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69) (269/310)

〈 269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Epilogue)

* * *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번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네.”

“이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노는 날 다 끝났다고 울지는 마라.”

“킥킥. 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불편해. …그래서 요즘 슬럼프가 찾아왔던 걸까?”

목표가 생긴 데이지의 눈에는 활기가 돌았다.

멍하니 보내는 시간을 싫어한다, 나 역시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나는 앉아있던 의자로부터 일어섰다.

공방에 들른 목적도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 같으니…

슬슬 여관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 결과 나오면 이야기해 주고.”

“어? 뭐야, 가게?”

“응. 선물도 줬으니, 가야지. 슬슬 동료들한테 네가 합류한다는 이야기도 해야 하거든.”

“…아. 그러네. 마침 슬럼프에서도 벗어났겠다, 난 이 머릿속을 헤집는 지식이나 정리해봐야지.”

“나중에 봐.”

“선물, …고마워.”

“별말을.”

그렇게 작별 인사를 마치고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당혹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데이지의 목소리였다.

꽤 혼란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여태 모르던 지식을 습득한 상태지 않은가?

높은 확률로 평소의 상식과 편견을 깨부순 발상이 넘쳐날 것이다.

아마 그곳에서 오는 당혹이리라.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야. 잠깐. 가지 말아봐.”

데이지가 뒤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돌아본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잠깐 이쪽으로 다시 와봐.”

“왜? 할 이야기 있어?”

내 질문에도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손짓을 했다.

일단 그녀의 말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데이지가 나를 불렀다면, 부를만한 이유가 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약간의 긴장을 머금은 채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예를 들어 기억의 조각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왔어.”

“…다시 멀어져 봐. 저어기 문 앞까지. 나가지는 말고.”

“대체 뭐 하는…”

“습! 빨리!”

그렇게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데이지는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뒤로 가라 손짓했다.

나는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곤 다시 뒤로 발을 옮겼다.

내가 문 앞까지 도착했음에도 데이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턱을 짚은 채 깊게 고민에 잠겨 있었다.

“……거기 그대로 있어 봐.”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데이지는 이번엔 본인이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게 가까이 왔다가, 도로 멀어진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등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으며,

연금실로 들어가 아예 벽을 사이로 두기까지 했다.

나는 그제야 데이지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눈치챘다.

이건…

‘『구원받은 자』 특성의 부작용. 내게 멀어질수록 패널티를 받는 걸 체감 중인 걸까?’

방금 그녀 스스로 슬럼프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도 했었고…

아무래도 그 확률이 높아 보였다.

역시, 연금 공방과 여관의 사이는 너무 멀었나 보다.

데이지에게 약한 패널티가 찾아올 정도로.

‘떨어진 거리가 멀수록, 기간이 길어질수록… 슬럼프의 강도는 강해지겠지.’

지금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종국에는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될 것이다.

하물며 내가 오기 전까지의 데이지는 우울증의 초기 증상을 겪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공방 안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데이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해…… 이게 말이 되나?…”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데이지가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너랑 붙어있으면 머리가 엄청 맑아져, 데이지 성격에 이런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특성 패널티의 존재 자체는 알게 된 듯하다.

그리고 그 패널티를 피할 방법 또한.

“데이지. 일단 나랑 같이 여관에 가자. 소개도 해줄 겸.”

“나도? 아직 그쪽 사람들 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아?…”

“직접 얼굴을 보여주는 게 설득하기 좋지 않겠어? 너 일단 겉보기론 꽤 귀여운 아이고.”

“……전에는 내 도움 없어도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더니…”

데이지는 피식 웃으며 그리 말했다.

말은 저리했으나 기분 나쁜 제안은 아니었나 보다.

비록 밤이 찾아오면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렇게 우린 떨어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로 합의했다.

*

“…오빠와 여동생.”

“아니, 아빠와 딸!”

데이지와 함께 여관으로 가는 길.

지금의 그녀는 몸을 숨길 것 없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드문 검은 머리카락의 남녀 두 명이 길을 거닐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둘 다 꽤 반반하게 생기기도 한 탓도 있고.

“야. 아빠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왜? 드물긴 하지만 종종 있잖아. 엄청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사람들.”

“……너,너 실제론 나랑 나이가 비슷하면서 그러기 있어?”

“킥킥. 사실인 걸 뭐 어째?”

“보통 사람이 네 상황에 처했으면 어린애로 여겨지는 걸 싫어할 텐데… 넌 한치의 거리낌도 없냐.”

“이렇게 생겨먹은 거, 콤플렉스로 여기고는 매번 정색하며 화내면 추하잖아. 맞춰주기도 귀찮고.”

“추하다니… 콤플렉스까진 아니더라도, 꺼내기 불편한 화제는 될 것 같은데?”

“첫 만남 잊었어? 어린애같이 생긴 걸 이용해 소심한 소녀를 연기까지 했는데, 뭘 이제 와서.”

“아. 확실히 그건 그렇네.”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고, 둘 모두 봐줄 만한 외모를 가졌다.

그렇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 보면 혈연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잡담하는 주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다른 사람 눈에 어떤 관계로 보일까?

“오, 딸내미라고 걱정까지 해주는 거야? 멋진 아빠네! 킥킥.”

“아빠라니! 상식적으로 여동생과 오빠지! 너도 첫 만남에 말했잖아. 나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며?”

“그건… 그런데…”

“봐봐. 저쪽 사람들도 우리보고 남매라고 하잖아.”

“……저,저리 먼 거리에서 떠드는 대화가 들려?”

“귀가 좋거든.”

논리에 밀려 나를 놀리는 것에 실패한 데이지는 약간 불만에 찬 듯하다.

그럼.

내 나이가 몇인데, 데이지만 한 딸을 가지기엔 어려도 너무 어리지.

아무튼…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을 연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별것 아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와 데이지에게는 꽤 중요했다.

“흥. 네가 겉보기보다 훨씬 속이 늙었다는 걸 저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러지.”

“…나 속이 그렇게 늙었나?”

“네 주변 사람들은 다 그리 생각할걸?”

“…아하! 성숙하다는 말을 돌려 한 거지?”

“절대! 네가 워낙 장난을 좋아해야지? 어린애 같을 땐 한도 끝도 없이 어린애 같아.”

데이지의 반박에 할 말이 사라졌다.

찔리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네.

“큼… 좀 줄여봐?”

“……싫다는 건 아니야. 오히려… 중요할 땐 은근 믿음직스럽고… 또 평소처럼 대해주는 게… 나름?”

“뭐,뭐야. 어쩐 일로 칭찬을 다 하냐?…”

“음… 이 호구에게 받은 건 많은데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주자? 킥킥.”

데이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얘가 이토록 밝은 사람이었나?

내게 이런 농담까지 하게 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금방 여관의 앞에 도착했다.

내가 앞장서서 문 안쪽으로 들어갔고,

데이지는 내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따라 들어왔다.

­ 끼익.

“음. 왔나?”

“아. 부단장님.”

“단장님이 널 찾고 있던… …뒤에 있는 그 아이는…?”

커다란 덩치의 부단장이 나를 반겨줬다.

그리곤 내 뒤에 가려진 소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데이지는 몸을 내 등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용병단 내에서는 수줍은 소녀를 연기할 예정인가보다.

하긴…

데이지의 입장에선 그게 편하려나?

확실히 저런 성격을 연기하면 다른 용병들이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지구로 가게 되며, 크리스들에겐 본래의 성격을 밝히게 되겠지만.

“아. 이 아이는…”

“…서,설마 네 딸인가?”

“……”

풋.

내 뒤에 숨은 데이지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진동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설마 정말로 부녀 관계로 보일 줄이야…

나는 어이 없다는 눈을 하며 부단장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겠지? 네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인데, 어쩐지 너라면 그럴 것도 같아서…”

“딸 아닙니다. 혈연도 아니고요. 그냥… 제가 큰 은혜를 입은 아이죠.”

나는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한때 큰 부상을 입었던 다리다.

데이지가 내 다리를 고쳐줬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다른 용병들도 최소한의 납득은 할 테니.

“아…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했었군?”

“그게 이 아이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보실 수 있을걸요?”

“응? 그게 무슨 소리…”

“더 깊은 이야기는 단장님께 우선적으로 보고드리고 싶네요. 그러고 보면 단장님도 절 찾으셨다고 했죠? 어디 계세요?”

자넷을 설득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흔쾌히 데이지의 합류를 인정했다.

내가 부탁을 했단 것도 선뜻 수락을 한 이유 중 하나겠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본 데이지는 연인의 부상을 치료해 준 은인이니 호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 밖에 데이지와 조금 친했던 멜에게도 이야기해 주었고, 마지막으로는 크리스였는데…

“…얘가 그때 봤던 그 아이라고?”

“데이지라고 해. 나 다리 다쳤을 때, 병문안을 오면서 종종 봤지?”

“부,분명 그렇긴 한데…”

크리스는 데이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느낌이다.

“…뭔가 감이 이상해.”

“감?”

“응. 분명 전에 봤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래! 마치 운명이 바뀐 느낌?”

나는 크리스의 육감에 깜짝 놀랐다.

실제로 데이지의 운명은 크게 뒤틀렸으니까.

다름 아닌 내가 바꾼 것이다.

흥미로웠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걸, 크리스는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 육감에 대한 걸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졌다.

내가 얻어야 하는 직업을 얻는 것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첫 만남에는 데이지에게 어떤 감이 들었는데? 뭐가 어떻게 바뀐 거야?”

“음… 분명 이 애는 모든 남자에게 심각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더는 크리스의 감을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픈 과거를 겪으며,

남성을 전부 소아 성애자라고 의심할 정도로 거부감을 지녔지 않은가?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크리스는 곧바로 대답해 주는 대신에 고민에 잠겼다.

나를 슬쩍 흘겨보고, 데이지를 한번 쳐다보았다.

깊은 한숨 한번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안 알려 줄 거야.”

“뭐? 왜!”

“알려주려 해도 잘은 모르는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라서.”

“그럼 이것만 대답해줘. 나쁜 감이 드는 건 아니지?”

“……나쁜 건 아니야. …아니, 나한텐 나쁘려나? 뭐… 그래도 한참이나 남은 일인 것 같고…”

크리스는 결국 대답을 넘겼다.

『쾌락 감지』로 알게 된 그녀의 취향을 빌미로 캐내 볼까 했지만…

나중에 크게 혼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튼, 자넷의 지지 아래에서 데이지의 합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용병단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여러 약조를 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그녀가 걷지 못할 정도로 지쳤을 때는 내가 업겠다고 하거나…

그녀의 의식주는 전부 내가 책임을 지는 등.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났다.

드디어 수도를 떠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헨리씨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겠어?”

“헨리는… 실력은 충분한데, 나를 숨겨주느라 제대로 된 활동을 못 하고 있었어. 슬슬 쟤도 날개를 펴야지. 저 연금 공방이면 그 발판이 되어줄걸?”

“편지에는 용병단에 관한 걸 적지 않았다고 했지?”

“내 행적을 숨기는 게 날 잊게 하기엔 좋을걸. 하얀 고래 용병단의 소식이 들려오면 내 생각이 날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우리 용병단이 워낙 유명해야…”

“괜찮을 거야. 선물도 남겨놨고.”

데이지가 헨리에게 남긴 선물.

그건 바로 내가 ‘불로의 비약’을 공부할 때 썼던 교과서들이다.

그 교과서에는 불로의 비약 제작법이 상냥하게 적혀져 있다.

설령 재료가 없어 제작을 못 한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녔다.

개인적인 연구를 할 때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걸 어떻게 쓰는지는 걔한테 달린 거지 뭐.”

“네가 그렇다면야 뭐. 짐은 다 챙겼고?”

“응. 네가 보관해주고 있잖아?”

그렇게 우리는 수도를 떠났다.

이제…

데이지와 멜, 자넷을 지구로 초대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