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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화 〉 하얀 고래의 발자취

* * *

하얀 고래 용병단은 현재 수도에 머물러 있다.

지하 유적 발굴 때 도착했으니, 아마 두 달은 머물렀나?

따로 거점을 두지 않고 떠도는 이들 특성상 꽤 장기간 머문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 커다란 여관을 통째로 빌려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멜을 포함한 대부분의 단원은 5인실에서 단체 생활을 하지만…

나는 크리스와 함께 2인실을 쓰고 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내 능력이 그들의 우위에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평소 사내 정치를 잘해놓았던 탓인지 별다른 반발도 없었다.

덕분에 오늘 아침도 나와 크리스는 편안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난 이미 맞이했고,

크리스는 맞이할 예정이었다.

어젯밤 나한테 시달렸기 때문인지, 얘 아직 자고 있거든.

“크리스? 슬슬 일어나야 해.”

“하으… 아침 식사?…”

“응. 지금쯤이면 다들 모였을걸? 자, 여기 물.”

“으으응… 고마워…”

크리스는 반쯤 감은 눈을 한 채 건네준 물병을 받았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사이 나는 엉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고,

흘러내려 가슴골이 살짝 보이는 잠옷도 제대로 바로잡아 주었다.

연애 초기에는 일어나자마자 조금이라도 내게 잘 보이려고 거울부터 찾더니…

이젠 자연스럽게 내 손길을 즐기는 모양이네.

­ 스윽.

그때, 잠결이 어느 정도 가신 크리스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끌어안아 침대에서 일으켜 달라는 뜻이다.

“킥킥. 어리광쟁이 다 됐네?”

“찬영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어…”

누군가 들으면 핑계라 생각하겠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난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크리스가 길어진 연애 생활에 나태해졌다기보다는,

내가 챙겨주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란 걸 깨닫고 마음껏 기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둘만 있을 때 한정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운 크리스를 안았다.

내게 전부 기대는 것이 솔직히 귀엽기는 한데…

좀 교육이 필요해 보이지 않나?

속으로 그런 핑계를 대고, 장난을 치기로 결정했다.

­ 스윽.

“으윽…”

“으윽? 찬영, 왜 그래?”

“미안. 무거워서.”

“아! 죽을래? 안 무겁거든?”

크리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나는 그녀의 허리와 다리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크리스가 내 목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저기 크리스. 이 팔은?”

“응? 왜?”

“설마 안 내려 올 거야?”

“킥킥. 응!”

곤란해졌네.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팔의 힘을 풀 수는 없었다.

크리스의 근력이면 충분히 내게 매달릴 수 있겠지만, 혹시나 바닥으로 떨어져 다칠 수도 있었기에.

“어… 그럼… 이대로 1층으로 내려가?…”

“으음… 역시 내려와야 하겠지?”

“아침 먹어야지. 1층으로 내려가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럼 다시 대답해 봐. 나 무거워요? 안 무거워요?”

“…다들 아침 식사 때문에 우리 기다릴 텐데.”

“무거워요? 안 무거워요?”

올바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는 계속 이러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음…

한때는 남들 앞에서 미친 짓도 서슴지 않았던 크리스지만,

본성은 타인의 앞에서 스킨십하는 것에 극도로 내성이 없다.

특히 그 스킨십에 진심이 어려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정말로 내가 그녀를 안은 채 1층으로 내려가는 상황을 바랄 리 없다.

그러니 여기서 출발하려는 낌새를 보인다면 크리스는 기겁한 채 내 품에서 내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뒤 없는 행동을 해버린다면?

하루종일 토라진 진 그녀를 확정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평소보다 볼이 1.2배쯤 부푼 크리스는 정말 귀여웠지만, 내가 귀여워하는 걸 알면 한층 더 뾰로통해진다.

나는 그런 가불기에 갇히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장난이었어. 사실 하나도 안 무거워.”

“흐흥. 그렇지.”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크리스가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술을 맞췄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모닝 키스를 즐기고 있을 때.

­ 똑똑똑.

“찬영님? 단장님이 밥 먹으러 후딱 내려오라고 전해…”

­ 끼익! 쾅!!

목소리로 추정하건대 멜이 분명한 사람이 문을 열더니, 우리의 키스 장면을 보곤 다시 문을 강하게 닫았다.

단 1초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나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뒷모습만 보였다.

불행인 점은…

“으으아! 나,나 멜씨랑 눈 마주쳤어…!!”

크리스가 정면으로 보이고 말았단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주홍빛인 머리카락 색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수치스럽긴 하나 보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연인 사이인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으으… 누구한테 보이는 건 다른 문제야…”

“…한때는 남들 앞에서 가슴도 보여… 억!”

­ 퍼억!

“그,그건 일이었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서 훈련생을 살리려 들었는지 알면서 이러기야?!”

“…큼. 나 때문이지… 미안…”

“찬영. 잘 들어. 그 이야기 한 번만 더 하면, 나중에 입으로 해줄 때 이빨 일부러 세워 버릴 거니까…!”

그 서슬 퍼런 협박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까 하루종일 내게 매달린단 협박과는 차원이 달랐다.

크리스의 진심은… 이 정도의 위력이구나.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약속할게. 앞으로 그 이야긴 금지.”

“…그래. 처신 잘 하라구.”

인터넷에서 이상한 걸 배워온 크리스가 검지 손가락을 작게 흔들며 위협했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것도 잠시.

방금 지나갔던 상황을 다시 떠올린 크리스의 몸이 굳었다.

“하아아…”

“땅 꺼지겠다. 그렇게 쪽팔려?”

“나… 앞으로 다른 단원들 얼굴 못 봐…”

“괜찮아. 걔가 방금 본 걸 누구한테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겠지?”

“응. 네가 못 보게 되는 건 멜의 얼굴뿐이야. 큭큭.”

“이 씨! 위로해 줘서 차암 고마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를 수는 없었다.

매일 해 뜰 때까지 술을 처마시는 용병이 대부분인 이 세계에선,

용병단의 단체 점호는 아침에 하거든.

­ 터벅. 터벅.

“단장. 좋은 아침입니다.”

“뭐야. 파계승 너, 즐거워 보인다?”

“오늘 날씨가 꽤 좋잖아요?”

“구름 잔뜩 꼈던데…”

자넷은 떨떠름하게 날 쳐다보았고,

인파 사이에 숨은 멜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 하얀 머리 꼬맹이는 아무래도 내가 즐거워 한 원인이 크리스에게 있다 생각했나 보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닌가?

크리스에게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기는 하니까.

아무튼.

그렇게 아침 점호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단, 한가지 공지 사항이 있었는데…

“다들 슬슬 주머니 비어 가지? 이젠 영업을 다시 시작해 보자고.”

바로 하얀 고래 용병단이 곧 수도를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확실히 1달은 넘게 쉬었으니 많이 놀기는 했다.

지갑이 빈 것과 별개로,

더이상 공백기를 가지게 되면 전투에 대한 감을 잃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도 했고.

‘아슬아슬했네. 정말.’

이곳 시간 기준으로, 데이지에게 받은 마지막 연금술 수업은 바로 어제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잠깐 하얀 고래 용병단을 탈퇴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난 반드시 불로의 비약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다행히 완성된 불로의 비약은 내 아공간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

이젠, 데이지에게 깜짝 선물을 해줄 일만 남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이유였다.

“당장 내일 출발할 건 아니지만, 다들 미리미리 짐 싸 놓도록! 수도 사람한테 빌려준 돈 있으면 빨리 받고, 도박장에 진 빚 있으면 내빼지 말고 갚아. 알간?”

자넷의 말에 모든 단원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하얀 고래는 동격의 용병단에 비교하자면 적은 머릿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

50여 명의 인원이 움직이는데 준비 시간이 짧게 걸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쯤 떠날 예정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자넷을 찾아갔다.

“다음 의뢰를 찾는 건가요?”

“그래. 꽤 오래 쉬었잖아?”

“그렇긴 했죠. 단장님도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나름 마음의 정리는 되신 것 같고.”

“…어야.”

로저의 이야기다.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것이, 자넷은 제 컨디션을 9할 이상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제대로 그를 떠나보낸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나온다면, 필연적으로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좀 쑥스럽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자넷 역시 볼이 살짝 상기되어 보였다.

“수도를 떠나는 것, 며칠 뒤를 생각하고 계시나요?”

“한 사흘 뒤? 너무 질질 끌어봐야 좋은 건 없으니까. 돈 벌러 후딱후딱 움직여야지.”

“하하. 단장 답네요.”

‘하얀 고래의 발자취’를 완결시키는 것.

그건 우리 용병단이 수도를 떠나기 전에 해야 한다.

만약 새로운 의뢰를 받게 된다면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한 것이 돼버리니까.

분명 소설의 완성도가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빨리 완결을 해야 해. 그럼 아직 문제로 남아 있는 게…’

이 세계에서 맺어지지 않은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다.

이를 해결하고 나면 간당간당하게 100%를 넘지 못한 완성도는 100%를 넘길 것이다.

그때가 바로 내가 기다리던 완벽한 완결의 때다.

첫 번째로 데이지의 이야기.

이건 문제 될 것 없다.

오다 주웠다며, 불로의 약을 건네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하… 이건 좀 골치 아프네. 일단, 첫 번째 문제부터 해결하고 생각하자.’

3일의 시간만이 주어진 만큼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나는 크리스에게 인사를 한 뒤, 연금 공방을 향해 움직였다.

*

‘기분 좋아 보이네…’

데이지는 턱을 괸 채 눈앞의 남자를 관찰했다.

입가는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발끝은 일정한 리듬을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귀가 좋지 않아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보. 수업이 끝난 게 그렇게도 좋은가?’

확실히 대단한 업적이긴 했다.

고작 한 달의 시간 만에 무지렁이에서 불로의 비약을 홀로 만들 수준까지 성장하다니…

그가 기뻐하는 것과 별개로, 데이지는 수업이 이렇게나 일찍 끝난 것이 호재인지는 판단하지 못했다.

적당한 수준으로 일찍 끝냈으면 그녀 역시 솔직하게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과하게 일찍 끝나버린다면…

남자와 매일같이 나누던 연금술 관련 잡담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연금술이란 주제를 제외하고 잡담을 이끌어갈 재주 따위, 데이지에겐 없었다.

그런 만큼 앞으로의 이 공방 안은 정적이 주로 자리할 것이다.

사실 요 한 달이 특이했을 뿐, 기존의 둘의 분위기로 돌아온 것뿐이지만…

요 한 달간 떠들썩함에 익숙해져 버린 데이지는 어쩐지 쓸쓸함을 느꼈다.

중독 증세였다.

초콜릿을 먹기 전까지는 평범히 가정식을 먹던 어린아이가,

그 달콤함을 안 뒤엔 초콜릿만을 찾게 되지 않은가?

데이지가 처한 상황은 그와 비슷했다.

“데이지. 다시 책 읽는 너로 돌아온 거야? 근데 너 더이상 책’만’ 읽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 왜, 이유도 사라졌고.”

“…아. 그건 그런데, 이젠 몸에 익어버려서.”

“하긴, 네가 책을 놓은 모습이 더 어색할 것 같긴 해.”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데이지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 척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병신새끼.

뭐? 책 읽는 게 몸에 익어?

멍청하게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책은 놓아야겠다.’라고 답했다면 얼마나 좋아?

봐봐.

내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니까, 쟤는 방해 안 하려고 말 안 걸잖아.

대화는 익숙지 않았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한 화술은 더 익숙지 않았다.

그렇다고 데이지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용기는 부족했다.

그야말로 아싸 중 아싸.

데이지는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걸 느꼈다.

‘이… 시. 내가 저 호구한테 쫄 이유는 뭐야? 그냥 당당하게 말을 꺼내면 되는데!’

부족한 용기를 억지로 끌어낸 분노로 대체했다.

말을 절지 않기 위해 뇌 속으로 몇 번 시물레이션을 해본다.

아무 향,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차로 목을 적셔서 성대의 긴장을 풀었다.

이제 이론은 완벽했다.

그렇게 데이지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기 직전.

“크흠. 그러고 보…”

“아. 데이지. 책 읽는데 자꾸 방해해서 미안한… 응? 방금 뭐 말하려 했어?”

“아니? 전혀 아닌데?”

데이지는 즉답했다.

왜 부정했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어? 응. 그렇구나.”

“그런데 왜?”

“아. 내 용병단, 3일 뒤에 수도를 떠난다더라.”

“…뭐?”

성공적으로 남자를 속여 넘겼음에 안도하고 있을 때.

소리 없는 폭탄이 떨어졌다.

‘떠난…다고? 아니, 하지만 떠나지 않기로… 아…!!’

그리고,

데이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불로의 약을 홀로 만들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

애초에 약속한 건 수업이 끝날 때까지만 수도에 남는 것.

남자가 그녀의 곁에 남아야 할 이유는…

사라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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