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True Ending]
* * *
툭툭.
에일린은 자신의 옆구리를 치는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간이 큰 년이면 그녀의 단잠을 이런 식으로 깨울까?
듣기로는 직업 군인조차 선임을 이런 식으론 안 깨운다던데.
에일린은 냉정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황해 버렸다.
“어,어어? 혹시 루시?…”
“루시가 아니라 록시다 이년아. 너 혹시 약 먹었냐?”
“아. 그래. 록시. 미안해. 오랜만에 봐서…”
“너 설마… 우리가 재벌 2세들은 맨날 마약 한다고 놀려서 진짜 손댄 거?”
그녀를 찌른 인물은 마악관 졸업 이후 연락이 뜸해지다 결국 끊겼던 오랜 친구였다.
이상한 점이라면, 20여 년 만에 만나는 동창치고는 너무나 앳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의상 역시 이상했다.
“아. 너 같은 찐따가 그럴 리는 없나.”
“록시. 너 교복은 또 왜 입고 있…”
“야야. 에일린. 컨셉 잡는 건 알겠는데, 좆노잼이니까 그 정도만 하고 저기 봐봐. 저기.”
쏟아지는 비속어들.
에일린은 얼떨결에 록시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방향에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동공.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
화룡점정으로, 호불호도 없이 여자를 끌어당길 것이 분명한 외모까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을 한 남학생 한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일린은 멍하니 그 장면을 응시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상황.
“…꿈인가?”
그렇게 치부하기엔 상황이 이상했다.
꿈에서는 감각을 못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아까 그녀의 오랜 친구가 옆구리를 찔렀을 때, 선명한 감촉을 느끼지 않았던가?
꼬집!
“윽…”
혹시 몰라 볼을 꼬집어 봤지만, 남은 것은 꿈이 아니란 확신뿐이었다.
…볼에 새겨진 손톱자국도 남긴 했다.
“록시. 설마 이거 현실이냐?”
“어. 확실히 비현실적인 외모긴 하네. 와… 재는 돈 한 푼 없어도 저 얼굴이면 놀고먹겠다.”
“갑자기 공중파에 데뷔했다고 해도 난 안 놀랄 것 같은데.”
“쟤도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지? 우리 후배?”
이 대화 역시 어디선가 들어 본 것만 같다.
이제는 슬슬 알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 꿈… 회귀… 설마 과거로…?’
당장 자신만 해도 그리웠던 대학 시절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온몸에는 미성년자 특유의 활력이 가득했고,
풍족한 숙면을 취한 몸의 정신은 과할 정도로 뚜렷했다.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미래의 에일린과 달리.
꿈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옆에 선 친구에게 지금의 연도를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급박한 것이 있었다.
“야 에일린. 넌 가위바위보 안하… 어어? 너 어디 가냐?”
타악!
다급함이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눈치챘을 땐, 에일린의 몸은 남학생을 향해 뛰고 있었다.
이미 스쳐 지나가기 직전이다.
조금만 지체하면 늦을 수도 있었다.
“저기!”
“네?”
남학생은 에일린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남자는 에일린을 처음 본다는 듯 의문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후배다.
친구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이름을 잊었을 리 없다.
후배님.
박찬영. 찬영아.
에일린은 입에 맴도는 말을 뱉어내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혹시 후배도 자신을 기억할까?
원인 모를 무언가에 바짝 긴장한 에일린은,
최선을 다해 다음 뱉을 말을 골랐다.
“있잖아. 그…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
말을 뱉은 즉시 후회했다.
너무 작업 멘트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에일린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받아드릴지는 분명했다.
그에게 치근거렸던 수많은 여선배 중 한 명으로 기억하겠지.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 같다니?
하필이면 대사도 싸구려 중 싸구려였다.
그녀가 초등학교 시절에나 유행했을 법한 구린 작업 멘트.
대충 다음 대사는 ‘아! 우리 어젯밤 꿈에서 만난 것 같아!’ 정도일 것이다.
‘아,아아…!! 아아악!! 다시! 처,처음부터 다시 하면 안되나?’
속으로 기도해봤지만, 회귀라는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다.
에일린이 눈치껏 살펴보건대, 후배의 언행에는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느낌이라곤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표정 연기에 능숙하다곤 하지만…
에일린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아무래도 기억을 가진 채 돌아온 건 에일린 하나뿐인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후배에 대한 에일린의 첫인상은 ‘추근대던 수많은 여선배 중 한 명’을 벗어나질 못할 것처럼 보였다.
미래를 읽은 에일린이 울상을 짓기 직전.
“푸훗… 큭큭…”
“저… 후,후배님? 왜 웃어?”
“아니, 킥킥. 볼에 그 선명한 손톱자국은 뭐에요? 푸흐흡…”
“아… 이거… 이건 그게… 음…”
에일린이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후배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버,벌래가 물어서. 손으로 긁은 거야.”
“거짓말. 큭큭! 간지러워서 긁은 상처가 그리 남나요? 마치, 마치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위해 꼬집은 것만 같… 푸하핫!”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에일린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럼에도 한 줄기 기대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일린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걸 보니, 어쩌면 그도 미래의 기억이 남은 건 아닐까?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 반.
혹시 모를 기대를 담은 마음 반.
에일린은 이분 된 마음으로 후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 진짜 웃기네. 저희, 처음 보는 사이에요.”
“…그래? 정말? 막 데자뷔 같은 것도 없고?”
“으음… 다시 생각해 봐도, 완전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확신 어린 목소리.
에일린의 기대는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확답을 들은 이상, 어쩔 수 없으리라.
그녀의 후배는 기억이 남지 않았다.
“반가워요, 재밌는 선배. 저는 이번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박찬영이라고 해요.”
“그,그래? 큼! 난 에일린. 학생회에 들어와 있고, 지금은 2학년이지.”
“아하. 그렇군요. 에일린 선배라…”
“……”
익숙한 부름에 에일린의 몸이 굳었다.
정말 그리웠던 호칭이다.
이제는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후배는 살아 있다.
살아서, 숨 쉬고 있다.
그렇게 에일린이 기묘한 감상에 젖어 멍하니 현실을 의심할 때.
후배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으음… 자기소개가 끝? 저한테 뭐 할 말 없나요?”
“할 말?”
“네. 아무 이유 없이 절 불러 세웠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 어디선가 본 적 없냐는 이상한 핑계는 빼고. 킥킥!”
할 말이라…
그제야 에일린의 머릿속에 한가지 키워드가 떠올랐다.
‘약속!’
자각몽 속에서 후배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그는 분명…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신에게 학교를 구경시켜준다는 권유를 해달라 부탁했었다.
그리고 에일린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비록 꿈속이지만.
아니, 그때 꿨던 그 꿈은 정말 꿈이 맞았을까?
꿈에서 나눴던 대화는 현실이 되어 에일린을 과거로 돌려놓았다.
어쩌면…
그때의 그녀는 신을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후배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꿈이라는 형태를 빌려 만나러 온 신.
진짜 신일까?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 중 그녀의 앞에 나타난 이유를 모르겠다.
신이 에일린에게 기회를 준 이유 역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꺼내야 할 말 만큼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 크흠! 후배님. 괜찮으면 내가 학교 안내를 해줄까? 앞서 소개했다시피 난 학생회이자, 네 선배거든.”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되지?
에일린은 오랜 과거를 다시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거절당하겠네. 맨 처음의 후배님은, 엄청 싸늘했으니까.’
다시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무장해서 친한 척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보상이 후배와의 친분이라면, 에일린은 기쁜 마음으로 감수할 생각이었다.
“학교 안내라…”
“응. 매점 위치도 모르면 곤란하잖아? 어때?”
비록 거절당할 걸 알더라도.
꿈에서 약속을 맺은 후배는 진짜가 아닌 신일 수도 있으나, 에일린이 약속을 한 당시에는 후배라 여겼다.
그러니 약속을 지킬 것이다.
부드러운 말로 그에게 권유했다.
후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한 번 그랬던 것처럼.
“그럼… 감사히 도움받을게요. 말씀대로, 학생이 돼서 매점 위치를 모르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에일린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후배는 그녀의 제안을 웃으며 수락했다.
*
“어? 후배님 지금 뭐라고 했…어?”
에일린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귀여운 표정 하긴.
정말로 예상외란 말투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내 잘 부탁드릴게요.”
다시 한 번 수락한 나는 에일린의 바로 곁에 섰다.
잠깐 닿은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자 적잖이 당황했나 보다.
이런 반응을 보니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동반 회귀’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일단 나까지 회귀했다는 건 비밀로.’
전생의 그녀는 뛰어난 CEO였지만,
내가 아는 에일린은 천성이 학자다.
데이지와 비슷한 과인 것이다.
그런 만큼, 두 명이나 되는 인물에게 회귀라는 특이 증상이 발견된 걸 알면…
아무래도 평생을 시달릴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피하고 싶은 미래였다.
천계의 기술 분석 같은 무모한 도전에 시간을 쏟으려고 회귀한 게 아니거든.
내가 원했던 건…
“그럼 매점부터 가시죠! 안내해 주신 보답으로, 제가 음료수라도 살게요.”
“어? 어어… 고,고마워.”
이런 평범한 거니까.
에일린에게 ‘시스템’의 존재와, 다른 차원의 존재를 고백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를 지구로 데려오진 않겠다.
그 이유?
내가 이 세계에 바라는 것은 무력의 성장도, 완결의 보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대로라면 나름 즐거워야 했을 에일린의 학창 생활.
하지만, 나를 만나게 된 에일린은 첫사랑과 이별을 동시에 겪었다.
한동안 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을 거란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몇 년을 아파한 원인은 명백했다.
내가 그녀보다 의무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허나,
27년이 지난 후에도 약간 힘겨워하던 에일린을 봤다.
또한 내 욕심 하나 때문에 힘든 기억을 지워주지 않았다.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하면…
거짓이겠지.
그녀가 잃은 그 시간을 완벽하게 되찾아 주고 싶다.
아니, 원래 가져야 했을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을 주고 싶다.
음…
내 사심이 좀 섞여 있긴 하지만, 가능하면 핑크빛 분위기도 좀 있었으면 하고.
이미 그녀에게 해줘야 할 것이 많다.
나를 노리는 용사, 천계 속 숨어든 배신자 등등 잡다한 것들을 우리 사이에 두고 싶지 않았다.
이런 짐을 에일린에게 지우기는 싫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고생했다.
‘나야 뭐… 날 도와주는 연인들은 충분히 많고.’
바라건대, 나로 인해 아파한 에일린인 만큼 더이상 불행하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일편단심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에일린과 빠르게 친해지기 위함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을 치워주는 것.
이것이 내게 내려진 급선무다.
“저기… 후배님. 혹시 있잖아.”
에일린이 망설임 섞인 질문을 해왔다.
그제야 난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치챘구나?
그래. 에일린 너라면 알겠지.
난 지금 이성과 깊게 인연을 쌓는 것에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고 있어.
이 언행이 의미하는 건…
“어디 아프거나 한 건 아니지? 아니면… 그래. 여행을 좋아해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거나.”
지금의 내겐 예고된 이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에일린에게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아뇨.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하고, 여행은 딱히 계획에 없어요. 혼자서는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정말?”
그녀의 눈이 기대에 찼다.
허나 불안이 더 많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간단한 떠보기론 확신을 내리지 못했나 보다.
상관없다.
에일린이 안심할 때까지 그녀의 곁에 오래도록 있어 줄 예정이니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내가 곁을 떠날 기미가 없으면…
에일린 또한 갑작스러운 이별은 없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제가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게 생겼나요?”
“아니. 그냥. 음… 좀 그래 보여서!”
리셋을 하며 결심했다.
나는…
이 세상을 평생 완결짓지 않을 것이다.
완결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도망자 패널티를 받지 않는다.
또한 아기 천사가 ‘방치하지만 않으면 된다’라고 했지 않은가?
난 이 세상을 완결짓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틈날 때마다 에일린을 만나러 올 거니까.
패널티를 빗겨나갈 조건은 충족된 것이다.
‘완성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 억지로 원작 속 등장인물과 친해지고,
억지로라도 사건을 만들었다 마무리 짓는 등 생고생을 해라?
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는 에일린 한 명이면 충분하다.
욕심을 좀 부린다면 에트나 정도?
굴곡 없는 잔잔한 일상이더라도, 즐거울 것이다.
그래.
학교 안에서 평범히 일상을 보내다,
결국 연애로 이어지는 전국 수백 수천 명의 선후배 사이처럼…
그런 비슷한 일도 있을 수 있고.
“와! 그러고 보면 이 빵, 매점에서 팔고 있구나! 이거 나중에는 단종 되는… 허업! 아무것도 아니야!”
“그 빵 맛있어요?”
“싼 맛에 먹는 건데, 추억 보정이지 뭐.”
“킥킥. 엄청 오래전부터 먹은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저희 나이 차이는 고작 1년인데.”
“……”
에일린이 내 변화에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금방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초면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한 대화가 오갔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우리 둘의 대화 합은 잘 맞나 보다.
“후배님.”
“네?”
“우리 왠지, 엄청 친해질 것 같지 않아? 난 그럴 것 같은데.”
“…그러네요. 저도 그럴 것 같아요.”
“응. 다행이다.”
평화로운, 나와 에일린이 바라왔던 일상이다.
꽤 행복했다.
그리운 배경.
그리운 대화 상대와 함께,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는 것만으로.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Tru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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