 동안은 항상 소란스러웠으니까.
그 대부분이 안젤리와 크리스의 다툼이 원인이다.
처음에는 몇 번 말려보기도 했는데,
둘 다 심각할 정도로 싸움이 발전하지는 않는단 걸 알곤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전에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나 보다.
“어라? 찬영? 방에 없네요? 어디 있지?”
“저 변태 비둘기, 틈만 나면 찬영이랑 둘이 있으려고…!”
“크리스씨는 찬영이 어딨는 줄 아시나요?”
“네 언행을 좀 돌아봐! 내가 알려 주겠냐!”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나의 방이 아니다.
그럼 내 주된 일과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데이지에게 잡혀 와서 그녀가 책을 읽는 동안 방에 갇히는 것.
“……”
소란스런 문밖 상황과 다르게 이 방은 정적이 가득하다.
굳이 소리를 찾자면 데이지가 책을 넘기는 소리가 유일하다.
…솔직히 심심하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는 자넷과 멜, 데이지의 적응을 돕기 위해서인데…
이건 내가 생각한 일상과 조금 동떨어졌다.
‘멜도, 자넷도…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잖아?’
그렇다고 그 둘에게 당장 나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둘은 지구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어렵지 않은 가전제품은 알아서 사용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서 전자레인지나 청소기 같은 것들.
데이지의 경우?
말할 필요도 없다.
얘는 노래나 들으라고 준 태블릿으로 인터넷 서핑까지 시작했으니까.
공부하는 것을 직업으로 했던 그녀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건 익숙한 일인가보다.
데이지 옆에 붙어서 그녀의 특성 효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임을 알고 있긴 하다.
허나, 그동안 나는 움직이면 안 된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이런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당장 테라포밍 세계에서 항상 해오던 ‘아공간’ 스킬 숙련도 노가다를 하곤 있지만…
마나가 떨어지면 다시 채워질 때까지 심심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평소 같았다면 데이지와 함께 책을 읽었을 것이다.
비록 크게 쓸 곳이 없더라도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내 성장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시켜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보라.
내가 데이지의 곁에서 책을 읽기 위해 다가가면…
“…읏!”
꼼지락. 꼼지락.
데이지가 내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여 도망가버린다.
자넷과 동침을 한 날, 데이지에게 들킨 이후에 쭉 이런 스탠스다.
“쫄보.”
“야! 내가 왜 쫄보야!”
데이지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화를 낸다.
나야말로 억울하다.
연인과 더 깊은 사이가 된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해해 준다 말해놓고선 신경 쓰는 티 팍팍 내길래.”
“그,그건… 그렇지…만… 으윽!”
“날 불편히 여긴다 하기엔 매번 나를 끌고 방에 들어가지, 그렇다고 평소처럼 대해주면 도망가지… 너 사춘기냐?”
“사춘기 아니거든?!”
데이지가 기함했다.
내가 의심스럽게 그 모습을 쳐다보자,
그녀는 쭈뼛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틀린 건 아나보다.
데이지가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이대로 그냥 책을 읽으려는 건가?
내가 한숨을 쉬며 그런 그녀를 조용히 구경하려는 그때.
데이지가 입을 열었다.
“……사춘기 일지도.”
“뭐? 진심이야?”
“미안해.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으음… 어떤… 어떤 기이한 현상을 논리적인 시점으로 관찰했을 때, 한가지 가설을 끼워 넣으면 모든 게 딱딱 들어맞는다고 가정하자. 그럼… 나는 그 가설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분위기상 꽤 중요한 질문이란 건 알겠다.
그러니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근거가 조금 부족한 가설이지만, 끼워 넣으면 기이한 현상을 설명 가능하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보다는 확실히 나으리라.
“틀릴 확률도 존재하겠지만, 별개의 논리로 대체 가능한 가설이 없이 유일하다면 그 가설을 기준으로 움직여야겠지?”
“…내 감정이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마구 부정해도?”
“머리가 아니라 감정이?”
“감정이.”
데이지가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내게 재차 물었다.
그러나 독서를 하는 낌세는 아니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다.
“음… 그렇다면 그 가설을 믿지 않을 것 같은데?”
“어? 정말?”
“왜 그리 놀라?”
“의,의외의 답이라서. 너라면 불필요한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 은근히 감정을 중시해. 육감의 존재도 믿고 있고.”
이게 정말로 육감이 경고를 하는 건지,
아니면 내 무의식이 불리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지는 차분히 밝혀내면 된다.
알기 싫어도 시간이 지나면 알 수밖에 없다.
나도 데이지도, 자기 관조를 자주 하는 타입이니까.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마.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깨닫게 되겠지 뭐.”
“……덕분에 답을 미룰 수 있는 핑계가 생겼네.”
마치 꽉 막혔던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는 말투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미약하게 여유가 생긴 얼굴이다.
“고민 탓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냐?”
“나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스트레스를 안 받더라. 그래서 책 읽을 때마다 부르는 거야. 도움이 꽤 되거든.”
“아하. 그러고 보니…”
『구원받은 자』의 특성 효과로 스트레스 면역이 있었다.
그 비싼 구름나무 차의 효과가 영구적으로 유지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적인 성능을 지녔다.
“다행이네.”
“그거 알아? 나 사실 혼자 있을 때보다 너랑 있을 때가 더 편하다?”
“오,오글거리게 갑자기 왜 그러냐…”
“우린 친구니까! 킥킥.”
데이지는 장난스럽게 그리 말했다.
낯도 두껍기는.
그러고 보면, 우리 사이를 친구라 입 밖으로 정의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기한 감흥이 들었다.
어쩐지, 조금 애매한 감흥도 들었다.
나는 흥얼거리며 책을 읽기 시작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멜로디가 익숙한 것이, 태블릿에 넣어 둔 한국의 노래 같았다.
조심스럽게 데이지의 곁으로 다가가 본다.
그녀는…
이제 날 피하지 않았다.
*
현대 생활에 적응이 빠른 데이지 덕분에 내 일이 편해졌다.
나 대신 데이지가 자넷과 멜을 도울 때가 더 많았으니.
‘마치 잘 키운 첫째 딸이 아직 미숙한 동생들을 돌보는 것 같네.’
그녀들의 외견을 보면 정 반대 입장으로 느껴지겠지만.
아무튼, 다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을 해주었다.
그것이 오늘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난 이유다.
시끌시끌.
날이 맑아서 그런 걸까?
분수대 앞 광장에는 놀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 대부분이 커플이었고, 종종 여자 무리가 우르르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분수대 옆 시계탑의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0분.
아직 약속 시간까지 20분이나 남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나의 기다림은 20분이 아닌 10분으로 끝이 났다.
저벅저벅.
뒤에서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대로 그녀가 다가오는 걸 모르는 척해보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나는 장난 반 호기심 반인 감정으로 여전히 시계탑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척을 했다.
“와앙.”
와락.
뒤에서 끌어안겼다.
오랜만에 맡는 반가운 향기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그런데, 방금의 자체적으로 낸 효과음은 뭘까?
“왜 ‘와앙’인가요?”
“공룡이라서요.”
“…누가 공룡이라고요?”
“저요. 와앙.”
꽈악.
나를 껴안은 힘이 한층 강해졌다.
또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공룡이라, 생각 이상의 4차원적인 대답이다.
당연하지만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공룡을 흉내 낸 건 날 끌어안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그녀의 성격상,
한동안 못 봐서 외로웠다고 솔직히 말하며 안기지 못할 테니까.
평소 당찬 것에 비해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다.
“전 분명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공룡이 왔네…?”
“엄청 일찍 오셨네요? 얼마 전부터 기다린 거야. 솔직히 말해!”
옆구리를 감싸 안은 손가락이 나를 당장이라도 간질이겠다는 듯 곤두섰다.
아무래도 아직 포옹을 풀기는 싫나 보다.
나는 두려운 척을 하며 솔직히 고백했다.
“10분밖에 안 기다렸어요. 정말로.”
“흐음… 부지런하시긴.”
“그런데… 언제 얼굴 보여줄 건가요? 진짜 공룡인지 제 여자친구인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찬영 씨는 어느 쪽이 더 좋아요?”
“흐음… 최초 공룡 발견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공룡 쪽이?”
“이게!”
간질간질!
“아하핫!”
옆구리의 간질거림을 버티지 못하고 내가 몸부림치자, 드디어 우리의 포옹은 떨어졌다.
천천히 뒤를 돌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다연이가 보였다.
어쩐지 얼굴 보고 대화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짜잔.”
“다연씨. 오랜만.”
“빨리 실물 공룡을 본 것보다 더 대단한 반응을 해줘요.”
“와! 여자친구였잖아?!”
“킥킥! 진짜 하면 어떡해!”
“말 잘 듣죠? 이런 남자 세상에 또 없다.”
텐션 높네.
오랜만의 데이트에 신이 났나 보다.
다연이는 그대로 내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연애 초기, 서로 사진을 찍는 것도 어설프게 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만한 시간이 흐르긴 했다.
내가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에서 불로의 비약을 만들기 위해 배속을 돌렸을 때.
에일린의 세계에선 10,000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구에서는 그 1/100인 100일. 3개월 정도가 지났다.
당연히 이 3개월간 다연이와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공룡인가요? 확실히, 귀엽긴 했는데. 큭큭.”
“으음… 우리 오늘 공룡 나오는 영화 보니까?”
“아하.”
고질라는 공룡이 아니라 괴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늘 집중해야 할 건 데이트니까.
“그럼 슬슬 갈까요? 영화 보러.”
“네!”
나는 다연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인파에 떠밀리듯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오늘 본 영화는 액션 영화였지만, 연인이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볼 거란 편견은 버려야 한다.
“짜거나 기름진 걸 멀리하는 삶은 너무 괴로워 보여요…”
내 옆에 선 그녀는 팝콘 통을 뒤흔들며 말했다.
팝콘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별로 손을 안 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팝콘을 못 먹는다니!”
“정작 저는 별로 괴롭지는 않지만요. 이젠 익숙해져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담배도 안 해, 건강에 좋은 것만 먹어… 찬영 씨는 엄청 오래 살 것 같아요.”
그녀의 예상대로 난 장수할 가능성이 크다.
마나 각성을 끝내서 노화가 현저히 늦춰졌기 때문에.
“이제 식사하러 갈까요? 아니면 오늘 데이트는 끝?”
“으음…”
다연이가 고민에 잠겼다.
설마 벌써 데이트를 끝낼 생각인 걸까?
조금 아쉬운데.
오랜만의 데이트가 짧은 것이 싫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찬영씨? 고,고양이 보러 갈래요?”
“…고양이요? 고양이 안 키우시잖아요. 저번에 갔을 때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젠 키워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가 길어지는 건 나도 반가운 일이었으니.
내가 그녀를 보지 않은 사이에 냥줍을 했나보다.
확실히 그녀는 정이 많고, 책임감도 있으며, 동물을 좋아할 것 같으니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은 반려동물 허용이었나?
다연이의 자취방은 넓지 않았다.
내가 평범한 대학생이던 시절에 지냈던 그런 조그마한 원룸.
그런 비슷한 오피스텔이 그녀의 거주지였다.
가는 길은 익숙했다.
항상 그녀를 바래다주기도 했고,
몇 번 그녀의 방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끼익.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티 나게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둘러봐야만 전부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방은 아니었다.
“깨끗하게 치워놨네요?”
“전 항상 깨끗하거든요?”
“믿을게요. 그런데… 고양이는?”
그제야 나는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양이는 없었다.
필요한 물품도, 고양이 털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다연이가 나의 어깨를 툭툭 쳐서 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야,야옹…”
“……”
지금 내가 뭘 본거지?
고양이를 보여준다며 나를 부른 그녀는,
지금 내 앞에서 두 손을 말아쥐고는 고양이인 척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 치명적인 매력에 잠시 심장이 멈춰버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어라? 분명 애타랑 인터넷에서 이렇게 하면 넘어온다고… 꺄악?!”
반응을 기다리던 그녀는 내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어디서 이 파괴력 높은 유혹 스킬을 배워왔는지 출저를 밝혔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로 향했다.
“차,찬영씨! 잠깐! 저 샤워부터…”
“안됩니다.”
단칼에 거절했다.
이대로 그녀를 덮쳐야겠다.
당연하지만, 나와 그녀는 한참 전에 연인 사이의 진도 끝까지 닿았다.
지난 3개월 중에 첫날밤을 치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의 커플처럼 종종 동침하곤 했다.
그만큼 우리 사이엔 많은 일이 있었다.
3개월 전만 해도 키스도 아직이었는데…
이렇게 그녀를 안아 올리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지며,
저절로 3개월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어제 일이라도 된 것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