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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처음 허락받기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

사실 내게 남아있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긴 하다.

두 번째는 물론, 셋. 넷. 다섯… 그 뒤로도 줄줄이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첫 번째보다 쉬운 건 사실이다.

우선 말을 꺼내기 전에 쉬어가는 텀을 가지기로 했다.

아무래도 선뜻 꺼내기 어렵단 말이지…

“크리스. 치수는 어때?”

“…딱 맞아.”

“그럼… 반지는 마음에 들어?”

“찬영이 고른 거야?”

“응. 좀 특이하게 생겼지?”

“…뭐, 못 끼고 다닐 정도는 아니네!”

크리스는 억지로 퉁명스러움을 가장했다.

내가 그리 판단한 이유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도통 벗어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얼굴도 미약하게 상기되어 보이기도 하였고.

반지의 외형과 관계없이 그 의미가 의미기에 상당히 기쁜 듯 보였으나,

순순히 기뻐하기엔 화가 풀리지 않았으니 톡 쏘는 대답이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저 대답에도 만족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라도, 청혼을 해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거든.

“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름 생각이 있어서 고른 반지이긴 한데… 조금은 걱정했거든. 혹시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항상 끼고 다녀줬으면 좋겠네.”

“그,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나도 뺄 생각 없긴 했고…?”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그리 말하자, 크리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에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자 하였다.

크리스는 나를 힘 없이 밀어내려 하다가도, 못 이기는 척 뺨을 내밀며 키스를 받아주었다.

내 애정표현에 남아있던 화가 풀려가는 눈치였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반지를 향하고 있다.

정말로 마음에 든 걸까?

약간 불안했다.

왜냐하면…

솔직히 반지의 디자인만 두고 볼 때, 약간 각져있고 투박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크리스의 손에 끼워준 반지.

몸체가 금·은으로 이루어져 있고, 헤드 부분에 센터 스톤이 박힌 평범한 청혼 반지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주먹만 한 대리석을 반지 모양으로 조각한 듯, 단 하나의 재료만 사용하여 만들어져 있었다.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등 유명한 보석으로 장식되는 센터 스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투명해… 수정 반지야?”

“혹시 수정이라고 하면 실망할 거야? 별로 안 비싸니까?”

“이익!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킥킥. 농담이야.”

커플링이라면 몰라도 결혼반지가 값싼 수정으로 만든 것이라니…

나를 과분할 정도로 사랑해주는 크리스기에 섭섭함을 느끼진 않더라도,

평범한 다이아 반지를 받은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기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애초에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저건 수정이 아니니까.

“수정 같아 보여?”

“음… 그렇다기엔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으으, 모르겠다. 나 광물에 관한 건 잘 몰라서.”

“아무리 광물을 잘 몰라도… 다이아몬드는 알지?”

“다이…아몬드?…”

“응.”

“다이아몬드라고?”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올 다이아몬드 링(All­Diamond Ring).

말 그대로 반지 전체가 100%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는 반지다.

내가 평범한 대학생이던 시절, 여자 사람 친구들 사이에서 질릴 정도로 이야기가 나돌았기에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만일 시스템의 상점 창에 없었다면 스위스까지 가서 상점 창에 등록을 해야 할 뻔했으나…

시스템 AI는 이런 실용성 없는 액세서리를 잠글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걸까?

다행히 필터링하는 것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 가격은…

‘…아,아까워 말자. 카르마 수급은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으니까. 점점 수입이 늘어나기도 하고…’

10만 카르마.

눈에 띌 정도의 카르마를 이 반지 구입에 사용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가격, 맞다.

이 반지의 가치를 한화로 따지자면 대략 800억에 달한다고 한다.

배트맨이 타고 다니는 차를 50대 이상 살 수 있는 값이다.

배트모빌 50대가 10만 카르마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또 비싼 가격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통짜 다이아몬드라는 걸 듣고 당황한 눈치다.

그럴만하다.

나 역시 실물로 보니 안 믿길 정도로 거대하기도 했고…

손에 아파트를 동채로 들고 다니는 것이니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이게? 전부?… 이,이렇게 큰 다이아몬드 원석이 존재해?…”

“보다시피? 발견된 적이 손꼽을 정도로 큰 크기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해 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리 커다란 원석은 구하기가 힘든 지, 특수한 기술로 다이아의 구조를 변형시켰다고는 하지만.”

“다,다이아몬드 반지인 건 다름이 없잖아…”

“그렇지.”

“…안돼! 너무 비싸! 물론 고맙지만… 엄청 고맙고, 또 감동 받았지만… 이,이,이건 너무 사치 아닐까?!”

크리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당장이라도 벗어 내게 돌려주려 했지만,

벗지 말라는 나의 눈짓에 망설였다.

나 역시 이 반지가 사치임을 부정할 셈은 아니다.

허나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 비싼 거!’를 외치며 무지성으로 카르마를 쓴 건 아니다.

굳이 이 반지를 택한 이유가 있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반지는 너무 무르잖아. 검을 들고 한창 싸우다 보면… 크고 작은 흠집, 분명 생길걸?”

“그,그렇기야 하겠지만…”

“결혼반지가 상해서 슬퍼하는 널 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전투할 때마다 반지를 빼게끔 하는 것도 싫었거든. 아까 항상 끼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 진심이었어.”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빈약한 것 같긴 하지만…

방금 전보다 훨씬 소중히 반지를 쓰다듬는 크리스를 보니, 후회라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뒤 없이 카르마를 전부 써버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늘 쓴 10만 카르마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카르마가 남아 있다.

이 정도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로는 충분하지.

“아무리 다이아라고 해도 깨질 위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이 반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최대한 안전한 게 좋잖아?”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그럴 일 없게 손에서 안 빼면 되지.”

“으으……”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결국 크리스의 손에서 반지가 빠지지 않았다.

이왕 받아들이기로 한 것.

자신이 너무 부담스러워하면 선물한 내가 미안해한다는 걸 아는 걸까?

크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솔직히 감사의 인사를 보내었다.

선물한 것의 가격이 높아진다고 감동도 비례해서 커진다는 건 어린애 같은 생각이지만…

나는 크리스를 속물로 여기지 않았고, 크리스 역시 내게 순수한 뜻만이 존재한다는 건 입으로 꺼내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오해가 우리 사이에 껴들기에는, 서로 상대방을 너무 잘 알았다.

“…고마워. 찬영.”

­ 포옥.

크리스가 완전히 내게 안겨 왔다.

분위기가 애틋해져 간다.

눈에서 나를 향한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듯 보였다.

마치 무엇이라도 용서를 해줄 것만 같은 눈빛.

이대로 가만히 입을 맞춘다면 자연스럽게 침대로 직행하겠지.

그러나 난 크리스를 안아 올려 침대로 옮기는 대신, 꺼내야 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슬슬…

찬물을 끼얹을 때가 다가왔다.

“저기 크리스, 나 할 말이 하나 더… 아니, 두 개…? 세 개?…쯤 남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렵사리 ‘암묵적인 허락’은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하급 포션 한 개를 마셔야 했다.

일부러 멍이 남은 정도로 조절해 마셨다.

죄지은 사람이 멀쩡하게 다니는 걸 보면, 괜스레 더 밉보이거든…

*

“단장. 수도를 떠나기 전에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파계승? 너 왜 얼굴에 멍을 달고 다니냐?”

“아… 하하… 일이 좀 있었어요.”

무척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도 곧 알게 되리라.

내 뒤에 긴장한 듯 서 있는 멜과 함께.

“너랑 멜이랑? 셋이서?”

“…크리스까지 넷이서요.”

“오. 그리운 조합이잖아? 가자.”

심각한 것이 있다는 듯이 무겁게 말했지만,

사람의 분위기를 읽는 것에 큰 재능이 없던 자넷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암시를 준 건데…

‘멜은 무의식적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감지한 것 같으니, 절반은 성공이네.’

멜과 달리 자넷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다.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와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질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미리 말하지 않기로 크리스와 약속을 하기도 했고.

크리스가 내 입을 막은 이유?

그녀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아무래도 경쟁자가 된 이 둘을 압박할 생각인 듯 보였다.

최초의 연인이란 무기에, 정보의 우위를 더해서.

허나 난 대비 없는 상태에서 멜과 자넷이 일방적인 공격을 받도록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크리스는 내 여자다.

내가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이며,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다른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바람을 피우며 생겨난 죄는 내가 짊어져야 하지 않겠어? 자넷과 멜이 아니라.’

각오. 불안. 반가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긴 우리 셋은,

크리스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 끼익…

“왔어? 여보?”

문을 열자 크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팔짱을 끼며 안겨 왔다.

평소 타인의 앞에서 스킨십을 하길 극도로 꺼려왔던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크리스 역시 큰 결심을 하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나를 부른 호칭.

단순한 연인이 아닌 반려자를 부르는 그 호칭에,

멜과 자넷이 얼어붙었다.

“…여보? 크리스, 너 방금 파계승 보고 여보라고…”

“다,단장님. 저기 크리스씨의 손에…”

이것도 멜이 가진 『집중』 특성의 영향이라고 봐야 할까?

크리스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인물은 멜이었다.

그제야 자넷도 크리스의 왼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셋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크리스는, 수줍게 웃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응. 그렇게 됐어.”

그 한마디에 객실은 정적에 차올랐다.

멜과 자넷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거짓이 아닌 사실이며 자넷과 멜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니까.

물론 이렇게 공격적이고 급진적으로 알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여보라…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네. 크리스 너도 목소리에 어색함이 가득했고.”

“어,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크리스가 자넷과 멜 몰래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온 이후에도 조용히 있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잖아?

크리스에겐 미안하지만 계속 방관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찬영이 나한테 청혼했어. 결혼은 먼 이야기 같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거절할 수는 없겠더라. 나와 찬영은 서로를 너무, 너무 사랑하니까.”

“아하…”

“그,그렇구나.”

“둘을 부른 이유도 그거야. 우리 ‘부부’와 가장 친한 두 사람에게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두 분이서 결혼이라… 어,어어… 자,잘 어울려요…”

“……아! 그,그래! 그러네! 청혼이라… 응. 축하해. 파계승, 꽤 하는데?”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크리스의 저 순수한 눈빛 연기를 봐라.

저 말에 내포된 공격성 하며…

내 앞에서만 순한 양이 되었을 뿐, 테라포밍의 미친 교관 어디 안 갔네.

심란함을 억누른 채 축하를 입에 담는 두 명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이대로 크리스에게 주도권을 넘겨줘선 안 되겠다.

나는 크리스의 눈총을 무시한 채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굳게 닫혀있던 입을 뗐다.

“크리스. 둘한테 너무 그러지 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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