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새로운 특성의 발현.
생각해보면 당황할 정도로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다.
안젤리가 말하길,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특성 또한 존재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특성이 생기는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충격이네…’
그만큼 특성이란 희귀하고 특별한 능력이었다.
원작 소설의 주인공이나, 3대 용병단의 단장쯤 되어야 있을 법한.
띠링!
긴장을 안은 채 데이지의 특성창을 열어보았다.
내가 겪은 바로는, 특성이라고 모두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디 이 특성에 엄한 패널티가 없기를.
=
『구원받은 자』
세계가 옭아매던 강력한 운명을 뒤틀었습니다.
허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개척한 길은 아닙니다.
포기했던 미래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 지펴주고,
쓰러지지 않게 기댈 곳을 만들어 주었으며,
어두운 길을 앞서서 걸어가 준 ‘길잡이’가 있습니다.
하나의 운명이 사라지면,
그 빈 자리에 다른 쇠사슬이 채워집니다.
쇠사슬은 기존에 꺾여 사라졌던 운명보다 훨씬 강하게 옭아맬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 운명이 나쁜 것이냐 물으면,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길잡이’의 곁으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운명 또한 ‘구원받은 자’가 ‘길잡이’의 곁에 있기를 종용합니다.
길잡이 박찬영(지구)
길잡이와 함께 있을 때 영감이 떠오를 확률 상승 (大)
길잡이와 함께 있을 때 스트레스 영구 면역
길잡이와 떨어져 있을 때 상태 이상 ‘우울장애’, ‘무기력’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길잡이의 곁에 있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행동합니다.
* 획득에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특성입니다. 필요조건, ‘길잡이’의 존재.
=
“콜록! 콜록!”
“푸핫! 야야. 쪽팔리냐? 네가 헛기침을 다 하게. 킥킥!”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히힛!”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그만큼 극단적인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있을 땐 사기적인 버프 효과를 받고,
나와 멀어지면 말도 안 되는 패널티가 달라붙는다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가?
‘물론 떨어질 생각은 없긴 했는데… 설마? 잘 때도 붙어 자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적힌 그대로의 의미로 떨어지면 안 되려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당장도 그녀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를 보고 유추했을 때, 같이 일상을 보내는 정도면 패널티를 받지 않으리라.
밤에 잘 때도 함께하고, 화장실 갈 때, 씻을 때조차 함께 한다?
그녀가 어두운 밤, 혼자 화장실을 못 가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
…아니.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떠보도록 하자.
위험 요소에 대한 배제는 최대한 확인하는 것이 좋다.
“야. 데이지.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니면, 같은 방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괜찮아?”
“하하핫!… …잠깐, 뭐?”
“그러니까 여관방이 모자라면 한 침대에서 동침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너는 내 멋대로 데리고 다니는 건데, 널 위해 다른 동료의 침대를 뺏을 수는 없잖아? 우리 때문에 노숙하게 된 동료가 뭐라 생각하겠어.”
“도,도,동침?!”
내 충격적인 발언에 데이지의 몸이 굳었다.
같은 방도 아니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라…
정말로 흔치 않은 상황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확률은 아니다.
데이지도 그걸 깨달았나 보다.
분노 때문인지 수치 때문인지, 점점 얼굴이 붉어졌으니까.
“미,미쳤어? 내가 너랑? 너라앙? 차라리 내가 노숙을 하면 했지, 절대 도,동침은 안 할 거니까!”
“역시 그러려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그녀의 외견은 10대 초중반에 불과하지만, 내면은 나와 동갑내기의 성숙한 여성이다.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와야지.
내심 안도했다.
동침할 수도 있다는 말에 이토록 부정적인 것을 보니,
정말로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지가 특성의 영향을 과할 정도로 받았더라면?
분명 어쩔 수 없는 척 수락했으리라.
아무래도 부작용 걱정은 좀 덜어도 될 것 같다.
“애인도 있는 놈이! 나,나랑… 넌 죄책감도 없어?!”
“야. 죄책감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그래도 난 네 과거를 알고 있는 만큼, 그런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우리란 건 이해가 가네.”
“………그렇기도 하고… 또 생각해 보면… 음… …별 얘기를 다 하려 했네.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뭐. 나는 믿고 있으니 정 안될 건 없다고? 큭큭. 괜찮아. 말 안 해도 다 아니까.”
“내,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 어? 멋대로 유추하지 마, 이 개자식아!”
데이지가 화를 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먹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힘 스텟이 떨어져서 그런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얘는 이 근력 상태가 고정되었으니, 평생 놀려 먹어도 되리라.
평생 놀려 먹으려면 평생을 곁에 두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이미 데이지의 특성을 읽은 순간, 우리에게 이별이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하나 더.
‘난 이제 늙어 죽으면 안 되는 몸이 돼버렸네.’
아무래도 영생을 얻어야 할 동기가 생긴 것 같다.
나는 유한한 삶을 살고 있고, 데이지는 불로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백여 년 뒤.
내가 수명을 다해 죽게 되면…
남겨진 데이지가 어떤 삶을 보내게 될지 뻔히 보이지 않은가?
그녀의 운명을 비튼 것도 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 것 역시 나다.
언제나 그랬지만…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도망치는 건, 나 스스로가 허락하지 못한다.
끝까지 책임을 져라?
오히려 내 쪽이 원하는 바다.
나는 잔뜩 성이 난 데이지를 보곤 슬며시 웃으며 다짐했다.
“하하하. 반쯤 농담이니까 그만 화내.”
“그럼 화나게 하지 말아줄래? 어?”
“아무튼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나름의 대안은 있어. 너무 걱정 마.”
둘이 같은 침대를 쓰지 않는 법이라…
간단하다.
내 침대를 데이지에게 양보해 주고, 나는 크리스나 자넷, 멜과 함께 침대를 나눠 쓰면 된다.
그녀들은 내 연인이니까.
음…
후보가 세 명이나 있다니, 의외로 여유롭네.
로테이션도 가능하잖아?
나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나 혼자 침대 쓰고, 너랑 네 연인이 같이 자는 거?”
“오. 맞아. 알고 있었구나?”
“…그건 좀 싫은데.”
“응? 그게 왜?”
“그,그러니까… 그으…… 아! 그래! 더러워! 네가 막 그… 애,애정행… 큼! 네가 느끼한 표정을 짓는 게 연상이 돼서 기분 나쁘다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 으으…”
“느,느끼한 표정…?”
내 턱을 쓰다듬었다.
평소 연습하던 표정 연기 중, 비슷한 느낌의 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진중한 표정과 깊은 눈빛?
데이지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종종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지었던 표정이니까.
‘…크리스나 자넷은 이 표정 엄청 좋아했었는데…’
찔리는 구석이 있기에 더욱더 아팠다.
젠장.
“아무튼 그런 건 내 인식 밖에서 해! 그게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이자 예의잖아!”
“어쩐지 이유를 껴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네. 알겠어.”
“…뭐, 나도 눈치껏 자리 비울 거니…까…?”
데이지가 미간을 좁히며 그리 대답했다.
어째서 의문형으로 말을 맺었는지 신경 쓰였지만, 이내 그 대답에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의 데이지는 상당히 혼란에 차 있다.
설령 왜 그랬냐고 묻더라도, 본인조차 이유를 모른다는 얼굴이니.
“그럼 날 따라오기로 결정한 거지?”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그… 대가는 받아버렸고.”
“맞아. 이제는 무를 수 없다고. 큭큭.”
“……응.”
데이지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무래도 아직은 실감이 안 나나보다.
쉽사리 받아드리기 힘든 이야기겠지.
5분 전까지만 해도 시한부의 삶을 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수명이 무한하게 늘어났다니?
하물며 불로의 비약이 인상 깊은 외견을 가진 것도 아니다.
어디 다른 세계의 누구처럼, 자각몽 아닌가 의심할 만도 했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다 보면…
빼앗겨 가던 청력이 더이상 퇴화하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때가 찾아올 때까지 데이지가 불안해 빠지지 않도록 옆에 있어 주면 된다.
“…그러고 보면 고맙단 말도 안 했네. 아직…”
“이미 몇 번 들어서 괜찮아.”
“정말로. 이번이 몇 번째 감사 인사인 걸까?”
데이지는 포근하게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리 솔직해질 때마다 좀 당황스러웠다.
평소엔 그리 가면을 쓰면서 용케도 고맙다는 말은 전혀 아끼질 않으니까.
보통은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을 더 어려워하지 않은가?
첫 만남.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준 힐링 포션을 본 순간부터 눈치채긴 했다.
데이지가 자책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절대 악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깊게 알아갈수록, 데이지라는 사람은 참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용병단 단장한테 허락은 받은 거야? 나에 관한 이야기.”
“아직은. 그래도 괜찮아. 방법이 있으니까.”
“…네 애인에게 설명은?”
“그것도 아직. 괜찮아. 이것도 방법이…”
“하아… 이 똘박아! 결국 아무것도 준비 안 됐단 말이잖아!”
데이지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는 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데이지…
뜬금없지만 최근 들어 웃음이 많아졌네.
죽상을 짓는 것보다야 보기 좋긴 하다.
“하핫! 뒤지게 어려운 부분은 혼자 힘으로 다 해결해 놓고, 정작 사소한 부분은 허술한 게… 딱 너답네.”
“…나 그런 이미지였어?”
“전형적인 천재에 호구지 뭐. 같이 가서 감성팔이나 좀 할까? 대충 줄 떨어진 고아 연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킥킥!”
전형적인 천재라…
그러고 보면 역사 속 천재들은 의외로 허당끼가 많다고 했다.
유명한 자연 철학자인 탈레스도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 우물에 빠졌단 일화도 있고.
나는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타입이긴 하지만…
해명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말해봐야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저리 즐거워하는데 초치기도 뭐 했다.
‘데이지도 성공적으로 설득했고… 슬슬 일단락됐나?’
그럼…
아까부터 내 시야 구석에서 반짝거리며 새로운 알림이 왔다 존재감을 내뿜는 시스템 창을 불러올 차례가 온 것 같다.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눈에 띄는 거지?
띠링!
=
특성의 자연 생성 과정을 관찰하셨습니다.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주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조건 만족!
특수 직업에 대한 힌트를 얻으셨습니다!
직업, [운명 대적자]
획득까지 (1/2).
1. 특성 생성을 주도 달성
2. ?? 미달성
=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당황했다.
운명 대적자, 처음 들어본 직업이어서 당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들어본 적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 난 저 직업의 효과는 물론,
가려져 있는 저 2번째 조건의 내용까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로 사용한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가 밝혀준 길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 대적자라는 직업의 효과가 뭐냐고?
간단하고, 단순하다.
용사의 특성.
『불패』를 무력화시킬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