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지구
* * *
“앗! 찬영님!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
“사,사실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헤헤.”
멜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잠을 설쳤다는 뜻이다.
“으아… 나도 몸에 긴장이 안 풀리네.”
“단장도?”
“이불이랑 방 전체에서 좋은 향기가 나냐? 적당히 호화로워야지…”
노숙을 하는 날이 더 많았던 자넷과 멜은 현대 기술의 정수가 담긴 침대의 푹신함이 낯설게 다가왔나 보다.
물론 저런 반응도 고작 이틀을 넘기지 않으리라.
나중에 가서는 저 침대가 아니면 잠을 못 자는 몸이 되어버릴 테니까.
“이제 여러분의 방이니까, 편하게 있으셔도 돼요.”
“…나 살면서 개인 방을 가져본 적은 처음이야.”
“저,저도요…!”
자넷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방을 돌아보았다.
하긴, 현실감이 와닿지 않을 만 했다.
그녀들이 차원 이동을 한 지 아직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끼익.
그때.
맞은편의 방문이 열리며 데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과 머리가 정돈된 걸 봐서는 일어난 지 꽤 흐른 것 같았다.
부지런하네.
“아. 일어났어? 잘됐네. 찾고 있었거든.”
“나?”
“응. 너.”
데이지는 그리 말하고는 나를 자신의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나는 저항 없이 끌려가며 멜과 자넷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무래도 아침 준비는 좀 늦게 해야 할 것 같네.
끼익. 쿵.
“할 이야기 있어?”
“음…… 너, 오늘 딱히 할 것 없지?”
“그야 그런데…”
한동안은 그녀들의 현대 사회 적응을 도울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아 놓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연이도 한창 오디션 준비 때문에 바빴기에, 우리는 합의 하에 데이트를 조금 미뤘다.
메신저로 연락은 매일같이 하고 있지만.
“후후. 만족스러운 대답이야.”
데이지는 그리 말하면서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에는 내가 미리 꽂아 둔 연금술에 관한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책 한 권을 뽑아 든 데이지는, 그대로 나를 방치해둔 채 독서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억의 조각’에 담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중인가보다.
“저기… 데이지?”
“……응?”
“그래서, 나는 왜 부른 거야?”
“……”
데이지가 내 시선을 피했다.
어째서 그녀가 대답을 미루는지 알 것만 같다.
나는 그녀의 특성을 알고 있으니까.
“…요즘 들어서, 자꾸 집중이 안 되더라고.”
“공부가 손에 안 잡혀? 슬럼프?”
“으음… 슬럼프, 확실히 비슷한데…”
데이지가 나를 힐끗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미 그 전말을 알고 있는 나지만,
이렇게 솔직해지지 못하는 그녀를 보니 괜스레 장난기가 돌았다.
그러니 모르는 척 놀려보기로 했다.
“설마, 나랑 있으면 슬럼프가 사그라든다던지? 그래서 나를 부른 채 독서를 하는 거고?”
“으극……”
“정답이야? 데이지 너…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푸핫.”
“내,내가? 너를? 미쳤냐!! 그 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더 집중이 잘되잖아? 그런 비슷한 원리겠지 뭐!”
“오호라. 백색소음?”
꽤 괜찮은 변명을 찾았네?
끼워 맞춘 티가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냥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이것 말고도 공격할 곳이 있거든.
“그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왜 나야? 멜도 너랑 좀 친하잖아.”
“그,그건…”
“그건?”
“…네가 제일 만만하니까!”
“하하핫.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를 성공적으로 설득시켰다고 판단한 데이지는 무척이나 뿌듯하단 얼굴을 했다.
내가 포기하고 그녀의 방에 앉자,
데이지는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을 폈다.
그냥 멍하니 있기에는 심심하니, 나도 그녀의 곁에서 같이 책을 읽기로 했다.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곤 한들…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연금술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까.
“저기? 너,너무 가깝지 않아?”
“치사하긴. 같이 좀 보자.”
“…넌 눈도 좋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내가 이 방에 온 이유가 없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구원받은 자』의 설명대로라면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데이지가 받는 버프는 커진다.
이렇게 어깨가 닿는 거리가 그녀에게 있어서도 더 집중이 잘 될 것이다.
“끄응…… 장난 아니게 어렵네. 데이지 넌 어떻게 이런 걸 슥슥 넘겨 읽냐?”
“풀어서 설명이라도 해줄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런데, 너 엄청 일찍 일어났네? 너도 잠 설친 거야?”
“아니. 난 원래 수면 시간이 적어.”
“잠 많이 안 자면 키 안 클 텐데.”
“…시비 거는 거냐?”
“하하핫.”
똑똑. 끼익.
한창 데이지와 달라붙어서 시시덕대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방문이 열렸다.
“찬영. 여기 있다면서? 오늘 아침은 내가 만들……”
문을 연 인물은 크리스였다.
그녀는 방 안의 상황…
정확히는 사이좋게 장난을 치는 우리 둘을 보곤 말을 흐렸다.
볼에는 바람이 들어가고,
팔짱을 끼며 ‘나 지금 삐졌어’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노크 대답 듣고 들어갈게요. 다른 여성들의 방에 들어갈 때처럼.”
“으아악! 저,저는 이 호구… 아니, 얘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데이지가 화들짝 놀라며 나와 떨어졌다.
살짝 상처받았다.
그 정도로 싫은 걸까?
“오해야. 크리스.”
“흐응… 매번 아니라 하는데, 안 그러는 게 좋을걸?”
“……어째서?”
“나중에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면, 우리에게 밝히기 부끄러울 거 아니야? 매일같이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니.”
크리스의 말도 이해는 갔다.
친구 중에서도 우리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면서,
결국에는 커플로 엮어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봤으니까.
당연히 그 커플은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커플이 성사되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데이지의 경우는…
단순히 친구라면 몰라도, 연애에 대해선 심각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내 감정은 둘째 치더라도 데이지 쪽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으리라.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크리스가 이러한 오해를 하는 것도 이상치 않다.
나와 데이지는 의심스러운 시선이 향할 정도로 정말 친했기에.
“…에휴. 아침이나 먹자. 데이지, 그거 아냐? 나 요리도 잘한다? 인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단 거지.”
“제발 개소리 좀 그만… 난 어차피 맛을 못 느끼거든?”
“그건 좀 아쉽네.”
요즘 세상에는 맛있는 걸 먹기 위해 돈을 번다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미식에 대해 수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맛있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이지를 볼 때마다 살짝 가슴이 아팠다.
그녀에게 미각이나 후각을 찾아 줄 방법이 있을까?
‘불로의 비약’ 효과를 생각해 본다면 무척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수많은 차원을 뒤지다 보면 분명 방법은 있으리라.
나는 그런 희망을 품기로 했다.
*
“아무것도 안 건드셨네.”
“으음… 어쩌다 보니?”
“좀 더 편하게 계셔도 되는데.”
나는 지금 자넷의 방에 있다.
그녀가 주변 환경에 적응 중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역시, 하루 사이에 익숙해지긴 힘들다는 걸까.
이불은 각에 맞춰서 개어져 있었으며, 옷장이나 서랍은 건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넷의 이미지는 방을 깨끗이 쓰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니까…
아무래도 타인의 방이란 인식이 박혀 있어서, 정말 꼼짝없이 침대에 앉아만 있었나 보다.
“이 방 안에 있는 건 전부 단장의 물건이라고요?”
“알긴 하는데… 뭔가?”
“멜은 신나서 방안을 뒤적거리던데…”
“하하하. 그래? 멜 답네.”
그녀는 이 가구들의 가치를 어렴풋 알고 있으니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괜히 좋은 가구를 들이겠다고 돈을 마구 썼나?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다.
어떻게 해야 이 방이 그녀만의 공간이란 걸 실감할 수 있을까.
나는 약간 고민하다가,
정말로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단장. 그거 아시나요? 이 방, 문도 잠글 수 있어요.”
“오. 정말?”
“네. 봐요 이렇게…”
딸깍!
나는 문고리의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여주며 방의 문을 잠갔다.
이번에는 자넷도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와. 이럼 밖에서 못 들어오는 거야?”
“정확해요. 그러니까…”
와락.
“어,어어?”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죠.”
자넷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여체가 의사를 표하기도 전에 내 몸 안에 갇혔다.
“저,저기? 파계승…아?”
“저희, 제대로 된 둘만의 시간을 못 가졌잖아요. 아쉽지 않았어요?”
“그,그… 나는…”
“전 아쉬웠는데.”
움찔.
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자,
자넷이 몸을 떨며 숨을 멈추었다.
아무리 우리의 진도가 끝의 직전까지 닿았다고는 한들…
이것으로 부족한 것 같았기에, 조금 더 자넷을 유혹해 보기로 했다.
“단장은 애정 표현에 익숙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원래 그런 무뚝뚝한 성격?”
“내가? 가,갑자기?”
“최근 헷갈려서요. 절 좋아한다고 말한 주제에, 그런 티는 잘 안 내시니까.”
“아……”
자넷은 애정 표현에 무척이나 서툴렀다.
가끔은 아이컨텍을 하거나, 남몰래 나를 향해서 미소라도 보내주면 모르지만…
그조차 없었다.
공과 사를 구별하는 좋은 리더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로선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젠 공식적으로 허락도 받았겠다, 제대로 듣고 싶어요.”
“……뭐를?”
“뭐겠어요? 저를 사랑하는지, 그 확답을 해주세요.”
“읏…!”
자넷을 품에서 약간 떨어뜨린 뒤,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지금의 그녀를 보면 그 누구도 하얀 고래 용병단의 단장을 연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아는 자넷은 우락부락한 남자가 대부분인 용병업에서 여성의 몸으로 성공을 일군 여걸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남자와의 스킨십에 얼굴을 붉힌 천상 소녀가 아니라.
나 역시 말은 헷갈린다 했으나, 실제로 그녀의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둘만 남겨지면 말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티 나게 시선을 돌리는 등…
나를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팍팍 티 났으니까.
“…미안해. 너무 표현을 안 했으려나? 나, 이런 거에 정말 익숙지 않아서…”
“제가 첫 연애인가요?”
…끄덕.
자넷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결혼할 나이에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것이 쪽팔리나 보다.
귀여운 반응이다.
내가 그녀의 첫 남자라는 건 감점 대상이 아니라 가점 대상인데.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처음이야. 그날 밤, 나 엄청 약해져 있었을 때. 넌 정말이지… 엄청…”
“엄청?”
“기댈… 수 있었거드은… 그거, 반하지 말라는 것도 무리 아니야?”
자넷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그날 해준 위로가 꽤 마음을 울렸나 보다.
“내게 있어서 너는 정말 특별해. 아니, 넌 원래 특별하기는 했지. 그래서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걸까?”
“…말해 줬네요.”
“히,힘들겠지만, 앞으로는 티를 좀 내볼게. 그… 솔직히 나도 원하지 않는 건 아니고…?”
나와의 스킨십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큼… 그럼, 이제부터 나도 노력하겠다는 증명으로…”
스윽.
“…단장?”
“쉿.”
자넷이 내 목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당황해서 목에 힘을 줘버렸으나, 내가 내려오지 않자 자넷이 발끝을 들어 올려 스스로 높이를 맞추었다.
오래전 맞추었던 입술이, 다시 한번 맞닿았다.
“…헷. 취하지 않은 채 하는 키스는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 더 선명하네.”
짧은 시간.
입술을 뗀 자넷은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내게 그런 감상을 남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