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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크리스. 잠시.”

그때.

지금까지 둘 사이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둘의 분위기가 너무 격화됐다 판단이 들었나 보다.

“조금 진정하자. 전에 말했듯이, 얘도 내가 유혹해서…”

“…아니, 괜찮아. 찬영.”

“안젤리?”

“날 믿어.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니 나랑 약속 하나 해줄래? 베넷씨와 나, 둘이서만 대화하게 해줘.”

“괜찮겠어?”

“응. 딱 오늘이면 충분하니까.”

“…네가 그렇다면야.”

허나 안젤리는 그런 남자를 막아섰다.

심지어 중간에 끼어들 가능성이 높은 남자의 중재를 미리 차단했다.

바닥에서 고개를 든 안젤리는 크리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슬픔을 담은 눈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의는 꺼지지 않은 듯하였다.

아니, 오히려 한층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넷씨의 말, 틀린 게… 전혀 없어요… 전, 정말로… 정말로 잘못된 선택을 했군요…”

“의외로 순순하네?”

“찬영에게 어떻게 떠넘길까요. 아무리 봐도 제 죄인걸요? …미안해요. 지적하신 모든 걸 인정할게요.”

안젤리는 크리스에게 사과했다.

서로 반쯤 싸우던 상황에서, 무려 고개까지 숙여가며.

상황이 시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그… 큼! 고개는 들지? 내 쪽이 불편한데…”

“네. 배려 고마워요. 그래도…”

“야야, 정말 괜찮으니까…!”

크리스는 깜짝 놀라 안젤리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일으켰다.

저리 자책을 담은 사과를 보니,

가슴께가 강하게 아려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양심이 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양심이 이렇게나 아픈 이유?

하나밖에 없다.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훈수를 뒀던 크리스지만, 정작 실시간으로 안젤리를 속이고 있는 일이 있지 않은가?

남자는 크리스를 첫 번째로 여기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순차적으로 나열해 보면, 크리스는 첫 번째가 아니다.

눈앞의 이 천사가 첫 번째지.

물론 남자와 약속한 것이 있기는 했다.

그는 이 사실은 여태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는 크리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천사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그리고, 손해 볼 것이 없다 판단한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양심이… 으윽…!’

하지만 약속을 하기로 선택 한 건 크리스.

방금 스스로가 말했던 논리대로라면 그녀 또한 안젤리에게 죄를 물을 처지가 전혀 안 되었다.

이미 충분히 내로남불인 상황 아닌가?

“조,좋아. 앞으로는 그 문제에 대해 묻지 않을게.”

“…정말인가요? 저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어렵지도 않은 건데, 약속하지 뭐.”

“네… 가,감사합니다.”

이렇게 정중한 사과를 받은 것도 이미 양심에 커다란 타격이다.

이제는 공격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크리스지만, 애써 선심 쓰는 척을 했다.

반면.

안젤리는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젤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언제나 뒤흔들 수 있는 무기를 아무런 대가 없이 포기하는 행동처럼 비췄을 테니 당연했다.

안젤리와 크리스.

양 측 모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던 탓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뜨거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로 변했다.

“크음… 뭐…”

정적을 깬 것은 크리스였다.

어찌 되었든 목적은 달성한 것으로 판단했다.

안젤리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기까지 했고…

제대로 된 마무리는 지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만남에서 벌어졌던 수면 밑 싸움의 승자는 누가 보아도 크리스였다.

게다가 양심은 있어 보이는 천사이지 않은가?

생각대로라면, 안젤리는 크리스의 자리를 넘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당장 급하게 틀어막아야 하는 건 반기를 드는 경우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그냥 알아 두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선의의 경쟁자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베넷씨.”

“그래. 그럼 난… …뭐? 너 방금, 뭐라고?”

크리스는 뇌리에 박힌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의의 경쟁자?

저 조그만 입에서 나온 단어가 맞나?

경쟁자라는 단어가 나올만한 이유는 하나다.

안젤리가 그녀를 경쟁자,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서 크리스를 이기고 싶어 할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크리스가 충격에 몸을 떠는 것과 별개로…

둘을 구경하고 있던 남자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

“처,천사가 그래도 되는 거야?”

“잠깐, 베넷씨!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 아, 그래. 오해지? 휴… 난 또…”

“천사는 인간의 위에 서야한다, 그런 종족 차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여자인 이상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싶잖아요? 그냥 저는 베넷씨보다 찬영에게 더 사랑받고 싶을 뿐이에요!”

“오해 이긴 개뿔!! 하나도 오해 안 했잖아 이 개…!!”

슬슬 끝나가나 했지만…

안젤리의 발언을 시작으로, ‘약간 험악한 통성명’이 재게 되었다.

내가 나서서 말려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안젤리와 약속을 해버렸다.

둘을 믿고 오늘 하루는 끼어들지 않기로.

희소식 하나는, 안젤리는 멜이나 자넷과 다르게 도움이 필요한 타입이 아니란 것이다.

같이 지내다 보니 신뢰가 닳긴 했지만…

처음 그녀의 컨셉은 유능한 인재였단 말이지?

내가 안젤리를 믿기로 한 이유다.

“저는 그냥 사랑받고 싶을 뿐이랍니다…?”

“그러니까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말고!”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질문을 하셨으니, 제가 드릴 말은 당연한 말밖에 없죠…”

안젤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곤란하다는 듯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저건 표정 연기가 아니다.

진심으로 이 상황 자체를 의문스러워 하는 것이다.

“잠깐, 잠깐, 정리하자면… 너 지금 찬영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싶다는 뜻이지? 나를 밀어내고.”

“아아! 알아주셨네요! 네! 정확해요!”

안젤리는 그리 말하며 밝게 웃었다.

드디어 우리 사이에 있던 오해가 풀렸구나, 라는 뜻이 담긴 순수한 웃음이었다.

…나도 의외인 상황이다.

안젤리라면 분명 욕심부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그녀는 크리스의 앞에서, 내게 들으란 듯이 전쟁을 선포했다.

당사자인 내가 말 하긴 상당히 부끄럽지만…

내 애정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아… 그러고 보면…’

안젤리는 그 외견과 달리 절대 순하기만 한 타입이 아니었다.

용사 박시우를 상대할 때도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지 않은가?

게다가 크리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시절에도 은근히 질투가 있었다.

가령 크리스와 함께 밤을 보낸 뒤, 자기도 뒤지지 않겠다는 듯 스킨십을 졸라 오기도 했고.

안젤리도 그렇고, 크리스도 그렇고…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착하고 순한 모습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선전 포고를 하면서 지은 안젤리의 순수한 웃음이 크리스의 속을 긁었나 보다.

치켜든 크리스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너 다툼은 싫어하게 생겨가지고…!”

“네? 제가요? 에이… 예비 발키리가 전투를 두려워한다니, 어불성설이죠!”

“발키리…?”

“제 장래 희망이에요! 그리고 수많은 선대 발키리들께서 이런 말을 남기셨죠. 자고로 승리와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발키리들 사이에선 인간과 연애하는 것이 유명한 전통이자 전설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인간인 내게 호기심이 생겼다 했고.

사실 발키리들은 사랑에 굶주린 노처녀들의 모임이 아닐까?

나는 안젤리가 들으면 울상을 지으며 달려들 생각을 품었다.

“넌 양심도 없냐?!”

“저,저 양심 엄청 많아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반대잖아!”

“하지만 과거의 죄에 얽매여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후회를 낳게 될 뿐이랍니다? 게다가 베넷씨께서 과거 일은 더이상 짚지 않겠다고 말씀까지 해주셨으니… 전 더이상 죄를 짓고 있지 않은걸요?”

“그,그,그건 그런데… 다름 아닌 내가 잊…기로 해 줬잖아. 고마운 감정, 은혜, 뭐 그런 건 없어?!”

“고맙죠. 정말 고마워요. 지금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랑과 별개잖아요.”

“그렇게 죄책감에 고통받지 말고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두 번째로 만족하라고.”

“포기요? 후후! 찬영을 향한 사랑이 베넷씨를 향한 죄악감보다 작았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죠.”

“…염병을.”

안젤리는 한마디도 밀리지 않았다.

어떻게 저리 진지한 목소리로, 농담기 하나 없는 얼굴에서 부끄러운 말이 술술 나오지?

안젤리는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는 걸 잊은 걸까?

괜히 헛기침도 한번 해보고, 뒷목을 주물러도 봤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선보다 사랑을 쫓는 천사라…

그날.

안젤리를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해 유도한 일이지만, 꽤 보기 드문 광경인 건 변함이 없으리라.

음…

그러고 보니까 지금 안젤리가 굽히지 않게 된 것도 내 업보네?…

“베넷씨는 왜 날 서 있으신가요? 앞으로는 자주 볼 테고, 저는 나름 잘 지내보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모르겠어?”

“진심으로 모르겠어요.”

“이봐. 난 네가 방심한 틈을 타서 등에 칼을 꽂을 거야. 하지만 나랑 사이좋게 지내줄래?”

“네? 제정신인가요? 아무리 천사라도 그건 좀…”

“네가 한 말이 딱 그거잖아!”

잠깐 고민을 하던 안젤리가 이윽고 몸을 굳혔다.

크리스의 말에 무언가 깨달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비,비슷할지도?”

“비슷한 게 아니라 그냥 똑같지.”

“하,하지만 죽는 건 아니고, 또 ‘첫 번째’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거니까… 충분히 선의의 경쟁을…!”

“그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난 이미 올라갈 곳이 없는데 왜 위험한 가능성을 열어둬야 해?”

“장기적으로 보면 베넷씨도 좋잖아요!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찬영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가꿀 테니까!”

“내가 언제 나태하게 군대? 난 언제나 자기관리를 멈추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누가 상황에 쫓기는 상황을 반기겠어?”

크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변수를 사전에 막아두고 싶은 크리스.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는 안젤리.

두 개의 논리 전부가 이해 갔다.

그렇기에 대립할 수밖에 없는 둘의 상황 역시 이해했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이미 하늘에 선 독재자가 민주 투표를 도입하는 걸 찬성할 리 없지 않은가?

나 같아도 허락 안 한다.

이건 애초에 합의가 불가능한 논쟁이다.

“아아. 알겠네요. 베넷씨,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으시지만… 사실은 그냥 자신이 없으신 거군요?”

“…뭐?”

“애초에 베넷씨는 저와 출발선이 같지 않아요. 이미 첫 번째를 차지했다니… 상황이 유리해도 너무 유리해. 저라면 자신 있게 도전을 받을 텐데, 왜 겁을 먹는 건가요? 이유는 뭐… 하나뿐이겠죠? 후훗!”

“누가… 누가 겁을 먹었다고?”

안젤리는 대답 대신에 손가락으로 크리스의 가슴을 가리켰다.

방금 크리스의 어금니에 가해지는 압력이 갑작스럽게 강해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착각이기를…

“아닌가요? 그 어느 때도 찬영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으면 고개를 끄덕였겠죠.”

“논점을 이상한 곳으로 틀지 마! 100%를 99%로 만드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위에 선 자는 언제나 도전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위에 설 자격이 있는 거니까.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내려오세요.”

“자꾸 감성적인 쪽으로 내 시선을 돌리려 드는데… 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거야? 내 입장에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니까?”

“흥! 겁쟁이와 나눌 말은 없습니다.”

“후… 아니다. 젖탱이 큰 년은 전부 대가리가 빈 것으로 유명하니까. 이리 반복해서 말해줘도 이해 못 하는 것도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닌가?”

크리스…

최선을 다해 안젤리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으려 들긴 했지만,

열이 단단히 받긴 한 모양이다.

혹시 너무 격해질 낌새가 보인다면 약속 따위 개의치 않고 끼어들도록 하자.

둘은 앞으로도 마주 보고 지낼 사이니까.

“대,대가리가 뭐 어쨌…?!”

“너 멍청해 보인다고. 왜, 종종 듣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요!!”

­ 파닥파닥!

안젤리의 날개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천계에서 엘리트라고 불리며 지내온 안젤리에게는 감내할 수 없는 모욕인 듯 했다.

“이이!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신체 조건을 가지고 공격하시다니! 성숙하지 못한 어린애나 할 법한 말이네요!”

“그래? 넌 어른이라 좋겠다 야. 그 어른스러운 젖탱이로 찬영을 꼬신 거야? 추잡스럽고 천박하게 들이밀면서?”

“어린애, 아, 그럼요! 베넷씨는 저에 비하면 어린애기는 하죠. 시도 때도 없이 찬영에게 달라붙어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으아아악!!! 아악!!”

“꺄악?!”

크리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안젤리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분노 탓만은 아닌 듯하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부여잡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너,너 싸움 잘하냐?!”

“아직 부족하지만, 좀 친답니다? 나름 발키리 지망생이라서!”

그래.

솔직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깨서 미안하다며 속으로 작게 안젤리에게 사과하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둘은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감정에 먹힌 둘을 진정시키는 법은 간단하다.

일단 내가 화난 척을 하자.

“지랄 그만.”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비속어만큼 임팩트 있는 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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