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크리스의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
의뢰도 쉬는 중이라 소중한 사람이 다칠 일도 없었으며,
시간에 쫓겨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목숨을 걸고 하루를 연명했던 크리스에겐 바라 마지않던 휴양이었다.
평화로운 하루.
그렇기에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크리스의 연인이 그녀더러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세계로 같이 가자고 했을 때까지는 그러했다.
“쉘터로? 지금?”
“응. 그 전에 지구 좀 들렸… …아! 잠깐, 혹시 상점에 그것도 있으려나?”
남자가 무언가를 생각해내었다는 듯 허공에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크리스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분명 그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를 조작하는 중이리라.
이윽고 남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크리스는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가 기뻐하니 덩달아 기뻐하기로 했다.
“뭐가 잘 된 거야? 축하해!”
“음… 축하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그럼 이제 지구로 가는 거야?”
“아니, 지구는 괜찮아. 이제 들릴 필요 없어졌어. 바로 갈까? 쉘터로.”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쉘터로 갈 이유는 없었지만, 제안을 거부할 이유 역시 없었다.
그렇게 마법사가 실존하는 영화 같던 세계를 떠나 그녀에게 익숙하던 세계로 돌아왔다.
종종 연인을 따라 돌아오곤 했지만…
최근은 지구와 방금의 세계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기에, 어쩐지 주변 공기가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여긴… 내 방이네?”
“오. 이젠 차원 멀미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크리스?”
“슬슬 익숙해질 때 됐지. 그나저나 현대의 디자인을 어설프게 베낀 듯한 이 침대, 오랜만이네. 내 방에 있는 침대인데도.”
“크리스 네겐 이곳이 고향이지?”
“음… 엄밀히 말하면 나도 고향은 지구잖아? 찬영과 차원이 다를 뿐.”
“그러네.”
말은 그리한 크리스지만, 내심 이곳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유년기 지구에서 보낸 시간과 이곳에서 보냈던 시간.
둘 사이의 밀도가 비교하지 못할 만큼 차이 났기 때문이다.
별로 좋은 기억은 없던 곳이지만…
유일하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었던 사람이 곁에 있음에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다.
크리스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여기에 오자고 한 이유는 뭐야?”
“………”
“찬영?”
크리스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은 탓도 있으나,
남자가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리 오랜 기간 남자와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박찬영이란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어디 있느냐 묻는다면?
분명 망설이지 않고 당신의 눈앞에 있노라 답할 것이다.
크리스는 그만큼 자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봤을 때.
지금 남자의 얼굴은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연인은 의외로 행동에 망설임이 없기에,
저렇게 한참을 머뭇거린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된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가 있는 건가?’
정황상 확실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크리스는 장난스럽게 웃던 표정을 바르게 고쳤다.
또한 조용히 남자의 손을 맞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인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찬영. 내게 해줄 이야기가 있는 거지?”
“……응.”
“그럼 천천히 할까? 뭔진 몰라도, 듣는 나도 각오가 필요한 눈치니…?”
크리스는 삐걱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의 연인이 이토록 망설일까?
예상 가는 것은 몇 가지 있었다.
자넷이 용병단 활동의 재개를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의 성격상 위험한 의뢰를 받았다 한들 도망치지 않고 맞설 테니,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한동안 크리스는 남자를 지나칠 정도로 보호하려 들었으니까.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굳이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작정 발목을 잡으려던 생각을 버렸다.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어졌다.
그는 그녀보다 더 강한 무력을 지녔으며, 더 올바른 선택을 할 지혜가 있었고, 더 많은 아군을 곁에 두었다.
직접 그 상황을 보고 겪었는데 어떻게 이를 부정할까.
이제는 알고 있다.
남자를 위협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닌, 위협 속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란 것을.
막아선 위협을 넘어설지, 빗겨 갈지에 대한 판단은 남자가 내리는 것이 옳았다.
‘이게 아니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고.’
그녀의 세계로 굳이 온 만큼, 이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해보고 싶은 직업이 있는데, 이를 하려면 이 세계에 있을 동안 크리스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든지.
결국 크리스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냥 마음을 굳게 다잡는 것뿐이었다.
그 이유는 짐작 가능한 이유가 너무 방대했기 때문도 있으나, 남자가 오랜 기간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크리스? 그… 놀라지 말고 들…으란 것도 좀 심하네. 후.”
“그렇게 밑밥을 마구 뿌려대면 어지간한 거로는 안 놀랄 텐데?”
“그래도 놀랄걸.”
“으음… 그 정도?”
“응.”
“도대체 뭐길래?”
“…미리 말하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내 성격에 이런 거로 장난치지도 않고.”
크리스는 이유 없이 차오른 긴장감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티 나지 않게 그 침을 삼킨 뒤, 조용히 다음 나올 말을 기다렸다.
“크리스. 네가 모르는 내 비밀이 하나 있어.”
“그게… 뭔데?”
“사실 난…”
짧은 한숨.
한숨이라기보다는 기합을 불어 넣는 것이 가까운 듯한 숨결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용기를 채워 넣은 뒤, 숨겼던 고백을 시작했다.
“너 이외에도 연인이 있어.”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너 말고, 현재 내게…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어.”
자연스럽게 써 오던 언어인데도 이해하지 못할 문장이 있다면 이것일까.
크리스는 말에 담긴 의미를 의심했다.
허나 진심이 아니라 치부하기엔, 남자의 눈과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헛들은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은 현실이다.
“거짓말…이지?”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 기억 해?”
“내가 이 세계에 온 날… 그러니까 찬영이 과거로 갔을… 때?”
“응. 나는 널 처음 만난 게 아니었지만, 넌 그때가 나를 처음 만난 때였겠지.”
잊었을 리가 없다.
그 기억은 몇 년이나 크리스의 꿈에서 나와 괴롭혔다.
아직도 떠올리려 들면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히 되살아났다.
왕따로 인한 대인기피증.
백여 명의 인파 한가운데에 던져졌을 때 목을 죄던 이물감.
흙먼지의 까득거림이 식도를 긁는 것이 일상인 훈련.
사람 고기를 먹는 괴물.
몇 달 뒤 저들과 싸워야 한다는 압박감.
점점 다가오는 훈련소의 수료일.
그리고…
의지할 수 있던 단 한 사람.
“그걸,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역시 그러려나.”
“……그래서 누구야?”
지금 상황이 사실이란 건 깨달았다.
그럼 다음 문제가 나온다.
그가 타고난 천성이 착해, 호의에 대한 거절을 잘 못 한단 걸 이용한 개 같은 년이 도대체 누구인가?
“그… 그것부터? 좀 더 나를… 그, 막 욕하거나 때리지 않고?”
“일단 누구인지부터. 그게… 그게 아주 중요하거든.”
크리스는 분노로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녀가 아는 박찬영은 타고난 선인이다.
남을 챙기는 분위기가 전혀 형성돼있지 않던 훈련소 시절.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도태되기 직전이던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뿐만이 아니라 쉘터에 일어난 반란을 홀로 막으려 시도하고, 결국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었다.
기적같이 생명을 부지했단 걸 먼 미래에 알게 되었지만…
그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저울대에 올리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몇 달 전 있었던 왕위 계승 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그 세계란 고향도, 평생을 살아갈 세계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서 날뛰었다.
돈을 벌고자 했으면 현대 지구의 문물을 이용한 수많은 방법이 있었으며,
권력을 얻고자 했다기엔 귀족 작위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범한 면모를 보였다.
크리스의 눈에는 그가 적극적으로 참전한 이유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고통받는 왕국민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것.
‘사람이 이렇게나 착해서는…! 찬영은 처음엔 연인이 있다며 거절했을 텐데, 그 창녀 같은 년이 우는 척하며 동정심을 구걸했을 게 불 보듯 뻔해…!!’
사실 저 행동의 동기는 대부분이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 때문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크리스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찬영이란 사람은 언제나 짓궂은 말만 하지만, 실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선인이라고.
그녀의 연인은 틈날 때마다 ‘나는 네가 평가하는 착한 사람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허나 남자의 뜻과 정반대로,
이러한 변명은 크리스의 생각에 더한 확고함을 자리 잡게 해주었다.
역사 속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정말로 착한 사람들은…
자신이 해준 것 보다 해주지 못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자책에 빠진다고들 하니까.
그런 그들이 하는 말은 일관되었다.
‘나는 결코 선인이 아니다.’
“음… 크리스? 네 생각을 알 것 같긴 한데, 조금 다를걸?…”
“괜찮아. 찬영.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누구야? 그 창… 그 여자는?”
“후우… 모르겠다. 일단 계속 이야기할게.”
“…응.”
“과거에 대한 이야기, 기억난다고 했지?”
“과거? 설마, 설마 내가 찬영을 처음 만났던 때?…”
“맞아. 그때… 너와 이런 사이가 되기 전, 훈련소 건물 뒤 그림자에 숨어서 한창 친해지고 있을 때. 먼저 내게 고백을 해준 여자가 한 명 있어.”
크리스는 충격에 몸을 굳혔다.
남자의 여린 마음에 빌붙은 년에 대해 분노만 했을 뿐이지,
이런 상황은 상상치도 못했다.
‘내가 굴러온 돌이었…다고? 그년이 아니라?…’
이미 연인이 있는 이에게 관심을 보인 그 여자를 내심 경멸했다.
상상이지만, 방금까지 자신들 사이에 낀 여자의 사지를 찢던 중이었다.
그런데 찢어져야 하는 사람은 크리스였다.
그 여자가 아니라.
“특이한 점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라는 건데…”
“천…뭐? 비유적으로 한 말은…”
“아니야. 정말로 날개까지 달린 천사.”
그럴 때가 아니란 건 알지만,
천사가 실존함에 살짝 놀라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금방 제정신을 찾은 크리스는…
상황을 깨닫고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럼… 찬영은 연인이 있으면서… 나랑… 왜? 어째서?…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하나도 안 믿겨. 정말로? 아니지? 응?”
“크리스…”
“난… 난 못해. 이제,이제와서 찬영이랑 못 헤어져. 그럴 거니까.”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미 크리스의 과반수는 박찬영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도 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크리스는 결코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에게 있어 자신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니?
“찬영이 나보고 가라 그래도 난 어떻게든… 질척거린다는 말 듣더라도, 난… 나는…”
“잠깐, 너무 나갔어. 진정해!”
“하아…! 하아…! 나,나에게 있어서 찬영은 첫 번째야. 그날 이후 언제나 그랬고, 이후에도 변함이 없어. 장담해! 그럼… 찬영에게… 나는 몇 번…째야?”
“첫 번째. 나도 네가 가장 최우선이야. 크리스.”
그 말 한마디에 거세게 몰아 쉬던 숨이 점점 진정되었다.
떨림이 차츰 잦아들고, 초점도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비록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한들, 지금의 크리스에겐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진지했다.
말은 안 했지만 크리스가 내심 설레어 하는 무게감 서린 얼굴이다.
그 표정을 보니 방금의 말이 허언만은 아닌 것 같아,
크리스는 안도감에 눈물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크리스는 거대한 자책이 치밀어 올랐다.
이 상황에서 분노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머리론 알면서, 혹시라도 이별의 말이 나올까 매달리게 되는 스스로가 추해 보였다.
참, 쉬운 여자 아닌가?
새장이 열려도 안쪽의 안락함에 빠져 날아가지 않는 새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라도…
그가 그녀의 곁에 남아준다면…
크리스는 예속될 의향까지 존재했다.
“나,난… 내가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찬영. 부탁할 게 제발…”
“크리스! 아니야 이건. 네가 사과하면 안 돼. 난 지금… 너한테 혼나러 온 거야. 사과해야 할 건 나야. 명백하게.”
“………”
와락!!
“널 가장 사랑해. 네가 날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널 놓지 못해. 그래서 말하기 힘들었어. 혹시 정떨어져서 날 버릴까 봐.”
“……정말?”
“진심으로. 부디 내 속마음이 네게 닿길 바라고 있어.”
“……”
“그러니까 날 욕해. 아니면 때리던가. 음… 일단, 그 여자랑 헤어지라고 요구…는 해도 되고. 그건 네 당연한, 첫 번째인 네가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니까.”
“……진심인 것…같네.”
“그래. 맞아. 미안해. 크리스.”
이렇게 끌어안겨 있으니 확실하게 알겠다.
그녀가 알던 박찬영이 맞았다.
따뜻하고, 상냥하고, 자신을 가장 우선시해 주는 그가.
순간 평소의 알던 그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건 착각이었다.
너무나 특이한 상황이 만들어 낸 환영.
그렇다면…
정말로 크리스가 알던 평소의 그가 맞다면…
그가 변하지 않았다면…
두려워할 게 뭐 있을까?
툭툭.
“…찬영. 포옹 풀어봐.”
“응? 아. 으응… 미안.”
“그리고. 이 악물어봐.”
“………”
“안 물어? 이빨 나간다?”
“무,물게. 응.”
남자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것이,
마치 처형대 앞에 선 선고인 같아 보였다.
물론 크리스는 죄책감 따윈 전혀 가지지 않았다.
아까 그녀를 괴롭혔던 자책.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예속되는 것을 받아들였던 그 치욕.
그 모든 것이 분노로 바뀌었다.
분노가 주먹으로 스며들었다.
힘 조절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저쪽 세계에는 포션도 있다 했지?
“이 개자식아!!”
빠악!
“크헉…!!”
그나마 다행일까?
이빨은 부러지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