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19) 지구
* * *
입술이 떨어진 뒤.
우리 사이에 정적이 자리했다.
뜬금없지만…
만약 이것이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그야말로 장면이 전환되기에 딱 좋은 상황이 아닐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내 품 안에 있고,
시간은 여느 때처럼 공평이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음날로 넘어가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색함이 자리하기에는 깔린 분위기가 너무나 애틋했다.
자넷의 눈도 아닌 척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고,
나 역시 방금 그녀의 적극적인 스킨십 앞에서 이성의 벽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자넷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자넷도 내 품에 편안히 기대며 빠져나오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수동적인 유혹이란, 분명히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전 원래 가벼운 스킨십만 할 생각이었어요.”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변태 같잖아…”
“아닌가요?”
자넷은 망설이다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의미가 담긴 건지 알고 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방의 불을 끄고,
그녀를 안아 든 채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내게 안긴 자넷은 내 얼굴을 보기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곤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넷이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면 미룰 이유는 없었다.
나와 그녀는 명실상부 연인이었으니까.
스윽.
푹신한 침대가 우리의 몸을 감싸 안았다.
바로 덮치지는 않았다.
미약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자넷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급하게 하면 될 것도 안된다.
둘이 올라섰다고 해도 침대의 여유 공간은 넓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상정하고, 퀸사이즈의 침대로 준비해 놨으니까.
“확실히, 혼자 자기에는 너무 넓은 침대다. 그쵸?”
“……”
“평소엔 그리 무뚝뚝하다가, 지금은 이렇게나 저돌적이고… 단장은 중간이 없으시네.”
“…어젯밤. 종일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어.”
“어떤 생각을?”
“너랑 그… 하게 된다면… 이 침대에서 하는 걸까나, 하고.”
“네? 그게 잠을 설친 이유였어요?”
자넷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부끄러운 고백을 한 사람답게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이 사람, 발상이 생각보다 소녀틱하다.
나는 그런 자넷이 괜히 귀여워져서 내 품에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와락!
“뭐,뭔데… 왜 갑자기…”
“평소 걸걸하시던 단장이 이런 반전 매력을 자꾸만 보여주니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언제 걸걸했어…”
“매번 단원들 앞에서 섹드립 치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으윽…!”
생각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용병의 세계에서 적응하려면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자넷은 그걸 넘어서 섹드립을 주도하기까지 했단 말이지?
나는 그 점을 지적한 것뿐이다.
쪽.
자넷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슬슬 분위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다.
이대로 잡담만 하다가는 한세월 걸릴 것 같은데,
그걸 두고 보기에는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쪽.
이번에도 같은 자리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내 스킨십에 호응하듯 자넷이 숨을 굳혔다.
“흣… 왜 목에다만 키스를…?”
“전희.”
“저,전희라니…”
“킥킥. 너무 긴장하시는데? 귀여우셔.”
“…바보. 간지럽기만 하거든?”
“글쎄… 아닐걸요?”
쪽.
이번에는 입맞춤을 길게 가졌다.
두 번. 세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처음에는 가볍기만 했던 키스가 점점 더 진해져 갔다.
목덜미가 자넷의 성감대는 아니라 한들…
이렇게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애정이 어린 키스를 연속으로 받게 된다면,
의식할 수밖에 없어진다.
사람인 이상 목덜미는 감각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위니까.
쪽. 쪼옥…
“흣… 자,잠…까안…”
처음에는 간지럽다는 듯이 움찔거리기만 했던 자넷이지만…
이제 와선 숨결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몸 전체를 간질이는 경험해본 적 없는 감각에 달아오르는 것이다.
목에서 입을 떼고 자넷의 몸에서 옷을 한 벌씩 벗기기 시작했다.
자넷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얌전히 내 손에 몸을 맡겼다.
곧.
평소 옷 안에 숨겨져 있던 하얀 살결이 드러나고, 현대풍의 속옷 역시 모습을 보였다.
‘…이건 크리스의 덕을 본 걸까?’
의외로 잘 어울리는 속옷을 입고 있었다.
감흥도 잠시, 개의치 않고 중요한 부분을 막아선 천 쪼가리를 치웠다.
침대 위에서 속옷의 용도란 딱 그 정도니까.
아직 온기가 있는 한 쌍의 여성용 속옷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더이상 그녀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자넷은 속옷 역할의 대신으로 팔과 손을 사용하고자 했지만…
어색하게 가려진 팔과 손등 사이로 연분홍빛의 음란한 무언가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번에도 느낀 건데, 단장은 생각보다 피부가 새하얗네요. 잡티도 하나 없고.”
“감상 말하지 마…”
“평소의 얼굴도 꽤 하얗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게 햇볕에 탄 거였다니.”
“……혹시 이,이상해? 너무 과도하게 창백하나…?”
“아니. 야해요.”
자넷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부끄러워하는 자넷에게 애정이 어린 입맞춤을 해준 뒤.
나 역시 자넷과 마찬가지로 몸에 걸친 옷을 한 벌씩 벗기 시작했다.
스윽.
“……”
“대놓고 봐도 되는데?”
“보,보긴 누가 봐!”
열심히 아닌 척을 하고 있으나, 자넷의 눈은 솔직하게 내 몸을 힐끔거렸다.
마치 이성과 본능의 전쟁 같았다.
눈동자가 내 가슴팍과 천장의 전등을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에.
휴일 없이 행하는 고강도의 체력 훈련. 버릇돼버린 식단 조절 때문에 내 몸은 꽤 이상적인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나 수영장에 가서 태닝 오일이라도 치덕치덕 바르고 자랑해야 할 수준.
물론, 평소에 몸을 가리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 내비치면 더한 파괴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에 실행하진 않을 것이다.
당장 자넷만 해도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자넷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하체에 걸친 옷도 전부 벗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피부에 닿은 천이란 침대보와 이불밖에 없었다.
츄웁.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인 자넷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정했다.
입술을 맞추고, 이미 열기가 오른 혀를 집어넣어 그녀의 입 안쪽을 탐했다.
뜨거운 숨결이 내 혀를 마중했다.
자넷 역시 어느 정도 달아올랐다는 증거다.
츄릅. 쪽. 후릅.
질척한 소음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나는 차게 식은 손바닥을 열 오른 나의 뒷목에 대서 따뜻하게 만든 다음,
비부를 찾아 자넷의 몸을 타고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손의 이동 경로를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끔.
“츄… 헤릅… 흣, 아…!”
자넷의 미약한 신음이 혀와 혀를 타고 내 입천장에 닿았다.
내 손이 그녀의 보지 입구에 닿았기 때문이다.
슬슬 본격적인 애무를 시작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는 그때.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장? 왜 이렇게 젖었어요?”
“어? 저,정말?”
“봐요.”
쯔거억.
“흐야앗…?!”
질구에 손끝을 댄 채 가볍게 떨어주자, 음란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선명히 퍼졌다.
갑작스런 쾌감 탓인지 부끄러움 탓인지 자넷도 평소답지 않은 귀여운 신음을 뱉었다.
“이거 애무를 길게 할 필요가 없을 정도 같은데…”
“너! 아까부터 날 자꾸 변태 취급… 하읏…!”
쯔걱.
야하지 않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시험 삼아 손가락을 질 안쪽에 넣어보자, 아주 기쁜 듯이 물어대지 않는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솔직히 말해요.”
“뭐,뭐를.”
“그날 저랑 유사 섹스를 한 이후, 자위 얼마나 했어요?”
“자,자,자, 뭐어?!”
자넷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게 안겨서 사랑을 고백했던 그 날의 터질 듯 했던 얼굴만큼이나.
아무래도 예상이 적중한 듯싶다.
내가 쾌락을 알려준 밤 이후, 남들 몰래 손장난 치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모양이다.
“용병단의 단장이라고 1인실을 쓰더라니… 이런 발칙한 이유가 있었네.”
“아,아닌데? 무슨 헛소리를 그리 장황… 흐얏?!”
찌걱! 쯔걱!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마디 반쯤 넣은 손가락을 가볍게 휘젓자,
자넷이 허리를 들며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몸으로 재현했다.
몸이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모양이다.
계속된 애무와 뜨겁다 못해 타오르는 분위기, 방금의 흥분을 돋구는 토크 덕분에.
나는 그녀의 질 안쪽에서 손가락을 뺐다.
따뜻하게 손가락을 마사지해 주던 육벽의 조임이 사라져 약간 허전해졌지만…
이젠 그 따뜻함을 내 자지로 느낄 차례다.
“키스라도 해줄까?”
“…반말… 뭐, 네가 하고 싶으면 하,하던가?”
“큭큭. 네.”
츄웁.
때가 됐음을 느낀 걸까.
그녀에게 격렬하지 않은 입맞춤을 하자, 자넷도 내 목에 손을 두른 채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살짝살짝 혀를 움직이며 자넷의 다리를 잡아 부드럽게 벌렸다.
긴장이 없는 건 아닌지 다리에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내가 차분히 기다려주자 자넷은 천천히 다리에 준 힘을 풀어갔다.
넣겠다는 신호를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부드럽게만 즐기던 입맞춤을 잡아먹듯이 진하게 바꾸는 것을 신호로 사용했다.
자넷도,
날 꽉 감싸 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푸욱.
“흐읍…! 츄릅!”
귀두만이 겨우 질 안쪽에 들어갔음에도 무언가가 막아섰다.
무시하고, 단숨에 꿰뚫었다.
원래 파과의 고통은 단번에 겪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들 하니까.
투둑, 실제로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찢어지는 것만 같은 미약한 진동이었다.
“괜찮아요?”
“후,후우. 좆,밥이네…!”
역시 일류 용병의 단장이라는 걸까.
자넷은 파과의 고통쯤은 숨을 한번 몰아쉬는 것만으로 참아내었다.
참아낼 뿐이랴, 나를 향한 눈빛이 따스하게 변한 게 무언가의 성취까지 느낀 모양이다.
“하핫. 다행이네. 그래도 정말로 괜찮겠어요? 이제 시작인데?”
“…아. 그…러네…”
“걱정 마세요. 부드럽게, 아껴주듯 할 거니까.”
“……응.”
꼬옥.
내 등허리를 껴안은 자넷의 팔에 힘이 약하게 들어갔다.
우리의 첫 섹스는 격렬하지 않을 것이다.
짐승같이 쾌락을 탐하는 것과 명백히 달랐다.
수많은 연인의 첫날밤이 그렇듯, 서로의 마음을 무언으로 전달하기 위한 깊디깊은 애정표현의 연장선과 같았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잔잔함을 좋아했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며, 마음으로 교감을 하는듯한 섹스.
서로의 애정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게 좋지 않은가.
나는 자넷과 동공을 마주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