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
“그럼. 두 분 모두 몸 건강하세요. 괜히 아프지 말고.”
“…정말 가는구나.”
“시간이 됐으니까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어코 이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네.
송별회는 조촐했다.
나. 에일린. 그리고 에트나가 끝.
적은 인맥이었지만, 내게 있어선 충분했다.
에일린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 보였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네.
나 역시 미련이 남지만, 그런 만큼 강하게 끊어내야 했다.
지금 내 어깨에 올려진 것을 되새기자.
“에일린. 너무 걱정하지 마. 찬영이는 어디 가서도 잘 지내지 않을까? 왜, 얘는 똑 부러진 구석이 있잖아.”
“……맞아. 후배님이 어디 가서 밥 굶고 다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더라.”
“그치? 게다가 가끔 연락도 한다니까. 좀 심심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
내가 에일린에게 한 마지막 부탁은 에트나를 달래 달라는 것인데,
정작 지금은 전혀 반대 상황이 펼쳐져 있다.
허나 에트나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한듯싶었다.
그녀가 아는 것과 달리, 앞으로 우리는 연락조차 못 하는 게 진실이니까.
에일린에게 너무 많은 뒤처리를 맡겨서 미안하다.
그녀는 지금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는 것조차 힘겨울 텐데.
포옥.
그때.
에일린이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키 차이 때문인지 끌어안았다고 말하기보단, 내게 안겼다고 말하는 것이 어울렸지만.
예상치 못했던 행동인 만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나는 어색한 손길로 내 품에 들어온 그녀의 등을 마주 안았다.
마지막인데 이정도 쯤이야.
하지만…
그런 나와 에일린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뭐야! 너,너네 둘… 설마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응. 우리 사귀는 중이야.”
“…아니거든요?”
에일린의 뻔뻔한 긍정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응석 부리기는.
“누,누구 말이 맞는 거야? 찬영이? 아니면 에일린?”
“글쎄요. 에트나 선배님이 한번 맞춰 보시는 건?”
“나 이런 쪽 눈치는 별로 없는데…”
에트나가 조심스럽게 나와 에일린을 살폈다.
내가 에일린의 포옹을 부드럽게 풀려 했으나,
그녀가 손에 힘을 꽉 주며 거부했다.
지은 죄가 있기에 차마 힘으로 그 포옹을 풀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싫은 건 전혀 아니고.
아무래도 그 모습을 보고 우리 둘의 사이를 확정 지은 것 같다.
에트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좀 빠져줄까? 둘이서 작별 인사를 나누도록…”
“괜찮…”
“고마워 에트나. 부탁할게.”
이번에는 에일린이 내 말을 끊었다.
나는 품에 안긴 그녀를 째려보았으나, 에일린은 모르는 척 에트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으,응!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면 불러줘? 어… 에일린 넌 힘내고. 나중에 술 사줄게.”
“그래.”
졸지에 두 연인인 친구의 이별을 배웅하게 된 에트나는 뒷걸음질로 동아리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마치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심지어 문을 닫을 땐 문고리를 쥔 채 닫으며 최대한 고요히 퇴장했다.
…철컥.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차마 불평을 뱉지는 못하였다.
에일린이 어떤 마음으로 이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요? 굳이 이런 오해를 사고.”
“오해…라… 응. 그러네. 후배님, 떠나기 전에 이거 하나만 이야기해주면 안될까?”
“어떤 거요?”
“만약 우리 사이에 그 장애물만 없었다면… 내 고백을 받아 줬을 거야?”
에일린이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질문했다.
“후배님은 날 좋아했어?”
에일린이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질문했다.
“나를… 사랑…했어?”
에일린이…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내게 질문했다.
의외로 여리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 애정을 갈구한다기 보다는, 굳셈과 강렬함이 맺힌 동공.
대답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남녀 역전 세계의 모든 여성은 이토록 강한 것일까?
아니면 에일린이 유별난 건가?
나는 영원히 모른다.
이정도로 깊은 교류를 나눈 여성은 에일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 밖에 없을 테니까.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말해서… 후배도 내게 마음이 없진 않은 것 같아.”
“……그런가요? 그 근거를 듣고 싶은데…”
“그건 비밀. 그리고… 나는 내 추측이 아닌, 후배님의 대답을 원하는 거야.”
목소리는 차분했고, 또 선명했다.
당했네.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하고 온 모양이다.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눈을 마주하면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버린다.
“제 대답은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상냥한 거짓말과 고통스러운 진실. 선배님은… 어느 쪽을 원하시나요?”
“진실.”
고민조차 거치지 않은 즉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명백하게 진실을 원했다.
이런… 조금은 고민하는 편이 좋을 텐데.
내가 아닌, 그녀를 위해서.
“정말 후회 안 해요? 듣고 나면 분명 후회할 텐데.”
“…응. 괜찮아. 그냥, 후배님의 진심이 궁금할 뿐이니까.”
에일린은 굳센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괜찮지 않을 게 분명하면서 괜찮다고 말하기는.
잠시동안 말을 잇지 않고 눈을 감았다.
맞닿은 신체를 타고, 에일린의 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꽤 빠르게 뛰고 있는데…
용케 말을 떨지 않네.
설마 연습까지 한 건가?
에일린은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면서.
정말…
그 찐따 같던 에일린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네.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나로선 도무지 확신하지를 못하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런 질문을 했는지 훤히 읽히기에,
나는…
그녀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후… 알겠어요. 진실. 말할게요.”
“…응. 고마워.”
나는 품에 안긴 에일린의 귀에 다가가,
짧은 한마디를 남긴 뒤 떨어졌다.
“……”
속삭임은 작았다.
동아리실 밖에서 문에 귀를 댄 채 우리의 대화를 듣던 에트나조차 결코 듣지 못할 만큼.
허나 에일린은 똑똑히 들었나 보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으니까.
힘겨웠다.
한마디.
네 글자에 불과한 짧은 구절을 전하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스윽.
나는 조용히 에일린과의 포옹을 풀었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순히 나와의 포옹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내 품에서 떨어진 에일린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거봐. 이래서 내가 아픈 진실이라 했잖아.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왜 물어봤어요.”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항상 방긋방긋 웃던 그녀가 고통스럽게 아파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벌써 후회 되죠?”
“…아니.”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
“응. 후회 안 해. 그리고… 나도, 나도 사랑해. 찬영아.”
에일린은 꾸역꾸역 눈물을 참았다.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행복한 웃음을 지어냈다.
*
띠링!
[소설,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가 연중 된 시점을 넘어섰습니다! 이제부터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가 완결 가능해집니다!]
이미 읽은 적 있는 시스템 문구다.
원작이 연중 된 시점은 진작에 지나왔단 뜻이다.
이 세계에서만 보낸 시간이 한 달을 훌쩍 넘어가니 당연한 이야기다.
즉.
난 언제든 이 세계를 완결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세계의 ‘완성도’인데…
나는 상태창을 불러왔다.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밤피르(вампир)
[힘] 36 → 40 [민첩] 39 → 42
[체력] 38 → 41 [지능] 33 → 37
[기교] 37 → 40 [매력] 51
[마나] 501 → 782
[특성] 『자연치유』 『팔방미인』
선령일일 만요월월(???? ??月月)의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6 (00:00:01)
프룸의 버프, 힘·민첩·체력 스텟 성장률 증가 33% (00:47:23)
마나 각성, 힘·민첩·체력·지능·기교 스텟 성장률 증가 50% · 마나 흡수 小
대지모신(大???)의 가호 [자세히 보기]
현재 진입 중인 소설,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의 완성도 32% [시스템 보유자 주변의 완성도는 높으나, 원작의 주인공을 비롯한 주·조연들과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음. 연재 중단과 다를 바 없음.]
보유 카르마: 251,200
=
스텟의 성장은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었다.
최근 공부에만 매진했기 때문이다.
십의 자리 숫자가 4로 바뀌며 점점 성장이 더뎌진 원인도 있고.
일반 퀘스트에 연금술 공부에 관한 내용들이 자주 등장해줘서 카르마가 쌓이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단 점은 다행이려나?
‘완성도가 32%라… 생각보다 훨씬 적네.’
솔직히 내 주변의 관계는 나름 깔끔히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쌓은 인간관계 자체가 에일린과 에트나밖에 없긴 하지만…
그 둘과의 작별 인사는 끝마쳤기 때문이다.
허나 완성도는 예상외로 절반도 채 못 채운 수준.
덕분에 완성도의 판별 기준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었다.
‘완성도’는 나와 주인공뿐만이 아닌, 원작 속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에 놓였느냐에 따라 변화한다.
원작 속에는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을 지금처럼 억지로 무시하게 되면…
보시다시피 완성도는 떨어진다.
이것도 어찌 보면 이 세계관에 대한 최초 창작자에 대한 예우라고 볼 수 있으려나?
원작자가 손수 만들어낸 등장인물을 배제하지 말라는 신호같이 느껴졌다.
“이건 패널티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순 없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치안이 확실한 수도의 고급 주택가.
내 몸 주인이 가진 재산의 도움을 받아 매입한 자택 안이다.
물론 ‘박찬영’의 명의로 구입한 집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그냥 사라지기엔, 오지랖 넓은 마악관의 교장이 걸리지 않는가?
그 사람이라면 ‘박찬영’ 학생의 실종 신고를 할 것이 분명하다.
실종 신고 접수 후 5년 뒤까지 해당 인물이 발견되지 않으면 잠정 사망처리가 된다 한다.
즉…
5년 뒤.
친척이 따로 없는 박찬영의 재산은 국가로 귀속된다는 뜻이다.
‘절대 안 되지. 적어도 5년 안에 공무원들이 ‘박찬영’의 집 안으로 들어 온다는 뜻이잖아?’
현재 이 세계의 박찬영이 보유한 자택은 5년 후에 몰수되리라.
그러니 내겐 새로운 신분이 필요했다.
애초에 실종 신고가 접수될 가능성이 없는 인물.
이왕이면 성인으로.
얼굴의 형태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디시빙(Deceiving)’ 스킬.
게다가 막대한 자본이 있는 내게는…
신분 위조란 별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박찬영’은 실종됐다.
지금 이 집의 지하에 있는 나는 미성년자 박찬영이 아닌, 제대로 된 성인의 신분을 가진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내가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이 사람은 친인과 가족이 없다.
실종 신고 자체가 접수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눈에 띄는 짓만 하지 않으면, 27년간 이 공간은 안전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깔끔히 치워 둔 집 바닥에 마법진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언젠가 액체 골렘과 싸운 장소에서 봤던 거대하고도 위엄 있는 마법진을.
우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