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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Epilogue)

* * *

난 원래 ‘내 사람’에 포함되는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시로 크리스의 경우를 들 수 있고,

다른 연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역시 손익 따윈 따지지 않고 도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내 과거를 천천히 돌아보니, 모두에게 평등히 대했다 말하긴 힘들었다.

티끌만큼 남은 나의 양심이 허용치 않았다.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혈귀화’는 원래 멜이 가졌어야 하는 능력이지. 자넷에게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받아낼 건 전부 받아냈고.’

반면에 데이지의 경우는?

딱 봐도 차이가 보이는데, 평등하게 대했다고 말 할 수 있을 리가.

스스로 자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데이지가 내 마음의 장벽 안에 들어왔다곤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연속적으로 주게 되는 것을.

핑계를 대자면, 의도적으로 데이지만을 편애한 건 아니었다.

반 제국파의 멸망. 불로의 약. 기억의 조각…

내가 줄 수 있었던 것들은 전부 그녀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또한 다른 이들에게 준다고 해도 기뻐한다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

데이지에게 가장 가치 있었다, 이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는…

좋게 말해서 마음이 시킨, 대놓고 말하면 꼴리는 대로 하고 싶었단 이유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제 실리를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건 그만두기로 했기에.

그럼 어째서 이런 이타적인 마음이 들었을까?

열심히 자신을 돌아본 결과, 이 이유 역시 찾을 수 있었다.

심각한 따돌림으로 고통스러웠던 크리스의 과거에 안타까워했다.

27년이란 세월을 아파했던 에일린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데이지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그녀가, 착해 빠진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온 저 소녀가, 앞으로는 좀 웃고만 살았으면 좋겠다.

…약간 더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지의 외형이 앳된 소녀, 그것도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라는 것 역시 큰 몫을 한 것 같다.

이상한 뜻은 아니다.

그 왜, 이쁘고 귀여운 조카한테는 괜히 용돈을 더 얹어주게 되는 그런 게 있잖아?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어리고 연약한 생물은 원초적인 보호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고.

그것과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그래! 난 그런 이유로 얘한테 잘해주는 거지. 음!’

내가 데이지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주는 원인을 장황할 정도로 나열한 이유.

이건 쓸모라곤 전혀 없는 잡생각이 아니다.

만일을 대비해 미리 만든 변명이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 가십 질을 좋아하는 인물이 우연히 우리의 상황을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내 행동의 모양새가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음…

내가 데이지에게 준 선물들.

이건 여자에게 단단히 반한 남자가 이것저것 가져다 바치는 모양새로 여겨질 확률이 높았다.

그래. 마치 구애 활동처럼.

그렇게 오해받는 상황이 싫을 뿐이다.

나는 데이지에게 이상한 감정 따위 전혀 품지 않았으니까!

현명한 사람은 사소한 가능성이라도 넘기지 않고 대비를 한다.

나는 현명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니, 그런 혹시 모를 상황을 상정한 것이다.

의심의 시선이 향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해명하기 위해.

‘좋아. 완벽하네.’

나는 이러한 멋진 핑계를 만든 뒤,

멍하니 날 올려다보는 데이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뭘 그리 멍하니 봐? 감상 같은 거 없어?”

“감…상?”

“막 호들갑을 떨던가, 팔짝팔짝 뛴다던가… 그런 알아보기 쉬운 리액션 좀 해봐. 귀염성 없게…”

내 황당한 요구에 데이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뜬금없지만…

저 말랑한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장난을 쳐보고 싶어졌다.

물론 참기로 결정했다.

감사 인사를 듣기도 전에 혼부터 날 것 같거든.

“…잠깐. 잠깐만. 그 전에… 나 귀가 안 좋잖아? 그래서 방금 잘못 들은 게 좀 있는 것 같길래, 확인차 물을게.”

“얼마든지. 편하게 물어봐.”

“이거… 준 게 아니라 빌려준 거지?”

“아니? 선물이라니까? 이제 네 거야.”

“내 거?”

“응. 네 거.”

두 번 세 번 연달아 물은 데이지지만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 이상으로 기억의 조각을 더 유용히 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연금술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한들, 내가 신뢰할 수 없다.

난 이미 이 머리핀의 주인을 데이지라고 결정했다.

“………이거 엄청 귀한 거지? 너, 아니라고 하기만 해봐.”

데이지가 눈에 시뻘건 불을 켜고 내게 물었다.

거짓말을 하면 이빨로 내 팔뚝을 사정없이 물어버리겠다는 표정이다.

딱히 거짓을 입에 담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이걸 어째서 나한테? 너도 연금술에 입문해서 알잖아…! 이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물건인지…”

“음… 그건 그렇더라. 나도 한번 껴 봤거든.”

“좋아. 잘 아나 보네. 지금이라도 다시 받아 가는 거 어때? 나 진짜 욕망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제안하는 거거든?”

“오. 욕망까지? 다행이다. 마음에 드나 보네!”

“……이 호구 새… 후우…”

데이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다.

연금술에 좋아 죽는 그녀라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것이 아닌 보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스스로 머리핀을 떼어내기까지 했다.

이건…

연금술에 대한 지식욕보다, 나와의 인연을 더 중시해 줬다고 멋대로 해석해도 되려나?

정말로 그렇다면, 좀 감동이네.

“빨리 가져가. 이걸 왜 나한테 줘?”

“그거 머리핀이잖아. 네 경우엔 엄청 잘 어울리는데, 내가 끼고 다니면 좀… 역겹지 않을까?”

“…넌 진짜 미친놈이야.”

“푸하핫! 농담이고, 사실 난 너만큼 연금술에 열정이 없거든. 그런 귀한 걸 가져봐야 썩히는 꼴밖에 더 되겠어?”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네가 연금술에 열정이 없다고?! 장담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야!”

데이지가 버럭 화를 내었다.

거짓이라고?

그녀가 한 말과 다르게,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방금의 말은 전부 진실이었으니까.

난 정말 연금술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고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오해하고 있는지 깨달아 버렸다.

“거짓말이라고? 내가?”

“후후. 시치미 떼긴. 네게 연금술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그래! 인정해! 넌 연금술 재능이 미친 듯이 뛰어나! 다른 사람이 하나를 배울 때, 넌 과장 하나 없이 백을 깨우쳤지!”

“…그건 지난번에 말했듯이, 조금 편법이 있었다니까. 아무튼, 난 재능만 있을 뿐 열정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어.”

“하! 연금술이란 분야가 정말 재능 하나로 다 해 처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해 보여? 절대 아니야!”

“……”

“재능으론 한계가 있어. 넌 분명 연금술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나 못지않은 열정도 보였어. 절대 네가 쏟은 노력과 열정을 헐뜯지 마!”

데이지는 훈계하듯 내게 그리 말했다.

이해는 간다.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나의 스승이었다.

그런 만큼 내가 스스로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예쁘게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그녀는 지금 제 무덤을 파고 있다.

미래의 데이지는 저런 말을 당당하게 꺼낸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미래의 데이지는 고작 몇 초 뒤에 존재한다.

“어때, 내 말이 틀려?”

“…맞아. 난 분명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 엄청 필사적이었지. 하지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야. 진심으로 연금술에는 큰 뜻이 없는걸?”

“뭐? 그게 뭔 소리…”

“모르겠어? 내가 그토록 노력과 열정을 쏟은 이유는, 연금술에 흥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잖아?”

“……서,설마…?”

데이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흥분해서 잊고 있었나 본데, 드디어 깨달은 것 같다.

연금술에 별 관심도 없던 내가 그토록 열심히 배우려 한 이유는…

바로 데이지를 살리기 위함이란 걸.

“아,아아앗…! ……흐아! 앗!”

데이지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조그마했지만, 손바닥 역시 조그마했기에 미처 가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젠장.

데이지의 얼굴이 붉어진 만큼, 내 얼굴도 덩달아 붉어졌다.

대놓고 수면 위로 끌고 오기엔 좀 간지러운 이야기잖아?

괜히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서로 알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데이지가 깜박 잊어버리고 꺼내는 바람에 몰아치는 수치에 몸부림치게 되었으니까.

“큼… 어쩐지 좀 쪽팔리네. 아무튼 알겠지? 난 이미 목표를 이뤘으니까, 솔직히 전처럼 연금술에 시간을 쏟아 부을 자신이 없다고.”

“그런가? 아,아하! 그,그러네! 응!”

“너 가져. 이야기는 그걸로 끝. 알겠지?”

“어쩔 수 없네! 고,고마워…!! 정말!!”

­ 허둥지둥!!

이토록 당황한 데이지는 처음 봤다.

나는 특성의 덕에 혼란이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데이지의 혼란을 가라앉혀주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 구경하면 정말로 발을 헛디뎌 다치기라도 할 것 같아 보였기에.

“…데이지. 데이지! 진정해봐. 물어볼 것이 있으니까.”

“무,무,물어 볼 거? 설마 네가 연금술을 공부한 이유에 관한?!”

“그,그건 그냥 언급하지 않기로 할래? 큼. 사실이긴 하지만, 나도 대놓고 말하긴 좀 부끄럽거든. 그럼 그런 거로 하고, 자. 천천히 심호흡해 봐.”

“으,응! 후…하… 후…”

데이지의 어깨를 잡고 느긋한 목소리로 심호흡을 유도했다.

불편함을 느꼈는지 자신의 어깨에 닿은 내 손을 힐끗거리며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놔주는 일은 없었다.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면 사람의 흥분은 더 빨리 가라앉기 때문이다.

“후우… 됐어. 이제…”

“진정했어?”

“…응. 그러니까 소,손…”

“……머리는 실컷 만지게 해주더니, 엄청 비싸게 구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확실히 진정한 것 같아 보였기에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아까 데이지가 내 가슴에 닿은 손을 털었던 복수 삼아 보란 듯이 손을 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그런 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다 혀를 삐죽 내밀며 다시 복수했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단 말은 진실이었구나…

나는 이 연쇄를 끊기 위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마음먹고,

킥킥대며 나를 바라보는 데이지에게 질문을 했다.

“어때, 그 다음 단계도 공부해서 익힐 수 있을 것 같아?”

“응? 무슨 뜻이야?”

“불로의 비약. 부작용.”

“아… 확실히, 불로의 약을 먹으면 학습 효율이 떨어지긴 했지.”

“응. 이 머리핀은 좀 색다른 메커니즘으로 작동해서 부작용을 피할 것 같기도 한데… 확신은 못 해.”

기억의 조각에는 데이지가 유일하게 성장 할 수 있는 열쇠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내가 ‘기억의 조각’을 장착하고 Lv 7에 해당하는 연금술 지식을 공부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머리핀을 벗으면 내 연금술 레벨은 고작 Lv 3에 불과하다.

당연히 Lv 7 때 사용한 지식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식 중간에 공백이 생겨버릴 테니까.

‘5레벨인 데이지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야. 고레벨일수록 레벨 격차 사이의 정보량은 방대해지니까.’

결론은 머리핀을 끼고 공부한 지식은 머리핀을 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로의 비약’의 부작용에 해당하는 ‘스킬의 숙련도를 얻을 수 없다’에 포함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쌓이는 건 아이템 숙련도지, 스킬의 숙련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가 머리핀을 끼고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진짜 연금술 스킬은 3레벨에서 숙련도가 전혀 오르지 않을 테니.

‘개인적으론 부작용을 피해갔으면 좋겠네. 얘는 연금술에 진심인 만큼, 더는 배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음…’

다행인 점은 감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데이지에게 부작용을 피할 확률이 있다는 기대를 심어 준 것이기도 했고.

데이지는 양손으로 머리핀을 소중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직접 만질 수 있는 선물은 이번이 처음인가?

저리 기뻐하는 걸 보니, 참 선물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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