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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후우…”

영혼에서 끌려 나온 듯한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눈앞에는 오른쪽 볼이 어색하리만큼 부풀어 오른 남자가 있었다.

크리스의 작품이었다.

본인도 잘못 했다는 걸 알곤 있나 보다.

별다른 말도 안 하고 꾹 닫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자백하면 어느 정도 참작을 해준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죄는 간단하게 감형을 줄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찬영.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어.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그… 천사랑… 헤어지라고?”

“정확해.”

크리스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렇게 말로 다그친다고 쉽사리 끊어낼 수 있을 인연이었다면,

애초에 그녀에게 죄를 고백하기 전에 남자가 알아서 정리했으리라.

허나 그는 조용히 정리하는 대신, 크리스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를 선택했다.

의미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설마 나에게 허락을 받겠다고? 진심이야? 믿기지 않아!’

물론 크리스도 따지고 본다면 큰 소리를 낼 입장이라기엔 애매했다.

전혀 모르던 사실이기에 억울하다곤 하나, 이미 임자가 있는 남자를 건드려 버린 것이니까.

하지만 남자가 제 입으로 선언했다.

이름 모를 천사는 남자의 첫애인 이지만,

그 여자보다 크리스를 더 사랑한다고.

솔직히 그 말을 곱씹을수록 기분이 풀어지지 않는다 하면 거짓이었다.

남자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괴롭히고 싶지만,

또 저런 침울한 눈과 부어오른 볼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마음이 약해졌다 다시 다잡기를 반복하던 그때.

크리스는 절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박찬영이란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고.

“크리스…”

“왜? 설마 안된다고 말하게?”

내연녀의 존재를 알아챈 여자로선 당연한 반응 아닌가?

순순히 허락해 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박찬영을 미워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천사를 향한 적대감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뒤통수를 맞은 연인으로서 마땅히 내야 할 화는 내야겠다.

그것이 크리스의 다짐이었다.

두 여자를 동시에 사귀는 걸 허락을 구한다니…

참 그 발상도 발상이지만,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는 담력 또한 어찌 보면 대단하긴 했다.

그때.

크리스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내연녀는 지금 자기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을까?

“그 천사란 여자는 내 존재를 알고 있긴 해? 정확히는 나랑 찬영의 사이를.”

“조금 복잡하지만… 너와 사귀기 전부터 우리 사이에 대한 공인을 받긴 했지.”

“아,알고 있다고? 그 여자가? 나를? 심지어 허락… 해줬다고?”

“응.”

크리스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천사란 종족은 그만큼이나 자기희생적인 걸까?

자신의 연인을 다른 여자에게 허락해 줄 만큼이나?

하지만 이어진 남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예상했던 상황과는 조금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애는, 크리스 네가 첫 번째인 줄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천사는 스스로를 나의 첫 번째 연인이 아닌, 두 번째 연인으로 알고 있어. 자기를 너와 내 사이에 끼어든 돌로 여기고 있지. …알다시피, 진실은 순서가 다르지만.”

실제론 천사가 첫 번째 연인이며 크리스가 두 번째다.

하지만 천사는 크리스를 첫 번째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오해가 생길까?

답은 남자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천사에게 그리 설명했기 때문이란다.

천사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자신에겐 이미 크리스란 연인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그때의 크리스는 아직 남자의 연인이 아니었음에도.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아직 사귀고 있지 않았잖아?”

“그렇지. 당시 네겐 연인보다 친구가 필요했으니까.”

“……아…! 그,그러네. 그러고 보면 내가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 답을 미뤘…지?”

“오해하지 마. 크리스 널 탓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오랜 과거.

박찬영이란 남자와 처음 만난 뒤, 한창 친해지던 중의 크리스는…

아직 대인 기피증이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렇기에 입맞춤까지 한 주제에 아직 연인 관계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크리스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때의 자신이 대답을 미뤘기에 ‘첫 번째’의 자리를 놓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 천사가 오해를 사도록 한 이유가 결국 뭐야?”

“너도 알겠지만, 그때부터 내가 네게… 반해…있던 것이 그 이유지 뭐… 우리 분위기도 좋았으니까, 시간만 좀 지나면 관계가 발전하리라 생각하고…”

“……”

확실히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때 당시 둘의 사이에 유일하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고,

이는 얼마 뒤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중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방금의 말을 해석해 본다면…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천사보다 크리스를 더 좋아했다는 뜻이 되었다.

남자는 분명 이 뜻을 크리스에게 전하기 위해 이러한 화제를 시작한 것이리라.

“큼. 속내를 전부 말하니까… …많이 부끄럽네. 하하… 아무튼, 그런 이유로 거짓말을 한 거야. …이해했어?”

“…나를 더 좋아하니까, 나랑 사귀고 있다는 핑계로 천사의 고백을 거절하려고?… 하지만, 진상을 모르는 천사는 두 번째라도 괜찮으니까 받아달라 매달린 거야?”

남자는 대답 대신에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긍정의 의미리라.

­ 휙!

“이,이익!”

크리스는 남자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멱살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남자의 부풀어 오른 뺨을 보자 저도 모르게 손에 쥔 힘을 살짝 풀어버렸다.

살짝 몸을 비틀기만 해도 떨쳐낼 수 있을 정도의 미약한 악력이었으나,

남자는 저항을 하는 대신 크리스의 눈을 조용히 마주보길 선택했다.

급하게 화를 내는 척하며 남자의 멱살을 잡은 크리스지만…

그 얼굴은 미약하게 붉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녀의 약점이었으니까.

사실 크리스 본인도 인지하고 있긴 했다.

자신은 방금과 같은 깊고 직설적인 애정 표현에 무척 약하다는 걸.

그리고 그녀가 아는 이 약점은 높은 확률로 남자도 알고 있었다.

크리스가 박찬영을 아는 만큼, 박찬영 역시 크리스를 알고 있을 테니.

“차,찬영! 눈에 뻔히 보이는 수 쓰지 마!! 그런 달콤한 말로 내 기분 좋게 만들어서 은근슬쩍 허락을 받으려는 수작이지?!”

“……”

“봐봐!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맞네! 내가 모를 줄 알아? 안 통해! 안 통하거든?”

통했다.

완전히 통하진 않았으나, 일부분 통했다.

그러나 일부는 여전히 일부일 뿐.

아직 크리스는 이 상황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다.

단둘이서만 연애를 하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 받는 인물은 크리스여야 옳다.

하물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독점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수긍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한평생 너를 제일로 사랑하겠단 건 전혀 수지에 맞지 않았다.

물론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자기도 모르게 살짝 흔들린 크리스지만, 일단 이론상으로는 절대 수긍해선 안 되는 것이다.

‘안돼! 크리스 베넷, 절대 넘어가지 마! 이익! 찬영은 쓸데없이 말만 잘해가지고는…!!’

당연히 그녀가 가졌어야 하는 것을 매력 있게 포장하여 내놓은 그가 괘씸했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입꼬리가 끌려 올라가는 스스로도 미웠고,

그녀의 감정 변화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운 남자가 얄미웠다.

“…노린 게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미안해. 하지만, 다른 건 모르더라도… 내 감정에 대한 거짓말은 안 했어.”

“찬영! 너 진짜 그러기야?”

“널 가장 사랑해. 앞으로도.”

“못 믿어! 안 믿을 거야! 찬영은 이미 나를 한번 속였잖아? 두 번 속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해!”

그녀를 가장 사랑한단 그의 말이 진심인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 내연녀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기에,

크리스로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도 지금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크리스가 고집을 부리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크리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여 귀를 닫았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명백한 부정. 거절. 반대의 의사 표시였다.

“하하. 그렇지. 나도 말로만 믿어달라 하기보다는… 믿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믿어달라 부탁하는 게 내 취향이긴 해.”

“확실히 그런 성실한 부분이 내가 아는 찬영의 성격이긴 한데…”

남자는 자신 있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것이 미심쩍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멱살을 잡혀 있으면서도 저리 웃다니…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언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웃은 이유를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크리스. 네가 내게 있어 첫 번째라는 걸 증명할게.”

그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손에 쥐면 사라질 정도로 작은 물건이었다.

어쩐지 흐리게만 보여서, 크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서서히 남자의 손에 들린 그것의 실체가 드러났다.

작고, 반짝이고,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넛처럼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그래. 마치, 반지처럼.

‘반지? 반지라고?’

어째서 이 타이밍에 반지가 나올까?

어째서 남자가 자신에게 있어 크리스가 첫 번째임을 증명하겠다 했을까?

당연하지만, 크리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인 이상 언제나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모른 척은 할 수 없었다.

‘나 방금… 설마…’

청혼을 받았다.

연인 관계이던 사이를 넘어,

다음 단계로 함께 걷자고 제안받았다.

화를 내던 것도, 살짝 부끄러웠던 것도 저 뒤로 밀렸다.

저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면 볼수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존재해선 안 되는 물건을 마주한 것처럼.

크리스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 이럴 생각으로 자신을 이 세계로 부른 것이다.

“이곳이 네게는 현실이자, 더 친숙한 고향이지?”

“……”

“여기서 식을 올리자. 당당하게, 많은 사람한테 축하를 받으면서.”

“식이라면?…”

“결혼식이지 뭐겠어?”

“읏…!”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의 고향인 다른 차원의 지구도.

자넷이라는 친구를 새로 사귀게 된 판타지 속 세계도.

크리스에겐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낯선 땅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에서 식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타지에 불과한 땅.

결혼식을 올린 그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면, 맺었던 부부 관계가 사라지는 느낌이라 해야 하려나?

식을 올린다 한들 와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리라.

비록 진짜 나고 자란 그녀의 고향은 아니더라도…

이곳에는 몇 년간 쌓아온 인연이 있다.

그녀의 진짜 고향이던 지구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목숨을 걸고 몬스터에게서 지켰던 사람들이 있다.

크리스에게 있어서는,

지금 서 있는 이 세계가 바로 현실이었다.

“음… 난 아이는 좀 천천히 가지고 싶긴 한데, 자세한 미래 계획은 나중에 하자.”

“미…래…계획이라니…”

“크리스 넌 해본 적 없어? 가정을 꾸리는 상상 같은 거.”

“그… 가끔식은…”

“그래? 나도 해본 적 있는데, 내 곁에 있던 사람은…”

“……”

“그건 언제나 너였어.”

손에 힘이 풀리며, 멱살 역시 저절로 풀어졌다.

동시에 독기도 깔끔히 사라져버렸다.

눈에 습기가 맴돌았다.

슬픔 때문에 맺힌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너무 놀라고 기뻐서.

결혼,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했었으니까.

저건 유혹이다.

고개를 끄덕여선 안 된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결혼이라는 대가를 받고 내연녀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걸 알고 있는 크리스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도 어떻게 고개를 저을까?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한계의 한계까지 억제하고 있었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당신과 결혼하고 싶노라 말하려는 걸 인내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크리스는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나랑 결혼해 줄래? 아니, 나랑 결혼해. 크리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선택을 미루지 않았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의 왼손에 반지를 멋대로 끼웠다.

자신이 선택했으니, 이후 벌어질 뒤 책임도 자신이 진다는 듯이.

그에 크리스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상황처럼 크리스의 허락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지 않는다는 건…

지금 암묵적으로 넘어가 주면,

나중에 감정이 가라앉은 뒤 크리스가 다른 연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아도 다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면…? 오늘 이후로 찬영에게 그 천사에 대한 불평은 못 했겠지… 난, 어찌 됐든 수긍한 게 되니까…’

미래에 화를 내려 해도, 남자가 ‘너도 그때 동의했잖아.’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결혼이라는 대가를 받아 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선택을 떠넘기지 않았다.

참,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본인이 지은 죄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어찌어찌 흐름을 타서 크리스의 불평을 막으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가 굳이 크리스의 투정을 짊어지려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억지로 불만을 막아 버렸을 때, 그녀의 속이 갈수록 타들어 가리란 걸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녀를 가장 위한다는 남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은 그도 나중에 가서 바가지 긁히기 싫을 텐데, 그냥 마음 편하게 지금 마무리 짓고 싶었을 텐데, 최선을 다해 크리스를 생각해 주었다.

어떻게 이런 남자를 미워할 수 있을까?

적어도 크리스는 못 했다.

결코 그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우악스럽게 감동을 쑤셔 넣어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나중에 후회할지 몰라도…

공식적인 허락을 결코 해주지 못하더라도…

암묵적으론 허락해 주기로 결정해 버렸다.

“…나쁜 놈.”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양손으로 소중히 쥐었다.

남자는 그런 크리스를 향해 따뜻하게 웃었다.

그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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