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Epilogue)
* * *
『쾌락 감지』는 자동 발동과는 조금 달랐다.
마주친 사람의 욕구를 무조건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짧은 시간 동안 유심히 살펴야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의 욕망을 알 수 있는 능력.
지탄받을 일이란 건 알지만, 쓸 때마다 꽤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마치 모든 이들이 끙끙 앓는 어려운 시험에서 나 홀로 정답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연습이라는 핑계 하에 마구마구 써본 결과.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개를 알게 되었다.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완전히 같은 욕구를 지닌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백이면 백 사람 전부 결이 다르곤 했다.
예를 들어…
멜의 ‘피소유욕’과 리 샤오린의 ‘피지배욕’은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인다.
둘 모두 상대방이 주도적으로 나오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허나 좀 더 깊이 파고들면 확실히 차이점이 보였다.
멜의 경우는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되, 소중히 다뤄지는 상황을 좋아했다.
오래전. 그러니까 비밀 실험실에서 액체 골렘을 상대했을 때.
나는 그녀의 몸을 취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상황에 이끌려 하지 말자며 거절하지 않았는가?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때가 바로 멜의 가슴을 흔드는 대표적인 상황이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보다, 마음을 포함한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 됐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이후로 멜이 우리 관계를 한층 더 진지하게 생각해 준 것 같네? 그 결론이 나와의 이별을 준비한다는 발칙한 발상이었지만.’
리 샤오린의 경우는 내 능력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걸 좋아했다.
평소에는 자신이 직접 권력을 쟁취하려 하는 그녀지만…
자신보다 내 무력이 강한 걸 확인할 때면 수줍은 소녀가 됐고,
자신보다 내 명성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걸 느낄 때면 눈에 욕정 비스름한 뜨거운 무언가가 깃들었다.
물질적인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강자에게 다뤄지는 상황을 바란다고 봐야 옳으리라.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는 건가 봐.”
“그야… 끄응. 그렇지! 사람의 성향은… 으샤! 가정환경, 유전자, 자주 어울리는 벗, 교육 등등… 너무나 많은 곳에서 영향을… 받으니까!”
“오. 잘 아네?”
“히히히. 찬영? 이건 어디에다 둘까?”
“그건 내가 옮길게. 거기다 둬.”
“…내가 찬영보다 힘 셀 텐데?”
“그래도 너한테 무거운 걸 전부 맡길 수는 없잖아?”
나는 장정 두 명이 힘을 써야 옮길 수 있을 무게의 책상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인테리어용 원목 책상이라서 그런지 무척 무거웠다.
그래 봐야 나와 안젤리에겐 기합도 필요 없이 들 수 있을 수준이지만.
“끄응! 흐읍!”
“…안젤리, 너 나보다 훨씬 강하지?”
“응? 당연하지! 난 엄청 강한걸!”
안젤리가 팔뚝을 과시하듯 들어 올리고, 반대쪽 손을 어깨에 얹어 조금 귀여운 포즈를 만들어냈다.
자세 자체는 완벽한 파이팅 포즈였다.
표정도 자신만만한 것이 몸짓과 퍽 어울렸고.
약간의 오류라면, 실제 안젤리의 근력에 비해 너무나 여리여리한 팔뚝을 꼽을 수 있었다.
“뭐야. 그럼 왜 끙끙대? 난 기합을 낼 정도로 힘들진 않던데, 넌 나보다 강하면서.”
“……그냥 버릇?”
“버릇이라니…”
“하,하지만 기합을 뱉으면 정말 힘이 조금 더 나는걸! 다른 이유는 없었어! 저,정말이야!”
후다닥!
안젤리는 그리 말하면서 도망치듯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 힘겹게 들어 올렸냐는 듯, 조약돌 들어 올리듯 한 손으로 가볍게 침대 프레임을 들어 올리면서.
이번에는 끙끙 앓던 소리는 없었다.
‘…설마 연약한 척을 한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연약한 척을 하기에는 늦었다.
안젤리가 발키리 지망생이란 건 내가 알고, 그녀가 알고, 세상이 알지 않던가?
하지만 수치로 인해 붉어진 안젤리의 귓등을 보면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듯했다.
아무튼 나와 안젤리는 곧 있을 새로운 입주민들을 위해 개인 방을 꾸미고 있었다.
방 청소는 평소에 안젤리가 꼼꼼해 해뒀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당장은 가구를 배치하는 중이다.
사실…
안젤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 없이,
인벤토리와 아공간 스킬을 써 옮기면 너무나 간단히 끝나지만…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돕고 싶다 어필하는 안젤리를 보곤, 내 능력을 까먹은 척하기로 했다.
실제로 그녀는 나를 도우며 내심 기뻐하는 듯했고.
크리스?
여자 세 명을 위한 옷과 속옷, 그리고… …소모품을 사러 갔다.
내가 사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무래도 어색한 건 어색한 것이다.
그런 만큼 밖 멀리까지 심부름을 하러 다녀와 준 크리스가 고마웠다.
“이게 마지막이지? 슬슬 다 끝났나?”
“응! 그게 마지막이야!”
“그 많던 빈방이 이렇게 채워질 줄이야… 쓸데없이 넓어서 청소하기 힘든 집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쓰이네.”
“……그러네. 찬영. 나도 ‘이런 식’으로 방이 채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콜록.”
말에 뼈가 있다는 건 이런 것일까?
양심에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안젤리는 가구 배치를 돕게 되며 자연스럽게 누가 방의 주인이 될지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 또 다른 연인이란 것도.
천성이 천사인 안젤리기에 싫어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말을 골랐다.
“안젤리. 그냥 묻는 건데… 너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있어?”
“아,아,아이?! 나와 찬영의 아이?! 꺄!”
“잠깐! 당장 만들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가능한지 궁금해서. 알다시피 우리는 종족이 다르잖아?”
뜬금없이 이런 걸 물은 것은 아니다.
당혹스런 질문에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이는 이 귀여운 천사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쾌락 감지』 특성은 발동 대상이 인간에 한정하지 않았기에.
짐승이나 몬스터에겐 발동이 되지 않는 것을 보니 모든 생물에게 통하는 것은 아닌 듯한데,
인간이 아닌 천사에게도 특성이 발동되었다.
그렇게 알아낸 안젤리의 욕망은 바로 ‘모성’.
모성하면 가장 먼저 연상 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전에 듣기로는 생기기 무척 힘들다고 했지? 그래서… 우리가 할 때면 그, 피임기구 없이 하기도 했고.”
“엄청, 엄청 어려워. 100쌍의 연인이 있다 했을 때, 그중 아이를 가지는 건 2~3쌍이 고작?”
“그럼 가능성이 있었던 거야?”
“……있냐 없냐로 따지면… …있어. 인간과 연애를 하신 선대 발키리들 중 몇몇은 혈연이 있으니까.”
“혹시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어쩌려 했어?…”
“좋은…거라고 생각해.”
안젤리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이라 말하는 것 치고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래.
기적의 확률을 뚫고 2세가 생기다니, 확실히 경사는 맞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나는 당연히 생기지 않는 줄 알고 여태 피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조금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육아라는 벽을 맞닥뜨리기엔, 아직 나는 부족한 것이 많으니까.
“…나 역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닌데, 만약 네가 임신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주변 사람이라면?”
“아기 천사라든지, 아니면 네 직장 상사라든지. 물론 다들 우리를 축복해 줄 거야. 하지만…”
그녀의 후배는 알게 된다.
이미 연인이 있던 나와 사랑에 빠진 안젤리를.
평소 그녀가 피하고 싶어 했던 상황이다.
“후배…”
“너도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
“…응. 사실 나도 알아. 그런 상상, 많이 해봤거든.”
“역시 너라면 그렇겠지.”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지게 되면 내 꿈에서 20년은 멀어질걸?”
“꿈이라면… 발키리?”
“맞아. 뱃속에 생명을 품은 채로, 또는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를 둔 채로 전장에 나설 순 없으니까.”
“……”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어.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말하는 걸 여태 미뤄서 미안해…”
방금 보았던 애매한 미소가 다시 한번 떠오른다.
어째서 그녀가 임신에 대해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지만,
피임은 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만약 확률을 뚫고 아이가 생기면… 이건 운명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려고 했구나?”
“…응. 찬영과의 아이와 내 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너무, 너무 힘들잖아 그건…”
선택을 운명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평생동안 매일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아이가 들어설 확률은 고작 2%가량.
고작 몇십 번의 질내사정 가지고 임신을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리라.
“나와 행복하고 싶어서 꿈을 포기하려 한 거야?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그보다 더 기쁘네.”
“…나 찬영을 속인 거나 다름없는데… 혼내지 않아? 아이에 관한 것, 찬영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혼내는 건 나중에 하려고. 너 여태 마음고생 한 게 뻔히 보이니까… 당장은 좀 위로해 주고 싶어서.”
“……뭐야 그게…”
멜. 크리스. 자넷. 데이지. 다연이. 안젤리까지.
내 주변 여자들은 다 각자의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은 내게 의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참 자립심 강한 여자들이다.
이렇게 보면 내 취향도 조금은 일관되어 있다고 봐도 좋으려나?
툭.
우물쭈물하는 안젤리를 끌어당겨 내 품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강아지를 달래듯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쓴 안젤리를 위로하는 것이다.
“…이 바람둥이… 잘못한 사람에게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나 울리려고 그러는 거야?”
“안젤리 너도 알다시피, 내가 모두한테 이러는 건 아니야.”
“이,이 바람둥이…!!”
안젤리가 부끄러워하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말해놓고 오글거리네.
그러나 가끔은 이런 말이 필요한 때가 있다.
상대의 멘탈이 많이 약해져 있어, 직설적인 표현을 듣고 싶어 한다든지.
하지만 직설적인 건 나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나 있잖아. 찬영을 엄청 좋아해. 가끔은, 꿈을 미뤄두고 찬영과 이대로 지내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 솔직하네? 좀 쑥스럽게.”
“하지만, 표현을 안 하면 전해지지 않잖아?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 부끄럽다고 숨기고, 솔직하지 못해서 오해가 쌓이고… 나 그런 건 싫어.”
안젤리가 올곧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품에서 행복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 안젤리의 연애 방식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편이 되어준다, 이것이 그녀가 가진 ‘모성’ 욕망의 표현이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변하지 않으니까…’
조용히 품에 안긴 안젤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수줍게 턱을 들며 내 입술을 받아주었다.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가능한 즐길 생각이다.
정확히는 크리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쪽.
*
“파계승?… 나 우리들 중 제일 바쁜 사람인데…”
“저… 찬영님? 저희 오늘 출발하는 거 아닌가요?”
“……”
세 쌍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짐을 점검하다 내게 끌려온 자넷.
어리둥절한 멜.
아직까지는 열심히 낯을 가리는 소녀를 연기하는 데이지까지.
전부 내가 불러 모았다.
“이제부터 좀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맞아. 엄청, 엄청 진귀한 경험이지. 응. 킥킥.”
옆에서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실실 웃는 것이, 자신이 최초로 차원 이동을 겪었던 때가 떠올랐나 보다.
실제로 크리스는 카메라까지 준비해 놨다.
저들의 놀라 자빠진 얼굴의 사진을 찍어 남기려고.
“단장. 단장은 이곳과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 있어요?”
“어… 저기 바다 건너 동양의 땅을 말하는 거야? 파계승 너같이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사는.”
“하하하. 조금 비슷하긴 한데, 다르기도 하네요.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거든요.”
이들에게 백번 설명해 준다고 한들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한번 보여주도록 하자.
나는 시스템 창을 꺼내서, 미리 레벨을 올려둔 ‘파티원 지정’ 창을 꺼냈다.
띠링!
=
[파티원 지정] Lv 4
* 선택 가능한 소설
1. 테라포밍
2. 하얀 고래의 발자취
3.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파티원 목록
크리스 베넷
멜
데이지
자넷
선택 가능한 횟수 0회
=
“다름이 아니라… 잠깐, 제 고향을 소개시켜 드리려고요.”
“고향? 여기서?”
“네.”
“…너 낮술했냐?”
파티원 지정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더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시스템 창의 지구로 귀환 버튼을 눌렀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