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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50) (250/310)

〈 250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

에일린은 터져 나오는 하품을 억누른 채, 세단의 뒷좌석에 몸을 맡겼다.

고급스러운 천연 가죽 시트가 그녀의 등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잠이 부족해.’

저도 모르게 모인 미간을 손가락으로 주물렀다.

오늘 몇 시간 잤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간을 한 손으로 셀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점차 수면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마악관을 졸업하고 26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의 에일린은 수많은 산하 기업을 발아래에 둔 그룹의 총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 중 첫째로 꼽히는 경영인이니까.

당장 방금만 해도 뉴스에 종종 얼굴을 비치는 이들에게 초대를 받아 차 한잔을 나누고 오는 길이지 않은가?

결국 친목 모임을 가장한 정세 논의였지만.

어찌 되었든 상대하기 피곤한 일이었단 건 변하지 않았다.

­ 끼익.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익숙한 듯 부하 직원이 열어준 문으로 다리를 빼내 차 밖으로 일어섰다.

하늘 위 떠다니는 구름과 견줄 정도로 높게 솟은 건물.

에일린과 부하 직원은 건물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둘이 멈춰 선 곳은 꼭대기 층 전용으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가장 높은 층.

그곳이 바로 에일린이 주로 업무를 보는, 한 층 전부를 회장실로 이루어진 방이다.

즉, 이 엘리베이터의 이용자는 에일린이 유일했다.

“지금 몇 시?”

“16시 43분입니다. 18시 저녁 전까지 여유가 있습니다.”

“어. 수고했어. 일 봐.”

“그럼 다음 일정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꾸벅.

부하 직원은 자신의 정장 치마에 묻은 털실을 떼어내면서,

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에일린을 배웅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보는 눈이 사라지자.

혼자가 된 에일린은 짧게 토막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거 참, 보람은 있는데…”

피로했다.

저녁 전까지 잠깐 눈이라도 붙일 예정이었다.

늦은 시간에 열리는 회의에서 조는 꼴을 보일 순 없었다.

그렇게 반쯤 감긴 눈으로 회장실의 문을 열었을 때.

“어?”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그녀의 장소에 선객이 존재했다.

큰 키. 검은 머리카락. 남자.

창밖의 경치를 감상하느라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눈에 익은 교복.

그렇기에 기이했다.

저 교복은 더는 찾아보기 힘든 교복이었기에.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구세대적인 디자인이라며 새로운 교복이 출시된 지가 10년이나 흘렀지 않은가?

어디 복고풍을 컨셉으로 하는 카페에서나 볼 법한 의상.

게다가 남성복인 만큼 더욱 혼란스러웠다.

왜.

어째서.

그보다 더한 의문점은,

아무리 봐도 저 뒷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만 같다는 점이었다.

“누구십니까?”

“와. 방금 그게 사회생활 모드의 선배님 목소리인가요? …의외로 어울리네.”

“선…배님?”

어쩐지 들어본 적 있는 것만 같은 목소리는 둘째 치고…

선배님이라니, 친근감 있으면서도 가벼운. 상당히 흔하지 않은 호칭이다.

세상엔 에일린을 어렵게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인 만큼 더욱.

에일린은 최근 만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을 전부 뒤져 보았지만…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낼 순 없었다.

“…이곳, 어떻게 들어 오셨습니까?”

방문자가 있었다면 분명 에일린의 귀에 들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짧은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방문자를 맞이하는 접객실이 따로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불법 침입자냐?

그 또한 이상했다.

회장실은 여러 기밀 자료를 보관해 두는 곳인 만큼,

보안이 무척 삼엄했기에.

벽을 뚫는 유령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그 모든 이들의 눈을 피하고 들어올 순 없었다.

여러모로 기이한 상황이었다.

“그건 비밀이죠.”

“비밀이라니…”

“제가 누구인지 맞출 때까지 뒤돌아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에일린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정말로 눈이 마주친 건 아니고,

창가에 비친 그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

창가에 반사되는 남자의 얼굴은 희미했다.

오후 4시 반, 밖은 해가 지지 않아 무척 밝았기 때문이다.

에일린은 남자의 정확한 얼굴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알아낸 것은 있었다.

그는 지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척이나 따뜻해 보이는.

“오랜만이네요. 에일린 선배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재회의 인사를 나누며,

남자가 뒤를 돌아섰다.

그제야 에일린은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후배였다.

에일린이 그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눈앞에 선 이 남자는…

오래전, 에일린이 가슴에 묻어둔 후배가 맞았다.

“저 기억 하세요?”

기억 못할 리가.

입술은 움직였으나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떨려야 하건만, 애꿎은 에일린의 동공만이 세차게 진동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차근차근 그의 모습을 흩어 보았다.

기억에 새겨 둔 얼굴.

그녀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커다란 키.

다부지고 건강해 보이는 신체.

심지어 부드러움과 장난스러움을 반씩 뒤섞어 놓은 특유의 분위기까지.

에일린은 힘이 풀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세울 수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혼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 귀신을 본 건가?

상대를 멍하니 바라본 것은 에일린 뿐만이 아니었다.

엉뚱하지만,

후배 역시 그녀를 살짝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후…배님?”

“새,생각보다 많이 젊으시네요? 주름도 없으신데?”

“…어? 어… 그야, 나는 반쯤 마법사니까.”

“아하… 체내의 마나… 그래서 노화가…”

오랜만에 보는 후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가를 납득하고 있었다.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에일린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왜 회장실에 나타났을까?

심지어 오래전 단종 된 교복을 입고,

한치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작별 인사를 한 그 날의 후배를 그대로 데려온 것만 같았다.

“푸핫. 얼빵한 얼굴 하시긴. 별로 안 믿기시나 보네요?”

“……”

“그냥 그런가 보다 하세요. 마법도 있는 세상인데, 자잘한 기적 한두 개 쯤 일어날 법하잖아요?”

자잘한? 기적?

그런 단어로 설명이 안 된다.

에일린은 분명 후배의 소식을 한참이나 찾아 헤맸다.

허나…

그녀의 집안 힘을 전부 동원했음에도, 알아낸 것은 전무했다.

아무리 찾아 뒤져도 단서는 도중에 끊겨있었다.

어린 날.

에일린의 마음에 스며든 후배는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해가 떠오르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새벽녘 이슬처럼.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27년 전의 마법 수사 기술력으론 작정하고 숨어서 생을 마감하면 결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아 돌아왔다고? 저리 멀쩡한 얼굴로?’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봐도,

믿으려야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이 모든 것이 이해가 가능할 만한 상황은 무엇일까.

가능성은 한쪽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었다.

‘꿈. 꿈이네. 자각몽은 처음인데, 이런 느낌이구나…’

언제 잠들었지?

오늘 하루 기억을 되짚어 봐도, 짐작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에일린은 항상 피곤함에 절어 살았기 때문이다.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그녀로선 언제 어디서 잠들든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현실의 그녀는 지금쯤 도로를 달리는 세단 뒷좌석에서 단잠에 빠져 있지 않을까?

‘지금은 전혀 졸리지 않은 걸 보면… 꿈 맞는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라서 잠이 달아난 건지,

아니면 정말 자각몽이기에 피곤이 사라진 건지 명확한 구분은 되지 않았지만…

에일린의 생각은 후자로 기울었다.

회장실까지의 험악한 경계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

심지어 그 침입자는 살아 돌아온 후배.

작별 때의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외모.

하물며 단종 된 교복까지도.

이 모든 상황은 그녀를 그리 생각하게 만들었다.

“음? 더 안 물어 보세요? 여태까지 뭐 하다 왔냐, 왜 소식이 없었냐, 하나도 늙지 않은 이유는 뭐냐 같은.”

“……응. 안 하려고. 물어봐야 의미 없을 것 같아서.”

꿈속의 인물에게 진지하게 묻는다고 진지한 답변을 기대하는 쪽이 이상하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이 찰나를 즐기기로 했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보는 그가 너무나도 반가웠기 때문에.

이미 꿈인 것을 알긴 하나, 좀 즐기면 뭐 어떤가?

영화나 드라마도 공상인 걸 알면서 모두가 즐기는데.

“오. 현명하시네요. 역시 연륜 같은 게 쌓였다던가? 킥킥킥.”

“연륜이라고 하지 마. 늙어 보이잖아.”

“실제로 늙었으면서 뭘. …음, 그래도 외모는 30대 초반 같아 보이지만요.”

“…세상에. 진짜 후배님이랑 말투가 똑같아.”

“그럼 가짜 후배도 있나요?”

에일린은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평소 떠올리려 노력해 봐도 먼지 쌓인 듯 탁했던 기억이, 후배를 마주하니 하나둘 선명해졌다.

맞아. 이랬다.

그녀가 아는 후배는, 이런 말투를 썼다.

“눈물겨운 해후도 좋지만… 오늘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 왔어요.”

“물어볼 거?”

“네.”

죽은 사람이 물어볼 것이 있어서 산 자의 꿈에 나오다니…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해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대상이 대상이었기에,

에일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에일린 선배님. 회귀라는 단어 아세요?”

“회귀?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는 거? 알긴 아는데, 그게 갑자기 왜…”

“그냥 망상 놀이입니다. 어때요. 만약 선배님이, 마악관에서 절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 같아요?”

그야말로 뜬금없는 주제.

말의 맥락을 짚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울려주기로 했다.

꿈속의 후배에게 자신이 어떻게 지내 왔는지 이야기해주기 딱 좋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글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생처럼 가업을 물려받을 것 같진 않네.”

“…혹시 선배님은… 어머님의 뒤를 이어, 회장 자리에 오른 것을 후회하시나요?”

남자가 걱정스런 눈으로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에일린에겐 익숙지 않은 눈이다.

그 누가 세계 제일 가는 그룹의 회장인 에일린을 이런 걱정이 서린 눈으로 볼까?

아.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의 그녀는 장녀가 짊어져야 할 책임감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어렴풋이 후배에게 내비친 적이 있으니, 그가 정말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면 이런 걱정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각몽은 생각보다 퀄리티가 높구나…’

꿈이지만, 정말로 오래전 사라졌던 후배가 돌아온 것 같았다.

에일린은 반가우면서도 울적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킥킥. 아니. 그건 아니야. 처음엔 조금 힘들었어도… 지금은 자랑스러운걸. 내가, 우리가 일궈낸 모든 것들이.”

“그럼 왜?”

“그야… 내 삶을 챙긴 적이 없거든. 아. 말했나? 나 결혼했다?”

­ 푸웁. 콜록콜록.

옛날엔 나만 놀림 받던 게 억울했거든.

꿈에서라면, 내가 후배에게 장난 정도는 쳐도 되겠지?

에일린이 짓궂게 눈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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