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잠깐 주변이 일렁이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배경이 바뀌어 있었다.
크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수십번 넘게 겪었던 현상이었으니까.
무언가 말을 꺼내는 대신에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이제는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있는 것이 편안해진 공간.
한국보다 훨씬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의 가정에서 태어나며, 나름 넉넉한 평수의 가정집에서 성장해 온 크리스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집의 소유자는 한눈에 여유로운 형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둘이 살기엔 너무 넓은 집이라는 생각은 종종 들었다.
정말로 둘만 살던 것이 아닐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만.
“내 눈에는 안 보인다고 했지? 지금 어디 있어? 설마 이 자리?”
“음… 안젤리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를 테니… 아마 자기 방에서 쉬고 있지 않을까?”
“흐응… 개인 방도 줬구나. 어쩐지 빈방 청소를 못 하게 막더라니.”
크리스의 말에 남자가 비수에라도 찔린 듯 움찔거렸다.
이 넓은 집에는 쓰지 않는 방이 여럿 있었다.
그 방 중 몇몇이 지금까지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는…
지금부터 확인할 차례였다.
“찬영. 그 여자 방 어디 있어?”
“찾아가려고? 그냥 내가 이곳으로 불러올게. 넌 여기 앉아서 좀 쉬고…”
“방, 어디야?”
“……”
남자는 최선을 다해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그 노력은 업보란 벽에 막혔다.
평소의 크리스라면 못 이기는 척 남자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있었다.
사실,
크리스는 겉모습과 달리 감정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강력한 위협에, 그 어느 때보다 이성이 날 서 있는 상태였다.
마치 강적을 눈앞에 둔 베테랑 전사처럼.
크리스가 화내든 화내지 않든, 어차피 연인을 공유하게 된 미래는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굴을 계속 봐야 하는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건…
잘못된 방향의 노력,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인가?
‘아니. 이건 필요한 일이야.’
남자는 크리스를 제일로 여김을 인정했다.
그 말이 다른 연인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기에 크리스 역시 이에 비견될 정도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똑똑히 보여야 했다.
감성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이미 절반쯤 빼앗긴 사랑.
첫 번째라는 자리만큼은 빼앗기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연인을 공유하게 생겨도 감정을 억누른 채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넘어가게 된다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도 골치 아픈 일이 줄어서 좋고, 앞으로 가족이 될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 또한 유해진다.
본인 또한 몇 날 며칠 감정 소모할 일이 사라지니 몸은 편해지리라.
허나 다른 연인들이 볼 때.
크리스의 사랑에 대한 깊이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집착은 사랑의 전부가 아니지만, 사랑의 일부 중 집착이 존재한다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
그 천사가 ‘내가 저년보다 찬영을 더 사랑하는데… 왜 내가 첫 번째로 사랑받지 못하지?’ 따위의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후에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하다.
은근슬쩍 크리스의 자리를 넘보겠지.
그런 건방지고 가소로운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
찬영과 크리스, 둘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에 찔러볼 틈도 없다는 인식을 박아 넣어야 했다.
자넷과 멜에겐 성공적으로 박아 넣었다.
그러니 크리스도 더 압박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던 것이다.
이제는…
천사의 차례다.
‘전쟁이지. 비록 정보의 부재로 인해 손 쓸 틈도 없이 찬영을 공유하게 됐지만… 이젠 적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는 한치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다른 여자?
좋다.
불만이 없진 않으나, 패배했음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찬영의 입에서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
그 꼴만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절대로.
“너무 날 서서 대하진 말아줘…”
“이런 상황에서 그 천사랑 하하 호호 하라는 거, 무리한 요구인 건 찬영도 알지? 너무 과하게 호구잖아.”
“그렇긴…하네.”
똑똑히 보일 생각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남자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별로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냥,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해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똑똑.
“안젤리? 들어갈게.”
노크를 마친 남자는 문을 열었다.
귀를 기울여도 방 안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눈치로 볼 때, 남자에게만 허락의 목소리가 들렸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미약하게 차오른 긴장을 숨긴 채 남자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장식품이라곤 하나 없는 방이었다.
종족이 천사라기에 성당과 같이 신에 대한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방을 상상했지만…
남자와 크리스를 반긴 것은 중성적인 인테리어의 빈방이었다.
“음… 안젤리?… 이런 말 하긴 너무 무책임 하지만, 그렇게 돼버렸어. 그, 너무 당황하진 말고…”
남자는 허공을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에게 망상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크리스에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다는 뜻이리라.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정확히 어느 장소에 그 천사가 있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초점이 향하는 곳.
크리스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만 숨고 나오시지 그래? 방금 찬영에게 들었잖아. 그렇게 됐다고.”
그리 말했음에도 인기척이 생겨나는 낌세는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남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눈치였으니까.
그렇게 1분가량의 시간이 지났을 때.
허공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솟아났다.
크리스는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미리 그 위치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분명 소리를 지르며 놀랐을 것이다.
그만큼 미약한 소리도, 기척도 없는 등장이었다.
‘…저,정말로 실존했네. 천사.’
금발. 푸른 눈.
그리스의 전통 복장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의상과, 등에서부터 돋아나 작게 펄럭이는 한 쌍의 날개.
신앙 서린 빛을 뿌리는 천사의 고리하며, 발끝이 살짝 떠 부유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눈앞의 여자가 신의 사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합니다.”
“아앗…! 그,그렇겠죠… 네… 당연히…”
천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알몸으로 벗겨진 걸 보인 것만 같았다.
“당신. 천사라고 들었는데, 정말 맞아?”
“…큼! 그,그렇습니다. 모자란 몸이지만… 신의 뜻을 대리하여, 초월적인 위협으로부터 인간 박찬영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요.”
“음…”
당황 끼가 역력했던 처음의 말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져 갔다.
남자의 말대로 조금 순박한 면이 없진 않으나…
첫인상처럼 머리가 꽃밭인 바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안젤리라고 했나? 아무리 봐도 천사는 아닌 것 같은데.”
“베넷씨. 초면에 죄송하지만, 제가 신의 사자를 사칭한단 오명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천계의 일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식 천사입니다.”
천사는 그리 말하며 예의 바르게 정정을 요구했다.
예상보다 날 선 반응이다.
그렇게 크리스는 알 수 있었다.
이 천사,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지금 이 첫 만남이 나중에 생겨날 상하 관계에 아주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아챘나 보네?’
자넷과 멜이 순순히 넘겨줬던 주도권을 최대한 빼앗아 보려고 하는 중인 것이다.
허나 크리스도 생각 없이 그녀보고 천사 같지 않다는, 어찌 보면 인신공격에 가까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이 천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준비한 말들이 타격이 될지 살짝 걱정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천사의 언행을 보니 충분히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정말 네가 천사라고?”
“증명이 필요하시다면, 만족하실 때까지 언제든지요.”
“음… 신기하네. 지구에 알려진 천사랑 진짜 천사랑은 많이 다르구나?”
“…죄송합니다?”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미간을 약간 좁힌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는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라는 종족은 전부 그래? 연인 있는 남자와 몰래 만나는. 생각해봐. 아무리 봐도 천사랑 거리가 먼 행동이잖아.”
“그그그그그그게, 그게…!”
순식간에 천사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만큼 치명적인 타격이 된 듯하였다.
크리스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까 전부터 이 천사가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를.
자신의 죄가 낱낱이 밝혀졌음에서 오는 수치와 공포 때문이리라.
‘천사니까 무조건 착하겠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것이, 바람을 피우고 있지 않았는가?
방금 크리스가 한 공격에 대해 뻔뻔하게 대응할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허나 안젤리의 성향 자체는 선으로 치우쳐 있었다.
차라리 질척한 진흙탕 싸움이었더라면 안젤리가 유리한 구도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안젤리의 성격상, 방금과 같은 진실을 기반으로 한 양심 공격에는 무척이나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게다가 여태 이 집에 살았다니… 그럼 나랑 찬영이 애정행각 하는 것도 다 본 거야? 관음에 간통을 하는 천사라니, 기가 차서.”
“관음…!! 가,간통…!?”
“반박을 하고 싶다면, 만족하실 때까지 언제든지.”
크리스는 방금 천사에게 들었던 말을 인용했다.
그것이 더 아프게 천사의 양심을 후빌 것이란 걸 알았기에.
안젤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타격당한 듯이 허공에서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어떻게든 심호흡을 하며 박살 난 멘탈을 수습하려는 듯 보였지만…
이미 안젤리의 목소리엔 첫 만남 때 보다 훨씬 더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자,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건 옳지 않은 짓입니다! 저는 제 마음에 솔직하기로 결심했을 뿐이에요! 네!”
“그래? 그럼 네 다른 동료나 지인한테 이 상황을 알려도 떳떳하겠네?”
“응그읏…!!”
안젤리는 단 한마디에 균형을 잃고 벽을 짚어야 했다.
지인이나 동료.
안젤리의 머릿속에 생각 난 인물은 하나였다.
바로 안젤리를 그렇게 믿고 따르는 후배, 아기 천사다.
그런 후배한테 이 추태를 들킨다?
단순히 들키는 상황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풀릴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받아버렸다.
“좋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니, 네가 선택했어야 하는 정답을 내가 직접 말해줄게.”
“정…답? 설마 찬영과 헤어지라는…?!”
“그러라고 하면 할 거야? 아니잖아.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말하는 거야. 그래. 천사인 네가 해야 했던 올바른 답을.”
크리스는 쐐기를 박기로 했다.
애초에 이 천사가 스스로의 양심에 민감하다면, 크리스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네 입으로 먼저 말했어야지. 내가 수십 수백 번 지구로 왔을 때, 숨지 말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사정을 고백했어야지. 물론 상상만 해도 괴롭고, 나랑 찬영이랑 셋이서 엄청 싸우게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서 도망치지 말아야 어른이잖아. 하지만 넌 어떻게 했어?”
“저,저는…”
“눈 닫고, 귀 덮고, 고개만 돌려도 보이는 나를 모르는 척 무시했지. 내가 이 집에서 보낸 시간도 꽤 오래됐는데… 도대체 네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해?”
“……”
“설마 이 상황을 방치했던 건 죄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게. 그러면 정말, 천사란 종족에 대한 정이 마구 떨어져 버릴 것 같거든.”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끝낸 크리스는 팔짱을 풀었다.
사실, 안젤리가 기본이 선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렇게까지 공격적일 필요는 없었다.
양심이 있다면 첫 번째인 크리스의 자리를 탐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허나 말의 강도를 줄이지 않은 이유는 있었다.
멜이나 자넷과 달리 완전한 초면이다 보니, 크리스로선 최대한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는 건,
완벽한 핑계다.
진실은…
‘나랑 찬영의… 그,그렇고 그런 짓도 다 봤다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어린애처럼 애교를 부린 적도 있는데,
그런 쪽팔린 것까지 전부 보였다는 뜻 아닌가?
가끔 코맹맹이 소리를 낸 적도 있는데, 그것도 전부 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오늘 밤, 같이 동침하고 싶다는 유혹도.
남자 몰래 준비한 사소한 밤 자리 이벤트도.
쾌락에 차 거리낌 없이 내뱉었던 신음도.
전부 제삼자에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하나의 화풀이였다.
지고는 못 사는 크리스가, 자신에게 쪽팔린 기억을 안긴 천사에게 하는 복수.
‘으으, 설마 찬영이 외출했을 때 거실에서 속옷 패션쇼 한 것도 봤으려나? 아니면 찬영의 침대 위에서 자,자위 한 것도?… 아니겠지? 제발, 아니겠지?!…’
심지어 남자에게 들켜선 안 될 흑역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크리스가 유독 공격적으로 변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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