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미안해 찬영. 정말 미안해…”
크리스.
내 허리 위에 올라탄 인물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사랑받고 있음을 실감할 정도로 짙은 애정이 깃든 동공.
그 너머로 당황한 내 얼굴이 비쳤다.
지금처럼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면, 크리스는 어여쁜 웃음을 짓곤 했다.
이렇게 슬퍼하는 얼굴이 아니라.
“하지만… 자꾸 찬영의 주위에 다른 년들이 생기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응… 내가 찬영을 못 믿는 게 아니란 거 알지?”
나는 무언가를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혀 끝에 막혀, 맴돌다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어쩐지 머리는 멍하고, 온몸에 기운은 없었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신체의 제어를 빼앗긴 것만 같았다.
크리스는 아무런 반응을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는 날 봤지만,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내게 나직이 내뱉을 뿐이었다.
“날 이해해 줘.”
무엇을?
여전히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크리스가 저런 표정을 짓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크리스가 손에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몬스터를 해체할 때 쓰곤 하던 단검이었으니까.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정신은 몽롱했으며, 몸은 손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술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칼날이 점점 이동한다.
불길한 예감과 달리 칼끝이 향한 곳은 내 심장이 아니었다.
가슴. 허리를 지나치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바로…
“이젠 찬영의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되겠지만… 이게 사라지면, 찬영도 더이상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않을 거지?”
나는 그제서야 크리스의 목적을 알아챘다.
하지만 신체를 묶은 알 수 없는 힘을 이겨내고 그녀를 제지하는 것 보다,
단검의 칼날이 내 몸으로 내리꽂히는 것이 훨씬 빨랐다.
크리스는 한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푸욱!
“으아악!”
벌떡!
몸을 옥죄던 주박에서 풀린 나는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지만, 온몸은 식은땀인지 모를 액체에 젖어 있었다.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내 남성성에게 탈이 없는지 확인했다.
“머,멀쩡하네?”
그러고 보면…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올라타 있던 크리스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태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자연치유』가 내 정신을 안정시켜주며, 내가 방금까지 본 것이 지독한 악몽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뭔 그리 현실감 넘치는 악몽이…”
“으응…”
허탈하게 이마를 타고 떨어지는 땀 구슬을 닦고 있을 때.
왼쪽에서 잠결을 떨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꿈에서 내 인생의 행복을 제거하려 했던 크리스였다.
“…찬영?”
“깼어?”
“응… 일찍 일어났네?”
“아. 잠을 좀 설쳐서.”
“왜?”
“…그러게.”
저 깊은 무의식 속에 먼지 쌓인 채 굴러다니던 내 양심이 오랜만에 존재감을 비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비록 아무런 일도 없었다곤 한들, 두 명의 여자와 같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서 그런 걸까?
나는 내 오른편에서 세상 모른 채 잠에 빠져있는 안젤리를 보곤 생각했다.
“아앗! 알겠다! 저 비둘기 머리 위에 떠다니는 저 고리. 저기서 나오는 빛 때문에 찬영이 깊게 잠들지 못한 게 아닐까?”
“……”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확실해. 앞으론 저 유해조수랑은 같이 자지 않는 걸 추천할게!”
크리스는 자신이 도출해 낸 결론에 만족한 학자처럼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는 그녀를 보면 꿈에서 본 것이 불가능했던 일은 아닌 것도 같다.
만약 지금처럼 집착이 줄어든 때가 아닌, 한창 상처가 덜 여물었을 때 내 여자관계를 고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먼 미래가 아니었네…’
나는 괜히 이불로 고간쪽을 가리면서 크리스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조금은 어색한 웃음을.
안젤리와 크리스.
두 명의 여자와 같이 침대에 오른 호강을 한 이유는 별것 없다.
‘그럼 오늘 밤은 누가 찬영과 자느냐?’를 두고 싸움이 재점화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오늘은 함께 자는 것이 어떠냐 제안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찬영?”
“일단… 멜이랑 자넷을 만나야 할 것 같아. 그쪽에서 할 게 있거든.”
“흐응. 걔들도 이 집으로 데려오게?”
“그렇지.”
데리고 올 사람이 멜과 자넷을 제외하고도 한 명 더 있다는 건…
데이지를 정식으로 소개해주며 이야기하자.
나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를 완결짓는 걸 오늘로 미뤘다.
어제 하루는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았지 않았던가?
심력이 좀 깎였단 말이지.
물론 정신력을 회복시켜주는 『자연치유』가 있기에 쌩쌩하긴 했다.
허나 이제 와서 급하게 할 이유가 없다.
완결은 되돌릴 수 없으니, 마지막까지 빠트린 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뭐… 만일을 대비하는 거지.’
그렇게 나는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
“파,파계승…”
“자넷 단장? 아, 멜에게 설명을 들었나보네요.”
여관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붉어진 얼굴로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자넷을 마주쳤다.
이제 깨달았나 보다.
더이상 나와 연인이 되지 않으려던 변명이 사라졌다는 걸.
저벅. 저벅.
“아주 신난 얼굴이네?”
“크,크리스?”
“뭐. 이 밉상아.”
나를 따라 걸어 내려오던 크리스가 자넷을 발견하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의외로 크리스는 자넷에게 큰 반감을 가지지 않은 듯했다.
정말로 자넷이 싫어졌다면 말도 안 걸었을 테니까.
“큼… 밉상이라니…”
“친구의 뒤통수를 쳐? 어휴.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어,어어… 아직 나를 친구…라고 해준 거야…?”
“찬영이 나보고 싸우지 말래. 앞으로도 보고 살 사이니까.”
“으븝?”
크리스는 그리 말하곤 자넷의 양 볼을 쥐었다.
꼬집었다기보다는, 가볍게 쥐어 그 감촉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장과 단원 사이였던 둘은…
서열이 역전되어버린 듯하다.
말랑말랑.
“져,져기? 우리 애드리 보고있눈데…”
“…요 밉상. 좀 생기긴 했네.”
“무슨 뜨시야?”
“이 얼굴로 꼬신… 으븝?”
나는 그녀가 자넷에게 한 것처럼, 크리스의 볼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내 예비 신부의 생각이 참 귀여웠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자넷에게 전하고픈 말은 알겠다.
이런 거리낌 없는 스킨십을 하며, ‘난 너에게 화가 많이 안 났다’를 열심히 표현하는 중인 것이다.
자넷이 크리스의 앞에서 죄인처럼 하루종일 쫄아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친해진 사람이 자넷이지?’
어차피 한 가족이 될 것.
어색한 사이로 남기는 싫은 듯하다.
하지만 크리스는 직접적인 화해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부끄럼을 탔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 행동으로 뜻을 전달하길 택했다니…
꽤 귀여운 발상 아닌가?
크리스의 계획에서 생긴 단 하나의 변수는…
안타깝게도 상대가 그 자넷이란 것이다.
자넷은 다른 것에선 몰라도,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눈치가 별로 없단 말이지?
내가 가만두고 봤다면 크리스는 하루종일 자넷의 볼을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자넷은 무척 어리지만, 그래도 나와 크리스의 단장이니까.
“자넷 단장. 단장이 단원한테 놀아나면 안 되잖아? 위엄이 떨어진다고.”
“나,나 월래 위엄 있눈 단쟝 타이븐 아니었눈데…”
원래 위엄 있는 단장은 아니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
그녀는 뛰어난 카리스마, 지휘로 인해 단장이 된 것이 아니다.
그냥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단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이 있어 리더가 된 케이스지.
고작 이런 장난으로 균열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불만조차 말하지 못한 채 전부 받아준다면? 그건 또 다르단 말이야.’
혹시 모를 불씨는 최대한 막아두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나중에 조용히 자넷을 불러, 크리스의 의향을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다.
크리스에게 전부 맡기면 한세월 걸릴 테니까.
“차녕… 그, 그만해… 다들 보고이꼬, 부끄려운데…”
“너도 단장한테 하고 있으면서. 그럼 서로 그만할까?”
“…하지만…”
“킥킥. 그냥 따로 불러서 이야기나 해보는 게 어때? 저 어리둥절한 단장의 눈을 봐. 하루종일 이래도 전혀 눈치 못 챌걸?”
“차,차녕 뭐 눈치채써?!”
“나는 단장이랑 다르거든.”
“…에혀… 저저 밉샹… 그래… 그러쟈…”
결국 크리스는 포기하고 자넷의 볼에서 손을 놓았다.
나 역시 가지고 놀던 볼에서 손을 떼었다.
크리스의 볼이 약간 붉은 건 내가 만지작거렸기 때문인 걸까,
자신의 계획을 내게 들켰기 때문일까?
“그럼 둘은 이야기나 좀 하고 있어. 나는… 단장. 멜 지금 어디 있어요?”
“멜? 아아, 여관 정문 앞에 있을걸?”
“고마워요. 그리고, 이따 놀랄만한 경험을 할 텐데… 미리 마음의 각오를 해두세요!”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라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리라.
그런 만큼 경고를 해두었다.
대비한다고 당황을 안 하지는 않겠지만…
당황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겠지.
나는 둘을 남겨둔 채 멜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일단 암묵적으로는 관계 정리가 되었지만…
혹시 그것으로 부족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관계를 입으로 말하며 확정 짓기 위해서다.
끼익.
“멜.”
“찬영님?”
여관의 밖으로 나가자 하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여자아이가 나를 반겨주었다.
남자라고 하기엔 많이 긴 단발머리.
허나 머리를 자르기 귀찮다며 단발인 채 머리를 묶고 다니는 용병도 많았고,
복장이 너무 남성적인 복장인지라 참으로 중성적으로 보였다.
내게는 천생 여자로 보였지만.
“어때, 처음에 약속한 대로 크리스에게 허락받았지?”
“…이제 와 말하는 건데, 백 퍼센트 빈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로 해버리실 줄은…”
“하하핫. 빈말일 리가.”
멜이 신기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왕위 쟁탈전에서 내가 기사를 때려잡을 때도 이런 눈으로는 안 봤는데,
어지간히 별종으로 보였나 보다.
“이제 네 입으로 말해줘. 우리는 어떤 관계야?”
“여,여기서요?! 다들 아직 절 남자로 알고 계실 텐데…?”
“여관 안쪽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란 거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그,그러네요. 이젠 비밀로 할 이유가 없긴 하네요. 제가 사실 여자란 것도, 제 연인이…… 여,연인이…”
“연인이?”
“…찬영님이란 것도.”
나는 멜의 대답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를 오해는 존재하지 않았다.
멜은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으으…!! 제,제가 떳떳하게 말하고도 좀 어색해요…!”
“괜찮아. 허락을 받았으니까.”
멜이 입 밖으로 낼 정도로 확정된 관계.
이제 정말로 거리낄 것 없다.
띠링!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시스템창을 띄웠다.
멜이 그런 나를 갸웃거리며 보았지만,
이제 곧 그녀도 내 능력을 얼추 알게 될 테니 숨길 것 없겠지.
“정말 길었네.”
“네? 뭐가요?”
“여기 오기까지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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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래의 발자취]
현재 완성도 138%
현재 사망 횟수 0 (Perfect!)
Happy End.
떡밥 회수가 깔끔한 결말.
소설을 완결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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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는 100%를 진작에 초과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예] 버튼에 손가락을 옮겼다.
길었던 여행이 끝날 시간이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