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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71) (271/310)

〈 271화 〉 지구

* * *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데이지는 조금 들떠 있었다.

세상 구경을 해본 적이라곤 평생 없었다.

볼거리가 많은 수도도 여러 이유가 뒤섞여 구경은 꿈도 못 꿨고.

그렇기에 지난 왕위 계승식의 축제에서도 들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데이지는 스스로를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 여겼고, 이는 반쯤 진실이었다.

학자의 삶은 운동을 비롯한 아웃도어 취미에서 거리가 멀었으니까.

실은, 여행 자체를 싫어하는 것과는 달랐다.

여행을 하게 된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잡아 먹히게 되지 않은가?

뿐만이 아니라 연금술을 하고 싶어져도 할 수 없게 된다.

재료도, 장소도, 도구도 없으니.

데이지는 이것이 싫었을 뿐이다.

여행 도중에 갑작스러운 영감이 떠오르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발만 동동 구르는 것밖에 없다.

학자답게 호기심이 많은 데이지로써는 무척이나 괴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에 그녀의 하나 있는 친구와 떠나게 된 여행은 이렇다 할 단점이 없었다.

하나같이 크고 무겁기 그지없는 연금 도구들은 그의 신비한 능력으로 인해 전부 챙겼고,

각각의 보관법이 전부 다른 연금 재료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사실상 움직이는 연금 공방이라 봐도 좋으리라.

‘장소는 뭐… 이리저리 떠도는 용병인 이상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만한 기회는 없었다.

길게는 몇 달을 참아야 하는 것에서, 적당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만 인내하면 되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약간 들뜬 데이지는…

용병들이 있는 여관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한번 하며 얼굴에 평정을 덧씌웠다.

만약에 들뜬 티를 내면 그녀의 짓궂은 친구가 놀려먹을 게 뻔했으니까.

데이지는 딱딱하게 굳은 자신의 양 볼을 이리저리 만져보곤 만족했다.

어지간해선 이 표정이 깨질 리는 없으리라.

이러한 데이지의 자신감은…

고작 몇 분 만에 박살 나게 되었다.

*

“…바,방금? 여긴 어디… 어라?”

안 그래도 큼지막한 데이지의 눈이 한층 더 커다랗게 커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평소의 낯을 가리는 소녀 연기를 할 정신도 없는지,

본래 내가 익숙하던 데이지의 표정과 말투가 새어 나왔다.

­ 스윽.

데이지가 불안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내게 가까이 왔다.

표정을 보니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기댈 수 있는 내게 다가온 걸까?

뿐만이 아니라 은근슬쩍 나의 옷자락을 쥐기까지 했다.

…많이 당황스럽나 보네.

자넷이나 멜도 다르지 않았다.

입을 작게 벌린 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의심하는 듯했다.

“차,찬영님?! 이,이거!! 으아악! 안돼! 여러분! 아무거나 함부로 움직이면 안돼요오!!”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

비슷한 경험을 지하 유적에서 겪어 본 멜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딱 굳혔다.

약간 눈물까지 맺힌 것이,

아무래도 주의 없이 주변을 조사하다 골렘을 깨운 그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물론 내 집에 방비용 자동 액체 골렘 같은 험한 물건은 없다.

슬슬 이들을 진정시키려던 때.

“킥킥킥! 상상한 그대로의 표정이네!”

­ 찰칵. 찰칵.

크리스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카메라에는 분명 멜과 자넷, 데이지의 당황한 표정이 전부 담겨있겠지?

…나도 나중에 좀 보여달라고 하자.

지금 얘들 표정, 이대로 기억으로만 남기기엔 좀 아깝긴 하다.

“얘들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설명을 해주자.

그리 마음을 먹고 그들에게 말을 꺼내던 중, 세 명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해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는…

방금보다 훨씬 경악에 찬 얼굴들이었다.

도대체 무얼 봤기에 저런 얼굴을 할까.

나 역시 뒤를 돌아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복도 사이에서 안젤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새하얀 날개를 아름답게 펄럭이고,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강렬하게 빛무리를 뿌리는 고리를 머리 위에 띄운 채.

발바닥이 바닥에 닿지 않았기에 느긋이 움직이는 저 날개가 장식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신의 사자,

혹은 성스러운 천사로 보이는 광경이었다.

­ 꿀꺽…

초대받은 세 명은 멍하니 침을 삼켰다.

천사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안젤리보고 모습을 숨겨달라 부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안젤리의 소개는 뒤로 미루려던 것이 내 원래의 계획이었다.

정확히는, 세명에게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준 뒤에.

그러나 안젤리는 이미 모습을 드러낸 뒤다.

존재감이 엄청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 세명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아. 혹시 안젤리가 나 대신 설명을 해주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올 이유는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듯, 안젤리는 우리 앞에 다가와 양손을 부드럽게 펼쳤다.

무척이나 자애로운 표정으로.

“반가워요. 여러분. 저는 안젤리라고 합니다.”

“천…사?”

“예. 맞습니다. ”

평소의 밝음 100%인 그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정중하다.

아무래도 첫인상을 좋게 가져가고 싶나 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찰나.

안젤리의 얼굴에 평소의 장난기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방금 본 표정이 착각이었는지를 의심하고 있을 때.

멜이 용기를 내어 안젤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천사님? 이곳은 어디인가요? 저희는 방금까지 수도의 여관에 있었는데…”

“순백 머리를 한 여성이여. 이곳이 어딘지 물어보셨나요?”

“네,네에… 그,그냥 궁금해서…”

“후후… 알려드리지요. …이곳은 사후 세계, 당신들은 죽었습니다.”

“사,사,사,사후 세계?!”

안젤리를 제외한 전원이 깜짝 놀랐다.

세 명 뿐만이 아니라, 나와 크리스도 놀랐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삶이란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이젠 윤회의 고리에…아앗!”

­ 딱.

“안젤리. 장난치지 마.”

“아으! 아,아프잖아… 찬영…”

안젤리가 이마를 붙잡고 앓았다.

힘을 거의 안 줬는데 엄살 부리기는.

사후 세계?

진짜 천사가 그런 말을 하면 농담으로 안 들린다.

당장 저 세 명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푸흐흡…!! 큭큭큭…!”

크리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안젤리의 머리를 사정없이 헤집으며.

“아앗! 머리, 머리 망가져 찬영!!”

“…얘 말은 농담이니까 흘려듣고… 다들 어서 와. 여긴 내 집이야.”

“자,장난 한번 해본 거야! 다들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같길래…!”

너 때문에 더 딱딱하게 굳어졌잖아…

빠르게 해명을 해봤지만, 세 명의 오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찬영님의 집은 천국에 있는 건가요??”

“설마! 파계승 너 천사 비슷한 거였어?!”

“쟤가? 하핫! 그럴 리가 없잖…없… ……어라? 그러고 보면… 어,어쩐지 좀 과하게 호구… 앗! 아니, 착하곤 했고…”

“데,데이지? 말투는 왜 그러신 건가요?!”

“……아.”

항상 고요함이 지배하던 집 안이 금방 소란에 찼다.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도 좋아하는 것도 이유인데…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소중한 이들이란 것이 가장 큰 원인을 차지했다.

결국 혼란이 가라앉은 건 10분이 흘러서였다.

안젤리에게 구름나무 차를 한 잔씩 받은 우리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우선 신발부터 벗어줄래? 내 고향에선 집에서 신발을 안 신 거든.”

“네? 아! 그,그러네요.”

세 명은 나와 크리스의 발을 보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다들 발을 꼼지락거리면서 뒤로 숨기는 것이,

맨발이 드러난 것이 익숙지 않나보다.

“…파계승 너 벼,변태야? 왜 그리 뻔히 봐!”

“이제 와서? 그것보다 더한 것도… 음… 아닙니다.”

“그래. 잘했어. 한마디 더 했다면 후회했을 거야.”

슬리퍼나 샌들 비스름한 것도 신는 세상이면서 왜 저리 부끄러워할까.

참고로 데이지는 우리가 떠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차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시면 머리가 이상하게 맑아지는 것이 신기하나 보다.

­ 툭툭.

“…야. 이거 무슨 맛이야?”

“음… 굳이 따지자면, 맛보다는 향이 강한 종류의 차야.”

“원료가 궁금한데… 혀랑 코가 맛이 가서 유추하기도 힘드네. 이럴 땐 좀 불편하단 말이야?”

원료를 말해줘도 분명 모를 것이다.

‘구름나무’는 그녀의 세상이 있던 것이 아니니까.

물론 데이지가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이 장소가 특이하다고는 생각하는 듯했지만, 정말로 다른 세상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였기에.

지금 이곳이 다른 차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서두를 어떻게 던져야 할까?

음…

크리스의 경우는 현대인으로서 평행세계에 관한 개념은 알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들은 지구와 단 하나의 접점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것 같으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 세상은 다른 차원이야. 그리다니아 왕국이 있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지.”

“…네?”

“창밖을 볼래?”

­ 촤악!

나는 커튼을 열어 지구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값비싼 노른자 땅 중심에 선집이라 그런 걸까?

왕성보다 높은 건물 수십 채가 탁 트여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녀들의 세계에도 동양 대륙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곤 하지만…

이 정도의 문명 차이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믿는 것에 도움을 줄 것이다.

“킥킥. 마법이 없는 세계에 온 걸 환영해. 판타지의 주민분들.”

크리스가 자넷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넷은 창밖을 구경하느라 반응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 데이지조차 유리창에 붙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푸핫. 침 떨어지겠네.’

다들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도, 높게 올려진 고층 아파트들도, 마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것이니.

그녀들에게 간단히 내 능력과, 나의 고향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마법 대신 과학이 발전한 세계. 지구.

나는 다른 차원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얻었으며, 이는 지구에서 사실상 나밖에 없는 특별한 능력이다.

데이지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저쪽 세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고는 경악에 찼다.

‘차원 이동’보다 ‘시간 정지’ 쪽이 더 놀라웠나 보다.

아.

지구 역시 그녀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천사’라는 존재는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포함했다.

혹시 이 세계에 천사가 널려 있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니까.

“……고,공방을 떠날 때 색다른 경험을 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건 상상 못 했는데……”

“꽤 편리할걸? 따뜻한 물도 마음껏 쓸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원할 때 먹을 수 있고… 나머지는 직접 경험해 보자.”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

“환상 아니다? 대신 볼이라도 꼬집어 줘?”

“익! 손 저리 안 치워?”

데이지가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이미 데이지의 볼을 한번 꼬집고 도망간 뒤였다.

말랑말랑하네.

“그… 파계승아? 그냥 묻는 건데, 돌아갈 수는 있는 거지?”

“당연하죠. 언제든 제게 말씀하세요. 이곳은… 그러니까, 남들 몰래 쉴 수 있는 쉼터라고 생각해 주면 편할 것 같아요.”

“쉼터치고는… 너무 과,과분한데? 이런 게 나한테 필요할까…”

필요하냐고?

당연히 필요하지.

하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자넷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줄여 말했다.

“저쪽에서는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엔 힘들잖아요? 다들 지켜보고 있고.”

“……앗! 너,너!”

내가 능글맞게 그리 말하자, 자넷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보니 만족스럽다.

“각자 개인방도 준비해 놨어요. 구경 가실래요?”

그렇게 조금 색다른 집들이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딱 좋은 타이밍이다.

다른 세계의 문화를 알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음식이니까.

“이곳에서 저녁이나 먹죠. 다들 쌀에는 익숙지 않을 테니… 피자가 적당하려나?”

“찬영님? 피자가… 뭔가요?”

“엄청 살찌고, 엄청 맛있는 음식.”

“헉…!”

결국 저녁은 피자로 결정했다.

배달 음식이란 문화도 경험시켜줄 겸.

나 혼자 먹었다면 전부 파인애플 토핑을 추가시켰겠지만…

오늘은 다 같이 먹는 것이기에,

총 세 판 중 한판만 토핑을 추가하기로 했다.

‘파인애플 피자는 못 참지!’

주변에 항상 말하고 다녔지만, 나는 느끼하고 기름진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당연히 치즈 범벅인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허나…

파인애플을 토핑하게 되면, 치즈의 느끼함이 전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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