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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72) (272/310)

〈 272화 〉 지구

* * *

“…커.”

“우와… 이,이런 비슷한 걸 본 적은 있는데, 많이 다르네요!”

“내가 용병질 하며 먹어본 건 빵 반죽 위에 토핑이 이렇게 무식하게 올라가 있지는 않던데…”

확실히 그녀들의 세계에서도 피자 비슷한 음식은 있었다.

넓게 핀 반죽 위에 치즈와 다진 고기를 올려서 굽는.

하지만 그건 피자라기보다는…

층이 한 개만 있는 라자냐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한국의 피자처럼 바닥의 빵 반죽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무언가가 마구 올려져 있지는 않았다.

“다들 손부터 씻고 와. 외출복도 내복으로 갈아입고. 크리스? 내가 상 차리고 있을 테니까 쟤들 화장실로 안내 좀 해줄래?”

“들었지? 따라와. 문명의 힘을 보여줄게!”

­ 저벅저벅.

곧이어 화장실 방향에서 작게 소란이 일었다.

사용법 설명은 크리스에게 맡기도록 하자.

나는 안젤리와 함께 앞접시를 날랐다.

일단 파인애플 피자는 내가 가지고 갔다.

다른 피자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두 조각 이상 먹을 수 있는 건 파인애플 피자로 한정된다.

무엇보다 파인애플 피자라는 것이 호불호가 극도로 갈리는 피자이기도 하고.

그때.

손이 깔끔해진 자넷과 멜이 자리로 돌아왔다.

크리스와 데이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저 멀리서 크리스의 목소리가 알려주었다.

“찬영! 아이용 옷은 사놓지 않아서 맞는 것이 없더라! 어떻게 할까?”

“데이지? 아. 그럼 임시로 아무 옷이나 빌려줘!”

맞는 옷이 없던 데이지는 내 실내복을 빌려 입었다.

데이지는 무언가 불만에 찬 듯 뾰로통했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꽤 귀여웠다.

“왜 나만 이런…”

“그래도 나보다 어울리는데?”

“어? 이거 네 옷이야?”

“…깨끗이 빨았거든?”

“……그렇다면야 뭐…”

멜과 자넷은 화장실에서 본 것들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면 지금보다 놀랄 일이 수십 배나 많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의 어깨를 잡고 하나씩 의자에 앉혔다.

“…의자조차 푹신해… 이건 정말 왕족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 같은데…? 파계승아. 너 혹시 이 세계에서 귀족 비슷한 거냐?”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이렇게 삽니다. 쉽지 않겠지만, 익숙해져 보세요.”

“그렇게 말해도… 음… …딱 하나는 알겠다. 왼쪽을 둘러봐도, 오른쪽을 둘러봐도… 전부 돈 냄새가 오지게 난다는 것.”

자넷의 육감은 다른 차원에서도 발동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TV, 책상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향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검은색의 금속과 다름없어 보이는데도.

나는 자넷의 앞에서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비싸 보여요?”

“응? 아… 단순한 감인데, 뭔가 비싸 보이는 느낌?”

“그럼… 이 리모컨하고 핸드폰 중 하나만 드린다고 한다면 뭘 선택하고 싶으세요?”

“너 설마 그거 주려고? 나 줘도 그게 뭔지 모른다?”

“하하하. 아쉽지만 안 줄 겁니다. 제게도 필요한 것들이라서요. 그냥 재미 삼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나는 주머니에서 주먹보다 작은 리모컨을 한 개 꺼내어 자넷에게 보여주었다.

자넷은 내 왼손에 들린 핸드폰과 오른손에 들린 조그마한 리모컨을 한 번씩 쳐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약간의 기대를 담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답을 맞춘다면, 『이지선다』 특성이 지구에서도 발동이 된다는 이야기니까.

“…이거?”

자넷은 물건이 쥐어진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오른손, 리모컨이 들린 손이었다.

선택에 후회는 없어 보였다.

근거는 없으나, 확신이 섰다는 뜻이다.

정답이었다.

이건 그냥 리모컨이 아니라…

내가 얼마 전에 뽑은 차의 리모컨 키니까.

물론 차 키의 기곗값만 따지자면 핸드폰보다 가격이 낮다.

그럼에도 자넷은 망설임 없이 리모컨 키를 선택했다.

자동차의 열쇠를 받는다는 건, 그 자동차의 소유권까지 넘긴다는 감춰진 뜻까지 특성이 감지해냈다는 뜻이다.

“오. 잘했어요.”

­ 스윽. 슥.

칭찬 삼아 자넷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수치가 섞인 비명을 지르며 내게 도망쳤지만.

“파계승…!! 너,너 뭐 하는 거야?!”

“뭐냐니, 찬영이 좋아하는 스킨십이야.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걸?”

“앗? 아, 어어…”

“풋. 나중에 가서는 해달라고 조를 거면서 내숭은? 찬영. 피자 식겠다.”

크리스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리며 자넷에게 혀를 작게 내밀었다.

내 스킨십에 익숙해지길 넘어 즐기기까지 하는 자의 여유였다.

평소에는 이런 스킨십을 남에게 보여주길 엄청나게 부끄러워했으면서…

위기를 느꼈는지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나 보다.

…어쩐지 이런 우리를 데이지가 수상하단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데이지는 이곳의 여성 진들이 자신 빼고 전부 내 연인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모르지?

나를 얼마나 쓰레기같이 볼지 살짝 두려워졌다.

당장 이 이야기를 데이지에게 해주기에는…

크리스의 말대로 피자가 식고 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피자부터 나눠주기로 했다.

“너희들은 거기 있는 거 먼저 먹어. 그 피자들이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메이저한 피자니까.”

파인애플 피자는 나의 것.

나머지 두 판의 피자는 여성진 다섯의 몫이 되었다.

각각 불고기와 페퍼로니 피자였다.

나는 피자 한 조각을 손으로 들어 올린 뒤,

직접 먹으며 어떻게 먹는 건지 예시를 보여주었다.

머뭇거리던 그들이 하나둘 피자에 손을 대며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반응?

역시 대표적인 야식 중 하나인 피자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맛있다는 감상이 떠들썩하게 퍼졌다.

물론, 데이지만 제외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이거 인기 많아?”

“응. 엄청 유명하고, 인기도 많지. 세상엔 피자 때문에 살이 찌는 사람도 한둘이 아닐걸?”

“그럼 조금만 먹어도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야?”

“어… 따지고 보면…? 그런 의미가 되기도 하지…”

“효율적이네. 어째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아.”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에 납득하는 듯했다.

사실 피자가 인기 많은 이유는 맛 하나 때문이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데이지에게 해명을 하기엔 조금 마음이 아팠다.

“넌 왜 따로 먹어? 네가 먹는 건 저거랑 다른 거야?”

“아. 이 피자는 저것들과 달리 호불호가 좀 갈려서… 뭐, 내 입맛에는 딱 맞지만. 한 개 먹어 볼래?”

“맛은 못 느끼겠지만… 궁금하네.”

데이지는 내게서 피자 한 조각을 받아 가 먹었다.

딱 좋게 구워진 파인애플이 촘촘히 박힌 피자를.

“어때?”

“어떠냐고 물어도…”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이었다.

오래전 파인애플 피자를 먹었을 때, 안젤리와 크리스는 질색했거든.

그때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란…

“…왠지 기뻐 보이네.”

“이 오묘한 맛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그래서 항상 혼자 먹어야 했어서.”

“그래? 흐응… 뭐, 가끔은 같이 먹어줄게.”

데이지는 어쩐지 기쁜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만족스럽게 웃으며 데이지의 머리를 쓸려고 했으나, 손에 피자 기름이 묻어버려서 생각으로만 그쳤다.

오늘 나는 파인애플 피자 동지를 한 명 획득했다.

자넷과 멜이 화기애애한 나와 데이지를 보곤 관심을 보였다.

초점은 내 손에 들린 피자에 맞춰져 있었다.

“오오. 그건 또 다른 맛이야? 그것도 엄청 맛있으려나?”

“앗! 찬영님! 저도 궁금해요! 한 조각만…”

“먹지 마.”

“추천하지 않아요.”

허나 크리스와 안젤리가 그 둘을 말렸다.

분명 파인애플 피자에 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억울했다.

당장의 나는 이 피자를 맛있게 먹고 있었으니까.

“…말릴 필요까지 있어? 맛 정도는 볼 수 있잖아! 의외로 입에 맞을 수도 있고. 그래! 데이지처럼!”

“나, 찬영을 엄청 좋아하지만… 피자에 파인애플은 아닌 것 같아…”

“찬영? 음식으로 장난치면 천국에 못 간다?”

안젤리는 진지한 말투로 나를 혼냈다.

그것이 더 상처였다.

맛있는데…

내가 시무룩해져 있을 때.

자넷과 멜은 긴장한 눈으로 파인애플 피자를 한 조각씩 받아 갔다.

한입.

조그마한 입이 벌어지며, 파인애플이 올라간 부분까지 베어 물었다.

“둘 다 어때? 의외로 맛있지 않아? 그렇지?”

­ 오물오물…

“……이 새콤한 것… 과일… 인가요?”

“치즈 위에 과일을 왜…?”

“어어… 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제 입맛에는 이 불고기? 피자 쪽이 더 맞네요.”

“뭐라고 멜? 너,너는 이거 이상하지 않아?”

“단장님? 이거, 먹을 만은 하지 않나요? 전 고기나 햄 피자 쪽이 더 좋지만…”

자넷은 크리스의 경우와 같이 취향과 완전히 동떨어진 듯했고,

멜은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나마 미각이 뛰어난 건 멜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자넷 단장. 그렇게 별로인가요?”

“으,으음… 과일의 맛이 너무 강해서 치즈의 풍미가 하나도 안 느껴져서? 차라리 이 노란 거 빼고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런 느끼함을 잡아주는 게 좋은 건데…”

“…난 그냥 이 고기 피자 먹을게…”

“저,저도요. 헤헤…”

자넷이 어색하게 웃으며 페페로니 피자 쪽으로 손을 옮겼다.

멜도 굳이 파인애플 피자를 찾아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역시 난 너밖에 없다… 데이지…”

“뭐,뭐라는 거야. 고작 음식 가지고…”

멜. 자넷. 데이지.

차원적인 의미로, 세 사람은 고향이 같지만…

그렇다고 서로에 대해서 깊은 곳까지 아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면서 잡담을 시작했다.

“멜씨… 여자였어?”

“데,데이지는 저보다 나이가 많았다고요?!”

적당히 안면이 있던 둘은 서로가 숨기던 비밀에 놀라워했고,

“네에?!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니요?”

“세상에… 궁금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는 않을게.”

“하물며 음식의 맛까지 못 느낀다니…”

“…확실히. 그 이상한 피자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먹는 게 의아하긴 했었지…”

현재 데이지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당연히 상세한 과거 이야기는 빼놓고.

“…찬영이 소아 성애자가 아닌 게 다행이라 해야 하려나…”

크리스는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으며,

“무,뭐어?! 나,나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저 호구한테 연인이 여럿 있다고?!”

“…저는 당연히 데이지도 찬영님의 연인인 줄 알았는데요?… 저희랑 같이 오길래…”

“그,그,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럴, 그럴 리가 없잖아!!”

크리스뿐만이 아니라, 멜과 자넷이 내 연인이란 것도 밝혀졌다.

마지막으로 안젤리.

그녀가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진실을 밝혔다.

“헤헤헤. 사실 저도 찬영의… 이거랍니다! 잘 부탁해요!”

“콜록! 콜록! …뭐?”

“천사님도요?!”

“세상에… 신의 사자를 꼬시다니…”

“와,와아… 이쯤 오면 찬영님이 대단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자넷과 멜이 경외가 깃든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둘 없는 쓰레기를 보던 눈에서, 전설적인 카사노바를 보는 눈으로 변했다.

…좋은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 툭툭.

내 옆구리를 건드리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눈빛의 데이지가 나를 향해 작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말할 게 있으니, 귀를 빌려달라는 뜻이다.

“응? 왜 그래?”

“이 황당한 놈아…! 설마 싶어 물어보는데… 나 빼고 다 너랑 그렇고 그런 관계야?…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라.”

“어… 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 개…!!”

졸지에 커플들 사이에 끼어버린 데이지가 눈에 불을 켰다.

물론 결국에는 용서받았다.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내 집에 데려 와버렸는데.

“…이렇게 대놓고 여러 여자를 만나는 건 온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뭘. 내 감정에 솔직해진 거지.”

“내가 봤을 때, 넌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어…”

데이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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