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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56) (256/310)

〈 256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아라드네의 붉은 실타래.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하드모드 퀘스트를 완료하며 받은 보상이다.

간단히 말해서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얻을 방법을 알려준다.

성능?

직접 써본 내가 장담하는데, 얼마나 유용한 놈인지는 길게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총합 3개를 받았고, 현재 2개는 사용해버렸다.

첫 번째 사용처는 데이지의 목숨을 온전히 구할 방법.

쉬운 길이라곤 결코 말하지 못하겠지만, 결국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용사 박시우를 죽이는 방법.’

물론 그는 아직까지 내게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

완전히 적대 관계까지 돌아서지 않은 만큼,

그를 견제하기 위해 귀하디 귀한 붉은 실타래를 쓴다는 건 무척이나 아까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먼 미래에 전면전으로 번지게 될 확률이 높았다.

도저히 무시 못 할 정도로.

왜 현대 지구에 실질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턱없이 낮으면서,

모든 나라가 국방력을 키우는 것에 예산을 할애할까?

지금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 손 안에 날 선 칼이 들려 있어야, 용사 박시우도 쉽사리 적대를 결심하지 못할 테니.

모든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내 목숨을 용사의 온정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과거, 놈에게 불로의 비약을 먹인 순간.

내가 그의 무력을 뛰어넘는 건 말 그대로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무력적인 쪽은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단, 유일한 문제가 남았는데…

바로 『불패』라는 사기적인 특성이다.

그렇기에 용사를 죽이는 방법을 물은 내게,

붉은 실타래는 그 특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정확히는 ‘운명 대적자’라는 특수한 직업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알려준 것 말고 다른 조건도 있었다니… 어차피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족시킬 조건이라 굳이 알려주진 않은 건가?’

아무래도 복잡한 메커니즘이 있나 보다.

붉은 실타래를 써본 건 이번이 두 번째라, 아직까지는 판단 조건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직업을 얻는 방법 자체는 전부 알게 됐으니 상관은 없으려나?

“데이지, 널 도운 게 뜻밖의 이득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이지.”

“뭐? 무슨 소리야?”

“하하! 그냥, 역시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 것 같다고.”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두 번째 조건은 지구와 테라포밍,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에서 달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도 달성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 이 세계에서 정말, 정말로 손쉽게 달성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내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닌, 차선의 길을 걷길 선택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새로운 연중 소설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전기와 불을 숨 쉬듯 내뿜는 이능력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

‘히어로 앤 빌런’으로.

붉은 실타래는 그곳으로 향하는 게 차선의 길이라 일러주었다.

그래서.

직업 획득의 두 번째 조건이 도대체 뭐냐고?

­ 띠링!

=

특수한 경로로 획득한 정보가 있습니다!

숨겨져 있던 정보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직업, [운명 대적자]

획득까지 (1/2).

1. 특성 생성을 주도 ­ 달성

2. 특성 소멸을 주도 ­ 미달성

=

바로 누군가의 특성 하나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만큼 우스운 이야기가 없다.

『불패』를 없애는 방법이, 다른 특성을 한 번이라도 없애야 하는 거라니?

하지만 나는 충분히 납득했다.

내가 봐온 특성이 대략 10개 남짓한데, 그중 유용해 보이던 것과 그렇지 않던 것이 나뉘지 않던가?

이번에 데이지가 얻은 『구원받은 자』, 크리스의 『자애』처럼 패널티가 극심한 것도 있다.

그리고 나와 이강인이 보유한 『팔방미인』, 자넷의 『양자택일』처럼 패널티 없이 이득만 존재하는 특성도 있다.

심지어는 몇 가지 저급 특성의 경우 대놓고 상위 호환인 특성까지 존재했다.

이처럼 특성이란 그 등급이 암암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불패』의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고 중 최고 등급이다.

그런 특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낮은 등급의 특성 하나를 소멸시키는 것.

이렇게 보니 할만하지 않는가?

‘이미 특성을 소멸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히어로 앤 빌런’에서 그 조건을 달성시키는 건 최선이 아닌 차선의 길.

즉,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정보를 얻으면…

붉은 실타래가 알려준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알게 되겠지.

‘…이 세계에서 자살해서, 길드장 로저가 살아있을 때로 돌아가는 것.’

이젠 고인이 된 로저가 지녔던 『필생즉사』.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면 특성이 소멸한다’는 그 특수한 성질을 이용해,

그의 특성을 지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 된다.

대충 데이지와의 만남을 주선해주면 되겠지.

그럼 난 무척 간단하고 손쉽게 ‘운명 대적자’라는 직업을 손에 얻게 될 것이다.

그를 살리면서 특성만 지우는 건 어렵지 않다.

로저가 계승전에 참전한 이유는 절반은 나 때문이니까.

자넷은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데이지의 경우는 친부와 만나게 된다.

불로의 비약을 만드는 것에 필요한 재료도 다시 구할 수 있어질 테고,

이미 내겐 혼자서도 비약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이 있다.

‘여기까지 보면 전부 행복해지는 이야기지. 잃는 것이 ‘퍼팩트 클리어’ 하나뿐이라면, 저울질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했을 거야.’

하지만…

다른 대가가 하나 더 있다.

이 간단하고 쉬운 길을 버린 이유는, 그 대가를 내가 치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일린.

회귀란 기적에 기뻐하며, 과거보다 웃음이 많아진 그녀가 대가를 짊어져야 한다.

데이지를 치료하기 위해 불로의 약을 한 번 더 만들어야 하니…

27년, 에일린은 그 고통스러웠던 삶을 한 번 더 겪어야 한다.

지금의 그녀에겐 과거의 기억이 온전하니…

총합 50년간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차선의 길을 택한 이유다.

도저히 예비 연인에게 할 짓이 못되거든.

차선의 길이 무지막지하게 어려우면 또 몰라도…

내 능력이라면 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난 ‘히어로 앤 빌런’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계획을 간단하게만 정리한 뒤, 기억 뒤편으로 밀어버렸다.

당장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도 완결짓지 않았지 않은가?

다른 세계에서의 상세한 계획을 오늘 세우기엔…

아직은 과하게 이른 이야기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이 세계의 완결이다.

코앞까지 다가온 만큼 더욱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 띠링!

=

[하얀 고래의 발자취]

현재 완성도 ­ 96%

현재 사망 횟수 ­ 0 (Perfect!)

Happy End.

처리되지 않은 문제가 소량 있으나,

독자의 상상에 맡겨도 되는 수준의 문제.

소설을 완결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

역시.

나는 ‘아니오’ 버튼을 눌러 완결 창을 닫았다.

테라포밍,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하얀 고래의 발자취까지.

이젠 슬슬 완성도의 판정에 대한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소설에 난입한 나.

해당 원작 소설의 주인공.

완성도는 둘 중 한 명의 상황만을 보지 않는다.

이 둘 모두의 상황을 복합적으로 따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간 소설 세계는, 주인공이 2명으로 판단된다는 뜻이다.

하얀 고래 용병단의 입단. 왕위 계승전. 데이지까지.

박찬영의 경우는 메인 에피소드를 전부 끝마쳤다.

그럼 두 번째 주인공인 멜의 경우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나, 박찬영과의 연인관계. 그러니까… 아직 내 연인인 크리스에게 공인받지 못했지.’

멜의 고백을 받아주며, 크리스의 허락을 얻어내겠다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영부영 미룬 채, 가끔 몰래 둘만의 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완벽한 완결을 맺으려면 우리의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크리스에게 때가 찾아왔다는 뜻이다.

네 연인이, 사실은 천하의 개썅놈이었다는 진실을 알게 될 때가.

‘…아무리 나라도 좀 무섭네…’

적절한 타이밍이긴 하다.

요즘 들어 크리스의 트라우마가 거의 다 아문 것 같거든.

당장 최근만 하더라도 홀로 연금 공방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있기를 집착하려는 낌세는 없었지 않은가?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단 말이 있듯이, 이렇게 끝없이 미루다가는 크리스가 내 바람을 눈치챌 수도 있다.

그 왜, 크리스는 의외로 이런 곳에서 감이 좋기도 했고…

바람피는 현장을 들키느니 내 입으로 고백하길 택하겠다.

현장 적발당한 순간, 솔직히 고백하려 했다는 변명도 안 통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좋은 타이밍을 기다린다며 미룬다면, 그건 겁먹은 쫄보의 변명이다.

남자답게 가자.

뺨 맞을 짓 했으니 맞아야지.

“후… 좋아! 데이지. 새 삶을 얻은 것, 축하해. 그건 그렇고… 나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중요한.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겨서.”

“…아. 너 짐 챙겨야 하지? 그… 나,나도 챙겨야 하나?”

“큭큭. 너 여행 가본 적 없지? 그럼 나한테 맡겨. 침낭이나 식량, 노숙 용품 같은 건 내가 챙길게. 넌 네 짐만 챙겨.”

“으음… 내가 들 수 있을 정도만 챙겨야 하려나? 끙… 얼마 못 챙기겠네.”

“아니. 지난번에 내가 허공에서 책 꺼내는 거 봤지? 그 공간 안에 네 짐을 넣을 거니까, 챙기고 싶은 건 다 챙겨도 돼!”

“…전부?”

“연금 공방 전체를 챙기려는 것만 아니면?”

데이지가 작게 ‘쓸모 있군, 쓸모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금술사인 만큼, 여러 재료나 도구들을 전부 챙겨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쁘나 보다.

그렇게 나는 데이지를 남겨 놓은 채 연금 공방을 떠났다.

오늘은 날씨도 맑고, 잠도 푹 자서 컨디션도 최상이다.

그러나 유독 걸음이 무거웠다.

머지않아서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익숙해진 여관의 입구.

어쩐지 오늘따라 쩍 벌어진 호랑이의 아가리로 보였다.

‘도망치지 말자.’

나는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치며 용기를 불어넣은 다음,

최후의 전투를 앞둔 것 마냥 비장한 발걸음으로 여관에 들어갔다.

­ 끼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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