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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76) (276/310)

〈 276화 〉 지구

* * *

당연하지만,

오늘은 자넷과 같이 잘 예정이었다.

또 지난번처럼 그녀를 쓸쓸히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당당한 연인이겠다, 거리낄 것도 없다.

원래는 잠들기 전에 서로 알콩달콩한 토크라도 즐길 예정이었지만…

내가 방에 딸린 조그만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왔을 때.

자넷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티는 안 냈으나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이불보 바꿔주려 했는데… 내일 바꿔야겠네.’

이럴까봐 그녀와 함께 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따로 씻게 되었다.

방에 딸린 화장실이 보통 그렇듯 둘이 쓰기엔 너무나 작기도 했고,

자넷이 밝은 곳에서 몸을 보여주기를 부끄러워해서 어쩔 수 없었다.

격렬한 운동을 한 직후라 목이 탔다.

자넷의 옆에 눕기 전에 냉장고를 찾기로 했다.

아무리 방금 샤워해서 머리카락이 젖었다곤 하지만 완전히 알몸으로 다니긴 좀 그러니,

바닥을 뒹구는 옷 중 하의만 찾아 입었다.

­ 끼익.

정확한 시간은 확인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느낌상 새벽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잡았다.

가볍고 부드러운 물체가 내 손에 완벽히 잡혔다.

­ 푹신.

“이게 뭐야?”

베개?

베개가 왜 나한테 날라와?

나는 고개를 돌려 베개가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 한 개의 인영이 있었다.

물론 암시를 가진 내게 이 정도의 어둠을 꿰뚫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데이지?”

“…나 방 바꿔줘.”

“………아.”

“니,니,니 연인들 바로 옆방이 아니라, 혼자 떨어진 방으로. 당장.”

데이지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자넷의 방 바로 옆방이 데이지의 방이다.

그녀의 터질 듯 붉어진 얼굴과, 내게 날아온 배게.

그리고 데이지가 왜 자기 방이 아닌 복도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들었어? 소리 때문에 복도로 도망쳐 나온 거야?”

“알긴 하는구나!! 이 개자식아아아!!”

데이지가 화를 못 이겨 복도에서 발을 굴렀다.

몸무게가 워낙 가벼운 탓인지 ‘쾅쾅’ 대신에 ‘콩콩’이란 효과음을 넣어야겠지만.

“어… 미안해.”

“그래! 이해해! 네 집이고, 다들 연인이니까, 이런 일도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나 좀 옮겨달라고오!”

“하지만… 이제 빈방이 없는걸. 너도 알잖아?”

정확히 말하면 이젠 안 쓰는 아기천사의 방이 하나 남았지만,

말도 안 하고 치워버린 걸 알면 분명 울상을 지으며 내 죄책감을 자극할 것이다.

옮기더라도 먼저 이야기를 하고 옮기자.

“후우. 후우… 나 귀 안 좋은 거 알지? 내가 들었으면 다들 들었을 거야?!”

“아닐걸… 크리스는 일찍 자는 타입이야. 멜이랑 안젤리는 뭐, 보이는 성격대로 잠이 많고.”

그래서 자넷이 신음을 내도 제지하지 않았는데…

집안에 잠 없는 야행성 꼬맹이 생겼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들어버렸나 보다.

“음… 네 입장에선 많이 불편할 만 하네.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다.”

“………”

“그런데도 고작 베개를 던지는 걸로 봐주네? 역시 근본은 착하다 해야 할지…”

“……내가 그거보다 무거운 걸 던질 수 있는 근력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

“아.”

그녀의 말대로 얌전히 데이지의 힘 스텟에 감사를 보냈다.

밑바닥을 기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

“……이어폰이나 헤드셋이라도 사줄까?”

“그게 뭐야? 아니, 그 이전에 방 변경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 멀리 있던 데이지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개수를 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다고 이곳에서 아기천사의 방이 보일 리 없다.

왜냐하면 녀석의 방은 안젤리의 방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줬으니까.

그래야 안젤리와 몰래 만나기 편하지 않겠는가?

즉, 아기천사의 방이야말로 데이지가 원하는 종류의 방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기천사를 만나본 적도 없는 데이지로썬 알 수 없는 사실.

희망이 없는 것으로 안 데이지는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나 설마 이대로 계속 살아야 해? 아니지? 응?”

“음…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오! 그래?! 그게 뭔… 흐야아아아악?! 너,너 왜 벗고 있어어!!”

어느정도 다가온 데이지가 나를 보곤 새된 비명을 질렀다.

방금까지와 데시벨이 다른 걸 보니 진심으로 놀랐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거리가 좀 있고 복도가 어두워 내 실루엣만 보였을 뿐, 내 의상 상태는 보지 못했나 보다.

데이지는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삐걱대며 뒤를 도는 것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야야,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잘 봐봐.”

“오,오해? 나 방금 잘못 본 거냐?”

내 말에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던 데이지가 뻘쭘하게 손을 치웠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마주했다.

“응. 봐. 상의만 벗고 있잖아? 아무리 나라도 전부 알몸으로 다니진 않아.”

“야 이 씨발놈아!! 제대로 본 거 맞잖아악!!”

분노와 수치가 반씩 섞인 목소리가 날아든다.

만약 데이지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면 날아든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그녀의 반응이야말로 당황스럽다.

“…왜 상체를 본 것만으로 놀래? 너희 세계에서도 남자들 웃통 곧잘 벗고 다니던데?”

“………어라? 그런가?”

수도 밖에는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농사를 짓는 농민만 셀 수 없고,

수도 내부에서도 상의를 벗은 채 나무 그늘에서 쉬는 남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남성의 상체란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였다.

물론 데이지는 남성 혐오증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지만…

감히 자부하는데, 나는 그녀의 기피 대상에서 완벽히 벗어나 있다.

그 정도야 평소 데이지가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와 그녀 사이에 무언가가 가로막기엔…

서로에게 너무 마음을 터 놓았다.

봐라.

내 의문은 틀리지 않았다.

데이지는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어째서 이리 격한 반응을 보였는지 고민에 잠겼다.

“…야. 우리 방금까지 하던 대화가 뭐였어? 그 상황에서 네 벌거벗은 몸뚱이를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들겠어?”

“그게 겨우 찾아낸 이유야?”

“마,맞춰 끼운 게 아니라 이 이유 맞거든?”

“아님 말고.”

어쨌든, 새벽에 일어난 이 짧은 헤프닝은 내가 근시일 내에 해결책을 준비한다는 약속으로 단락되었다.

임시방편으로 방구석을 굴러다니던 태블릿과 이어폰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멜의 아침은 늦었다.

훈련을 거르지 않는 등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그녀지만, 굳이 할 것도 없는데 일찍 일어날 이유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고급스러운 침대의 도움까지 있으니…

침대에 한정해서 중력이 높아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수도꼭지를 돌려 세안을 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잠옷을 갈아입었다.

선택한 의상은 예쁘고 청초하다기보다는, 조금 보이시한 종류였다.

그녀의 세계에서도 남장을 하고 다니다 보니 의상 취향도 그쪽에 맞춰져 간 탓이다.

“찬영님도 제 나름의 매력이라 말해주셨는데 굳이 바꿀 필요는… 어라? 이건 뭘까요…?”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흐트러진 옷장을 정리할 때.

멜은 옷장 안에서 기묘하게 생긴 무언가를 발견했다.

최근 생긴 미약한 트라우마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멜이다.

잠깐 건드려도 되나 싶었지만, 이 방에 있는 것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물건이라 했었다.

만약 멜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주인에게 돌려주면 그만이다.

하물며 아무리 봐도 위험한 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그냥 좀 작은 천이었으니까.

그러한 이유로, 멜은 옷장 안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 꿀꺽.

‘이,이거 제가 생각하는 그거인가요?…’

손바닥 크기의 무언가.

집어서 펼치자, 멜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임에도 어떤 용도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째서 옷장 안에 개어져 있었는지 또한.

속옷이었다.

다만…

면적이 무척이나 작고, 어쩐지 속이 애매하게 비치는 검은색에, 야시시한 느낌의 흰색 프릴이 달린.

살며 단 한번도 성인용 속옷을 본 적이 없는 멜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연인과 동거 중인 한창때의 소녀였으니까.

“서,설마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보통으로 입는 건…”

다행히 다른 속옷을 봤을 때는 그건 아니었다.

유독 이 팬티만이 성인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혹시 방 안에 누가 없는지 살짝 살펴보고, 멜은 조심스럽게 팬티를 골반 쪽에 대보았다.

‘이,이거 분명 안쪽 비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녀의 방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누군가의 물건이 잘못 들어온 걸까?

아니면…

그녀의 연인이 첫날밤에 입어 달라고 남몰래 넣어 두었던가?

발칙한 생각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갈피를 못 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적막을 깨는 노크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똑똑.

“멜? 곧 아침 식사인데. 일어났어?”

“크,크리스씨? 네에! 저 일어났어요!”

“그래놓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거 아니지? 들어가도 돼?”

“앗! 잠,시만요!”

멜은 허겁지겁 팬티를 자신의 엉덩이 아래 깔고 뭉갰다.

침착하게 옷장에 넣으면 됐지만, 방금까지 혼란에 차있던 멜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 끼익.

“오. 뭐야, 이불 정리도 다 했잖아?”

“헤헤… 저 그렇게 철없지 않거든요?”

“…자넷이랑 아주 딴판이네. 걘 혼내야 겨우겨우 하던데.”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문밖으로 다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명백한 초인인 크리스의 눈이 멜의 엉덩이 아래쪽에 삐져나온 무언가를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멜? 그 엉덩이 아래 뭐야?”

“네? 네에? 어,엉덩이요? 아. 엉덩이. 글쎄요… 저도 잘…”

멜은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으나, 그렇다고 미래가 변하는 건 아니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멜이 비켜줘서 숨김없이 드러난 무언가를 가까이서 확인했다.

“으앗?! 이게 왜 여기…”

“어라? 크리스씨. 이거 아세요?”

“어? 어… 그러게? 어…”

크리스는 갑자기 멜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제야 멜은 한가지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그녀의 연인이 말하길, 옷장을 채운 건 크리스가 대신해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시 이 속옷의 주인이 크리스씨인가요?…”

“……”

“아……”

멜은 말없이 속옷을 넘겼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는 판단이었다.

크리스 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얌전히 속옷을 받아 챙겼다.

단, 멜의 경우와 다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 탁탁탁!

도망갔다.

멜은 크리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말 못할 정도로 전신을 지배했던 어색함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멜도 시간의 텀을 두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크리스가 다시 멜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 뒤에 몸을 절반 가까이 숨기고, 상체만 밖으로 내민 채.

“…비,비밀로 해.”

그 절박함 섞인 당부에 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밀로 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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