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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6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Epilogue)

* * *

“…있잖아 멜. 나는 어떤 성향 같아? 주로 여자관계 쪽에서.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

“어… 여기저기 손을 뻗는… 쓰,쓰레기?”

“……”

“앗! 저,저는 그래도 그런 찬영님이 좋은 거니까요…!!”

“…고맙다.”

“헤헤…”

멜도 당연히 그리 생각하고 있나 보다.

나는 여자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나 역시 스스로의 욕구를 ‘성욕’이라 추측했다.

아니면 ‘정복욕’, ‘지배욕’이라든지.

허나 『쾌락 감지』 특성은…

나 박찬영을 성장이 멈추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이라 판단했다.

여자를 안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 더.

‘물론 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쩌면 강박증세라고 생각될 정도로 혐오하긴 했지만… 어?’

차분히 자기 관조를 시작했을 때.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당장도 금욕적인 생활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몸이 바뀐 초반부에는 섹스와 거리가 먼 삶을 살기도 했다.

그때.

미칠 정도로 괴로웠냐고 묻는다면…

불만은 많았을지언정, 그 정도는 단연코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억지로 ‘완성된 불로의 비약’을 먹인다면?

더이상 영원히 성장하지 못한다니…

난 분명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그토록 피해 왔던 소설 속 세계에서의 자살조차 망설이지 않고 할 것 같다.

해약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면, 몇십번 몇백 번 멈추지 않고.

설령 반쯤 미치더라도.

“…정확한 성능이네. 『쾌락 감지』.”

어찌 되었든 내 욕구가 생각보다 이로운?…방향이라서 다행이다.

내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준이라면, 성장욕을 굳이 억제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성장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한시라도 빨리 용사보다 강해져 안전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금의 나는 자신의 욕구를 관찰하는 데 쓰긴 했지만…

『쾌락 감지』의 능력은 스스로를 관조하기 위한 특성이 아니다.

그 진가는, 타인의 욕구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새로운 능력을 얻었을 때,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마침 적절한 시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예정인지 전혀 모른 채, 붉은 동공으로 나를 순수히 올려다보는 그녀가.

보통은 상대의 숨겨진 취향을 멋대로 알아내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지만…

내가 뭐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데 양심에 못 이겨 능력을 제한하는 짓, 지금의 내가 하면 위선이다.

본심은 당장 멜에게 써보고 싶으니까.

‘무엇 보다 알아두면 유용하지 않겠어? 난 멜의 연인으로서 그녀의 욕구를 충족 시켜 줄 의무가 있고.’

내 양심은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수준에 그친다.

버려진 쓰레기를 봐도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을 정도의 선인은 절대 아니란 말이지.

나는 가만히 멜과 눈을 마주치며 그녀의 욕구를 알아내고 싶다는 의지를 키워냈다.

물론 눈을 마주쳐야만 욕구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알아내는 것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고, 눈은 감정을 비추는 통로라고 하지 않은가?

무언가 도움이라도 되겠지 싶어 한 행동이다.

‘…어?’

그녀가 슬슬 부끄러워하며 내게서 눈을 피하기 시작했을 때.

멜에게서부터 무언가가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수백 수천 개의 감정의 실.

그 실들은 제각기 다른 굵기, 다른 색을 띤 채 그녀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뿜어져 나왔다고 하면 틀린 표현이다.

원래 저리 존재하고 있는데,

이 감정의 실이 존재하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되었단 것이 맞으리라.

‘개수가 수백 개를 넘긴다는 건 어렴풋 알겠지만… 상세한 건 거의 안 보이네. ’

대부분의 실을 파악하지 못하겠다.

집중해보려 해도, 실과 나 사이에 수많은 모래 알갱이가 분포해 있는 것처럼 내 감각을 가리려 들었다.

유일하게 존재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가장 길고 굵은 실 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멜이 가진 ‘가장 큰 욕구’다.

그 굵은 실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자유롭게 유영하기도 하고, 크기가 줄었다 커지기도 하는 다른 수많은 실들과 달리.

마치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가치관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멜의 실이 띄는 감정은 바로…

“…멜.”

“네?”

“그러고 보면, 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서 이별을 마음먹었지?”

“그,그,그건…!! 으으으, 죄송해요!!”

­ 스윽.

나는 허리를 숙여 멜과 눈을 가까이했다.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양손으로는 멜의 볼을 부드럽게 쥐었다.

부끄럼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내 눈을 피하지 못하게끔.

“차,차,찬영님?!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곤 해도, 여기 밖인…!”

“멜. 지금 혼나고 있잖아. 눈 감지 마.”

“하읏! 네,네엡…!”

멜의 눈꺼풀이 파르르르 떨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게 여자아이 특유의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진하지는 않은 붉은색의 동공.

멜은 확실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또한, 설렘도 느끼고 있었다.

“멋대로 도망치려 하면 돼? 안 돼?”

“도,도망이요…?”

“그럼. 도망이지. 그날, 약속했잖아? 연인 관계가 되기로.”

“…그렇…죠…”

“약속은 두 명이 맺었어. 그럼… 약속을 깨려면?”

“찬영님의… 동의가… 필요하단 뜻… 인가요?”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억지 아닌가요…?! 무,물론 제가 떠날 일은 없겠지만!”

“……멜.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 아앗, 아! 그,그러네요… 하읏, 방금 알아…들었어요…”

힘겹게 들어 올린 그녀의 눈꺼풀은 결국 닫혔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건 덤이고.

헤어지고 싶으면 내 동의를 구해라, 이 말에 담긴 뜻은 간단하다.

내게 너와 헤어질 생각은 한치도 없단 의미다.

물론 이 세상엔 의외로 동의를 한 채 헤어지는 커플이 많다는 건 안다.

허나 멜이 오해를 하지는 않았으리라.

상대방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는 ‘언어’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으니까.

가령, 방금의 말을 아주 짧은 거리에서 강렬한 눈빛으로 말한다면?

그건 꽤 공격적인 소유욕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이 내 노림수였다.

멜의 가장 커다란 욕망은…

강하게 ‘소유 당하고 싶은 욕구’였으니까.

“흐아…! 그,그만…! 찬영님…!! 저,저 못 버틸 것 같아요오…!! 손 놔주시면…”

“정말 알아들은 거 맞지?”

“네! 네에!! 알아 들었으니까아…!! 다시는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좋아.”

나는 확언을 듣곤 멜의 볼에서 두 손을 놔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멜이 다리의 힘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다.

한 손으론 무릎을 짚은 채 몸을 지탱했고, 다른 한 손은 심장 위에 가져다 댄 채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질 때면, 정말로 농익은 토마토처럼 변하곤 했다.

피부가 하얗고 머리도 흰색이라 대비 되어 그리 느껴지는 것이리라.

아니면 오늘따라 특별히 더 얼굴이 붉어진 것일 수도 있고.

‘『쾌락 감지』… 첫 시도치고는 나름 잘 이용한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강하게 끌어올린 소유욕.

그 짙은 감정을 온몸으로 느낀 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개인의 가장 큰 욕구는 약점과 같은 말일 것이란 예측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하으… 하아…”

눈가가 미약한 습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탓일까.

고개를 든 멜은 평소의 앳돼 보이던 그녀답지 않게 무척이나 관능적이었다.

아니면…

방금 정신적으로 큰 자극을 받은 멜이 눈빛으로 스킨십을 졸라 오는 탓일 수도 있으리라.

쭈뼛쭈뼛 내게 몸을 기대어 오는 것이, 이건 분명 유혹의 일종이었다.

“……저,저 찬영님?…”

“미안해 멜. 시간은 나중에 가지자. 오늘은 아직 할 게 남아서.”

­ 스윽. 스으윽.

“앗… 네… 어,어쩔 수 없죠…! 일정이 있으시다면… 제가 방해할 수는……”

위로 삼아서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멜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자꾸 의도치 않게 밀당을 하게 되네.

나는 멜을 위해서 남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바로 마지막 보상이다.

‘기억의 조각? 이게 뭐지?’

기억의 조각은 아이템이었다.

내 인벤토리에 자연스럽게 등장해 있었다.

이름은 조각이라 붙여 있지만, 그 모양은 마치…

“이거… 머리핀 같은데?”

조그만 삼각형의 머리핀이었다.

머리핀이라면…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처럼 사용 아이템이 아닌, 장비 아이템인 것 같았다.

추측은 짧게 하자.

나는 시스템창을 띄워 그 머리핀의 설명을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기억의 조각 ­ 하얀 고래의 발자취

종류: 장비

레벨: ­

효과: 스킬 계승

상세:

‘기억 시리즈’ 중 하나.

소설 완결 시, 특수한 업적을 달성했을 때 지급하기 위해 제작된 아이템입니다.

천계의 보안 솔루션이 가동 중이기에 그 제작법과 원료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소설이 완결되기 전.

해당 세계에서 인연이 닿았던 이들 중 한 명의 스킬을 ‘기억 시리즈’에 각인합니다.

‘기억 시리즈’의 소유자는 각인 된 스킬을 얻습니다.

아이템을 장착 해제하면, 해당 스킬을 잃습니다.

한번 각인 된 기억은 두 번 다시 변경할 수 없습니다.

현재 각인 된 기억 ­ [아직 비어 있음]

인물을 선택 가능합니다!

스킬을 선택 가능합니다!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인연이 닿았던 인물만 선택이 가능합니다!

완결 이후 새롭게 쌓은 인연은 선택 가능 대상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 기억 시리즈

기억의 흔적 ­ 랜덤 대상의 랜덤 스킬

기억의 파편 ­ 선택 대상의 랜덤 스킬

기억의 조각 ­ 선택 대상의 선택 스킬

기억의 ?? ­ ??

=

딱 봐도 어마어마하게 좋은 아이템이다.

비록 완결 이후 인연을 새로 쌓은 인물의 스킬을 계승할 순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너무나 유용한 아이템이다.

예를 들어…

초창기 영지전에서 봤던, 고위급 마법사의 공격 스킬을 복사했다고 치자.

그럼 이 조각을 장착한 나는 그 스킬을 배우지 않아도 쓸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사용해도 숙련도가 늘지 않고, 레벨업이 불가능하단 단점이 있지만…

유틸리티 성이 너무나 높다.

‘공격 스킬을 각인시켜놨다가, 급할 때 동료한테 빌려주면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이잖아?’

어디를 봐도 ‘시스템 보유자’만 장착을 할 수 있다는 소리는 없었다.

눈앞의 멜도 하루아침에 파이어볼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력과 지능 스텟의 영향을 받아 위력이 터무니없이 낮아지겠지만.

‘단점을 보면 공격 스킬을 각인하긴 좀 아쉽네. 아 마법사가 높은 레벨의 검술 스킬을 가진다고 도움이 되는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니까…’

얼굴을 포함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나의 ‘디시빙(Deceiving)’스킬을 각인할 수 있다면 꽤 유용하리라.

하지만 선택 가능한 인물 중 자신은 포함이 안 되는 듯했다.

아쉽네.

깊은 사색에 잠겼다.

내가 여태 이 세계에서 누구를 만났지?

죄다 용병 아니면 기사.

마법사와 보드엠 국왕 같은 귀족도 있긴 하지만…

이렇다 할 만능의 스킬을 가진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최선은, 역시 영지전에서 봤던 고위 마법사인 걸까?

인연. 인연이라…

내게 있었던 특별한 인연이…

“…더 없나? 이래서 로우 파워 정통 판타지는… 쯧… 그냥 고위 마법사로 결…정…… ……어? 인연? 잠깐, 설마!!”

퍼뜩 떠오른 발상에 시스템 창을 다급히 불러왔다.

혹시 되려나?

됐으면 좋겠는데!

­ 띠링!

[트리스 메기스투스 ­ 연금술 Lv 9]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됐다!!”

멜의 시선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소리를 쳤다.

슬슬 이름이 익숙해져 가는 전설 속 연금술사 트리스 메기스투스.

내게 수많은 기연을 안겨준 그로부터, 이젠 스킬까지 빨아 먹을 차례가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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