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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51) (251/310)

〈 251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

충격적인 고백에 후배가 헛기침을 해대었다.

에일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행동을 남몰래 감상했다.

결국 후배는 멍하니 에일린을 바라보다, 어딘가 슬프다는 듯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렇네요. 그럴 수도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으음… ……반려자 되시는 분은 좋은 분인가요?”

“아니. 매일같이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시달린다니까?”

“자,잠도 못…”

“하핫! 농담이야 농담! 표정 풀어.”

“…농담?”

“그래. 내게 반려자가 있다면, 그건 일이겠지.”

“설마… 일과 결혼했다는 그거?”

“정답. 아, 일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건 진실이야.”

에일린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액세서리가 껴 있지 않았다.

현재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과거에도 이 약지엔 반지가 자리한 적이 없었다.

“……이 여자가 진짜.”

“하하핫!”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배가 허탈하게 웃었다.

반대로 에일린은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기분이 유쾌해졌다.

이곳에 대륙의 시장 경제를 제 손안에 넣고 주무르던 회장 에일린은 없었다.

나잇값 못하는 어린애 하나만 있었을 뿐.

여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들지 않는다는 말은 그저 낭설이 아니었다.

‘결혼… 연애라… 참, 이래저래 말 많았지.’

연애와 동떨어진 삶이다.

정확히는 그녀가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해야 옳으리라.

마악관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경영에 뛰어들었을 때.

맞선을 비롯한 구혼이 쏟아져 오기 시작했으나…

에일린은 그 모두를 정중하면서도 격식 있는 편지로 거절의 답을 보내었다.

그것이 십 년째 반복되자 에일린을 찾는 이는 사라졌다.

항간에는 동성애자, 혹은 무성애자라는 헛소문도 떠돌았지만…

에일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의 부모마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국가를 대표하는 기업의 회장이 그래도 되는 건가요?…”

“난 지금도 건강하고, 내 뒤를 이어갈 조카는 많은걸.”

“조카?”

“응. 코흘리개 주제에 눈이 똘망똘망한 게 귀엽더라. 킥킥. 제 엄마, 그러니까 내 동생의 얄미운 구석은 하나도 물려받지 않은 점이 특히 마음에 들고.”

“……동생이 있으셨어요?”

“어라? 설마 몰랐어? 으음… 오래돼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가 ‘장녀’라곤 했어도, 외동딸이라곤 안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면…”

나름 능력 있지만, 에일린에 비해선 부족한 부분이 많은 동생들을 떠올려냈다.

그들은 마악관이 아닌 경영학과가 중점인 대학으로 진학했기에 후배와 만날 일 없긴 했다.

게다가 한창 경영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때라 별로 친하지 않기도 했고.

예전 그녀가 언급을 피할만도 했다.

‘이야… 아무리 봐도 진짜 같다…’

그러나 진짜일 리는 없다.

에일린은 속지 않았다.

악몽을 진짜라고 믿는 건, 어린아이의 특권이다.

“그럼 왜 회귀했을 때 기업을 잇지 않으실 건가요?”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후회가 없는 건 아니거든.”

그녀가 기업을 물려받으며 포기해야 했던 것들.

그중에서는 원소 마법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 되어, 집으로 가정 교사까지 초청해달라 졸라 가며 배운 기억은…

이젠 추억이 되어 그리움의 상징으로 남았다.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공부 때문이라… 선배답네요. 제가 선배라면 원래보다 더 빠르게 경영에 뛰어들 텐데.”

“왜?”

“미래의 지식이 손 아래에 있잖아요. 엄청 수월하게, 훨씬 공격적이고, 더 거대한 규모로 기업을 키울 수 있으니까. 아깝지 않아요?”

“전혀 아깝지 않지? 아니, 애초에 미래 정보가 나한테 왜 필요해?”

“필요 없으시다고요? 매 해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여러 이슈와, 미래의 시장 흐름이 전부?”

“응. 그야… 난 그런 게 없어도…”

“그런 게 없어도?”

“최고거든.”

에일린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본 남자는, 3초 남짓 멍하니 바라보다…

이윽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큭큭… 최,최고…라니.”

“왜,왜 웃어. 나 증명할 수 있다? 봐봐. 난 미래 정보 하나 없이 기업을 이끌었는데, 모든 시장을 삼켰잖아.”

“그,그건 그런데… 푸하하핫!!”

한 기업이 너무 커다란 힘을 가지는 걸 경계한 국가가 그룹을 사방팔방 찢어 놓긴 했지만,

그조차 사실은 눈 가리고 아웅.

찢겨 나간 그룹을 차지한 이들의 목줄은 에일린의 손 아래에 있다.

모두들 에일린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는 자부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정상 위에 섰다는 것을.

‘큭큭. 내가 생각해도 너무 찐따 같았네.’

꿈이긴 하지만, 재회한 첫사랑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내가 이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지금은 하늘에 있는 네가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은…

이렇게나 멋진 여자라고.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우리 기업을 최고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런 사기적인 정보의 도움 없이도.”

“큭큭큭! 아무렴요.”

어린애 같다 생각했던 인정 욕구가 후배의 앞에 섰더니 빼꼼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유치한 잡담을 나누니 너무나 즐거웠다.

더없이 즐거워서, 에일린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고요함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결재판만이 오갔던 회장실 안이 소란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부하 직원이 봤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전 세계가 아는 에일린이란, 무척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이렇게 웃어 본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일까?’

변변한 취미조차 없는 그녀다.

폭소는커녕 진심 어린 즐거움을 느껴본 적도 드물다.

일에 지친 그녀에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자각몽이었다.

웃다가, 웃다가,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어쩐지 기억에 묻힌 그 날이 사무치게 그리워져서.

“아아… 보고 싶다.”

“누구를요?”

“후배님.”

“지금 보고 있잖아요.”

“…킥킥. 맞네.”

보고 싶다는 게 말 그대로 보고만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예전처럼 만지고, 툭툭 치며 장난도 치고…

에일린은 거기까지만 하고 상념을 털어냈다.

이런 우울증 초기 증상은 20대 시절에 질리도록 겪었다.

중간에 제동을 거는 일은 익숙했다.

“…그… 선배님.”

“응?”

“……”

회의실 안에 잠깐 정적이 자리했다.

불러 놓고 왜 그런가 싶어 후배를 쳐다봤더니, 그는 한창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다시 입을 닫길 반복한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긴가보다.

에일린은 재촉하는 대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신 변하지 않은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아주 차근차근, 잊지 않겠다는 듯이.

“선배님은, …절 아직 좋아하세요?”

“풋. 내가 왜 아직도 독신인 것 같아?”

“그럼 설마 27년간…?”

“…글쎄.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어. 그야… 27년은 길잖아? 지금 후배님을 보며 느끼는 이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들다고.”

“그렇…겠죠.”

“응.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꿈이니까.

단순한 자각몽이니까.

눈앞의 그리웠던 이 남자는,

진짜 살아 숨 쉬는 후배가 아니니까.

그러니…

좀 솔직해져도 괜찮겠지?

“내 인생에서 후배님보다 매력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 그리고 못할 것도 같고.”

사실, 후배보다 나은 사람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안 했다.

왜냐하면…

후배는 그녀의 가슴 속 가장 소중한 곳에 묻혀 있었으니까.

그 ‘가장 소중한 자리’에, 다른 남자가 들어 차 후배가 밀려나는 꼴을 에일린으로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 감정은 사랑인 건가?

그 답은, 에일린에겐 풀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27년은 길었으니까.

“…고마워요.”

“아니야. 나야말로 이상한 말 해서 미안해. 이거 참, 꿈인데도 부끄럽잖아.”

“꿈?”

후배가 반문했지만, 에일린은 어물쩍 답을 피했다.

꿈속의 등장인물에게 ‘너는 사실 내 자각몽의 산물이야’라고 대답해 봐야 이해할 것 같지는 않고…

다행히 후배는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혹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과거?”

“네. 적당히… 마악관 시절쯤?”

마악관 시절이라…

잠깐 생각에 잠긴 에일린은, 곧바로 결론을 내었다.

“으음…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네.”

“네? 왜요?!”

후배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당황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왜냐니… 음. 마악관 시절이면 좀 힘든 기억이 있어서.”

“그 아픈 기억이 도대체 무슨… 아앗? 서,설마…”

“후배님. 내가 이별 이후로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킥킥.”

“아아… 아…”

후배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픈 기억의 원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에일린을 향해 진지하게 사과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음에도 그 죄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해요. 진심으로.”

“어,어? 잠깐, 농담인데 그러기 있어?”

“그래도…”

“그런 얼굴 하지 마. 주름 생기겠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후배가 고통을 느끼는 표정은 처음 봤다.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심장이 떨어질 뻔한 에일린은,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최선을 다해 그를 달랬다.

달랬다고 해봐야, 농담이었단 말 몇 마디에 기운을 차린 듯 쓴 미소를 지은 후배였지만.

‘응? 그런데 꿈에 처음 본 표정이 나올 수도 있나? 꿈은 현실에서 봤던 것들만 나온다 하던데…’

아무튼 마악관을 다닐 땐 물론 20대의 전반을 우울하게 보냈다는 진실은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에일린은 그의 방금 표정을 두 번 다시 보기 싫었다.

어쩐지 자신이 더 아파지는 것 같았기에.

“그럼 제가 마악관에 계속 다닌다는 가정을 둬보죠.”

“후배님이 계속 마악관에 다닌다고? 무사히 졸업까지 하고?”

“네.”

“으음…”

“말했잖아요. 그냥 망상 놀이라고. 그럼 과거로 돌아가실 마음이 좀 드시나요?”

“…너무 과하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느낌이라, 도리어 상상이 잘 안 가.”

과거 회귀에 더불어, 불치병이 완치된 후배.

둘 중 하나만 일어나도 믿지 못할 기적인데, 둘 모두?

에일린에게 있어선 과분할 정도로 바라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노력해봐도 와 닿지 않았다.

“음… 미안. 역시 그런 상황 자체가 잘 안 그려진다. 확실히 좋은 상황이긴 한데, 얼마나 좋은지는 잘 실감이 안 되네.”

“아니요. 방금 그걸로 대답이 됐어요.”

“그래?”

후배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린은 약간 안도했다.

그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나쁘지 않은 대답을 고른 것 같았다.

정작 왜 나쁘지 않은 대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때의 절 어찌할 생각인가요?”

“뭐야. 후배님 아까부터 똑같은 질문만 하잖아? 아… 그러네. 슬슬 자각몽에서 깨어날 때가 된 건가…”

“…아하. 자각몽. 큭큭. 과연, 어떤 상황인지 알만하네요. 그래서 대답은?”

“당연히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을까? 요즘도 그때가 그립거든.”

목소리에도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인생 중 가장 즐거웠던 때를 고르라면, 망설이지 않고 후배와 함께했던 2개월가량의 시간을 선택하리라.

“음. 만족스러운 대답입니다. 합격!”

“킥킥. 합격이라니, 과분한 칭찬입니다.”

에일린은 입지도 않은 드레스 치마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척을 했다.

‘교양 있는 숙녀’라도 된 것 마냥.

“아무렴요. 레이디 에일린.”

그러자 이번에는 후배가 쓰지도 않은 모자를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신사답게’ 인사를 받았다.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연극이었다.

회장실은 다시 한 번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오글거려라.

“그럼 선배님, 저랑 약속 하나 해요.”

“…응?”

“만약 돌아간다면… 오래전 저희의 첫 만남처럼, 신입생인 제게 학교 안내를 권유해 줄래요?”

“아… 그러고 보면 우리 첫 만남은 그랬지?”

“맞아요. 친구들끼리의 가위바위보에 지셔서, 제게 말을 거셨죠. 그땐 남자에게 별로 관심도 없으셨으면서.”

“하하! 그립네. 정말로.”

“그래서 약속은?”

“좋아! 약속할게! 우리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후배님한테 말을 걸게. 뭐, 만약 돌아간다면 이야기지만. 킥킥.”

에일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꿈같은 이야기,

이루어만 진다면 못할 것이 무엇인가.

게다가 그 요구 자체도 에일린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약속 한 거에요?”

후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에일린은 꿈의 생생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저 악동 같은 미소는 꼭 자신을 놀리기 전에 나오는 표정이었는데.

­ 스윽.

그때.

후배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의미 모를 행동에 의문이 들었을 때.

갑자기 에일린의 시야가 일렁였다.

‘아…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된 건가?’

아쉬웠다.

비록 허상이더라도,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에일린은 작게 기도했다.

꿈에서 깬 뒤에도, 이 기억이 남아 있기를.

보통의 꿈처럼 돌아서면 잊어버리지 않기를.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야 뒤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참고로 전 아무것도 모른단 컨셉입니다. 복잡한 설명은 하기 귀찮거든요. 그대신… 꼬시기 쉬운 남자가 되어줄게요. 에일린 선배를 한정해서만.”

컨셉?

꼬시기 쉬운?

그게 뭔데?

허나 에일린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시야가 완벽히 암흑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일린은 꿈에서 깨어났다.

기나긴, 무려 27년이나 되는 정말로 긴 꿈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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