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사실 거짓말이다.
완결 후에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배속을 끊고 에일린을 만날 수 있었다.
텀을 넓게 둔다는 가정하에, 만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어차피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가동 중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쯤은 돌아올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법진을 점검하면서도 에일린을 만나러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학창 시절에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맺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1년마다 다시 만단다니…’
잊을 법하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문과 다를 바 없었다.
괜히 그날 보여주었던 에일린의 눈물이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졌다.
“뭐 그리 죽상을 하고 있담?”
“응?”
“자. 방금 완성했어.”
터억.
나의 상념을 깬 건 데이지였다.
평소와 같은 퉁명스러움으로 무장한 그녀가,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좀 두껍네.”
“이게 마지막 권이거든.”
“어라? 마지막 권? 이제 네 권째 아니었어?”
“…맞아. 네 권째.”
“뭐야. 아무리 내 배우는 속도가 빨라도 5권은 필요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
데이지가 고개를 휙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말을 번복하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나 보다.
내 성장 속도를 예상하지 못할 법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치트는, 단순히 다른 차원에서 시간을 번 것뿐만이 아니니까.
데이지와의 수업이 이론 수업에서 실습으로 손을 뻗어갈 무렵.
내 스킬창에 ‘연금술 Lv 0’가 등장했다.
시스템 상점창의 도움 없어도, 하나의 기술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숙련도를 가지게 되면 스킬창에 등장을 할 거란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띠링!
=
[스킬 이름] 선택과 집중
[레벨]
[속성] 기타
[타입] Passive
[상세]
스킬을 지정합니다. (최대 5개)
해당 스킬은 지정을 해제하기 전까지 더이상 숙련도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집중’할 스킬 한 개를 선택합니다. (최대 1개)
현재 ‘지정’ 되어있는 스킬의 수에 따라 추가 숙련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1개: + 15%
2개: + 35%
3개: + 70%
4개: + 125%
5개: + 200%
현재 숙련도 획득이 제한된 스킬 : [쿠크리 숙련 Lv 0], [톤파 숙련 Lv 0], [워 사이드 숙련 Lv 0], [챠크람 숙련 Lv 0], [타워 실드 숙련 Lv 0]
현재 집중된 스킬 : [연금술 Lv 3] + 200%
[재사용 대기시간]
=
‘선택과 집중…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으로 받은 이 스킬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어.’
지금 연금술 스킬의 성장 속도는 다른 스킬의 3배.
추가로 『팔방미인』 특성, 비밀 실험실에서 챙겨 먹은 ‘풍요의 정수’로 얻게 된 +100% 숙련도 버프까지 있다.
이들을 모두 더해보니…
정말로 천재의 반열에 들 성장 속도를 손에 넣은 것일 수도 있겠네?
덕분에 레벨이 가파르게 올라 벌써 3레벨을 달성했다.
하지만 내 지식의 범위가 특정 분야에 극도로 치우쳐져 있기 때문인 걸까?
혹은 카르마로 스킬 레벨을 강제로 끌어 올리지는 않아서?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스킬을 레벨업 할 때마다 뇌리에 새겨지듯 들어 오는 새로운 지식은 없었다.
그저 현재 습득한 연금술 능력의 척도를 눈으로만 보여준다는 듯 숙련도와 레벨만이 일렁일 뿐.
약간 아쉬웠지만, 그리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연금술을 파고들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무튼, 그만큼 내가 잘 따라와 줬다는 거지.”
“…쳇.”
“킥킥. 데이지.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법이래.”
“난 질책도 거의 안 했으니까, 칭찬도 인색해야 하지 않을까? 공평하게.”
“질책받지 않은 건 내가 실수를 안 해서잖아.”
그녀의 볼이 한층 더 부풀었다.
알긴 아나보다.
방금 나의 말에 반박할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데이지가 제자를 들인다면, 그 대상이 설령 귀족이라도 무척 엄할 것 같지 않은가?
예상은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평소의 까칠함이 배가 되어 실수를 하나 하지 않나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데…
그런 그녀에게 혹시라도 혼나지 않기 위해선 온종일 연금술 공부에 매진해야 했다.
다행히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세계에서 보낸 시간이 허사는 아니라는 듯, 지금까지 데이지가 내준 과제는 전부 소화해 내었다.
아직까지 따끔한 경고를 받을 정도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연금술은 내 주된 분야도 아닌데, 왜 이토록 실수를 없애는 것에 집착하냐고?
실상은 좀 다르다 한들, 저런 어린 소녀에게 혼나는 건 쪽팔린 일이잖아.
무엇보다 데이지의 실망을 사고 싶지 않은 내 자존심 섞인 발악이었다.
“그래서 칭찬은?”
“……”
“뭐야… 없는 건가? 좀 아쉽네.”
“윽…”
내가 의도적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내니, 데이지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양심에 상당히 찔리나 보다.
그녀는 의외로 이런 감정적인 호소에 약했다.
난 그 부분을 노린 것이고.
“…그래! 너 잘났다! 뒤지게 우수한 제자님을 둬서,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됐냐?”
“푸하핫! 응! 고마워!”
“…호구 자식. 좋단다.”
칭찬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칭찬하기 싫어서 버티는 데이지가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린 건데.
정말 행동까지 어린애 같다니까?
“네가 이상한 거야. 아니, ‘이상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해. 벌써 끝이 보이다니…? 이 내가, 두 눈으로 본 걸 의심할 날이 올 줄이야…”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나? 확실히 빠르긴 하네.”
“솔직히 말해. 너 사실 연금술 배운 적 있는 거 아니야? 그편이 자연스러운데.”
“그럴 리가.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사용 가능한 편법을 모조리 쓴 것뿐이야.”
“…피,필사적… 큼! 아무튼! 도대체 무슨 편법을 써야 그런 게 가능해?”
지금까진 내 비밀을 캐묻기보단,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던 데이지다.
허나 슬슬 버티기 힘들 정도로 호기심이 차올랐나 보다.
이렇게 직접 물어 올 정도면.
“하핫. 곧 알게 될걸?”
알게만 될 뿐이랴.
다른 차원이 있다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텐데.
데이지라면 분명 흥미로워할 것이다.
그녀의 본질은 새로운 지식에 허기진 학자니까.
“지금 말로만 들어선 믿지 못할 거야.”
“……”
“넌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 성격이잖아?”
“뭐어… 그렇긴 한데… 네 말이라면, 속는 셈 치고 믿어줄 순 있을…지도?”
“오. 정말? 터무니없는 말이라도?”
“…터무니없는 말이라도.”
데이지가 내 눈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낯간지럽네.
그녀는 부끄러운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돌려 말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뜻이 변질되는 건 아니었다.
“신기해라… 네가 논리보다 우선시하는 게 있다니?”
“이익! 착각 마! 우선시하는 게 아니라, 동일 선상에 두는 거야!!”
“그 정도만 해도 영광이지.”
“……그,그래서. 나보고 학자 실격이라고?”
“하하하!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잖아.”
결국 이 세계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단 사실은 끝까지 비밀로 했다.
새로운 책을 건네준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10회 독은 끝내야 할 법한 질문들이 쏟아진 이유.
연금술 실습 도중 초보들이 놓치기 쉬운 자잘한 실수를 능숙한 손길로 대처한 이유.
새로운 걸 알려주면 수십 수백 번 연습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체득해 내는 이유 등등은…
데이지에겐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큭큭. 그래도 6권과 4권은 차이가 너무 크지 않아? 무려 1.5배나 차이 나는데.”
“…뜬금없겠지만, 네 재능. 솔직히 말해서 배가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다면 거짓일 거야.”
“…으음… 역시 그러려나… 어쩐지 미안하네.”
“아니! 잠깐! 정말로 불만이 있단 뜻은 전혀 아니야! 이건 진심. 왜냐하면, 그 재능 덕분에 나도 마음이 편해졌거든.”
“마음이 편해져?”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가장 큰 미련을 덜어 놓은 것처럼 후련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직접 알려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 홀로 독학을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라는 짐작을 했어서.”
“……아.”
“그럼 조금이라도 더 상세히 기술해야 하잖아? 그 왜, 나중엔 궁금한 게 생겨도 마땅히 질문할 사람은 없을 테고.”
가벼운 어조.
마치 오늘 먹은 점심에 관한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흔한 일상 속 잡담을 하는 것만 같다.
그에 비해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네.
데이지가 말한 ‘내가 독학을 하게 되는 시점’은,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니까.
“……그게 책 분량을 6권으로 늘리려 한 이유? 최대한 많은 걸 담아야 했으니?”
“그래! 후훗, 이제 알겠지? 난 틀리지 않았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수를 예상한 거라고!”
애초에 그녀가 살아 있을 동안 내가 전부 배울 수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던 건가.
하긴, 불로의 약이 어디 잡화 상점에 푼돈을 받고 파는 감기약도 아니고…
내게 시스템이란 사기적인 능력이 없었다면, 분명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데이지는 그녀가 떠나간 뒤의 세상까지 전부 생각해 두었나 보다.
어떨 때는 무척이나 어린애 같으면서도,
이럴 땐 또 어른스럽네.
너무 과할 정도로.
스윽.
“…뭐,뭐야.”
나는 따로 대답해주는 대신, 그냥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을 이리저리 꼼지락대는 것이 쑥스러워 하는 모양새였지만…
무시하고 그 암청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후배님! 나 왔어!”
“안녕하세요.”
“어라? 짐이 전부 풀어져 있네? 오늘은 연금술 연습하러 안 가는 거야?”
“오늘부턴 안 가요. 슬슬 배울만한 건 다 배운 것 같아서요.”
“아하. 그렇구나. 그럼 에트나는?”
“앞으론 이 동아리실로 놀러 오신다던데요? 뭐… 그것도 앞으로 며칠이겠지만요.”
“…그러네.”
그날, 이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고백한 이후.
에일린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방긋 웃으며 건네는 인사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이상한 농담도.
실없는 일상 이야기도.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것이 꾸며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감에 의존한 것들 말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변한 점도 있었다.
가끔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는 것.
‘아. 지금도.’
에일린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내 쪽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초점이 살짝 풀려있는 것이, 무언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런 에일린의 모습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눈가에 습기가 차오를 것만 같은…
무척이나 애달프고, 서글픈 눈동자를 했기에.
‘아무래도 이별 준비가 순탄치 않나 보네.’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없었다.
해봐야…
에일린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정리되기를 기도하는 정도려나.
“선배님. 오늘 에트나 선배한테도 말하려고요.”
“……”
“에일린 선배님?”
“아? 어! 어어! 뭐라고?”
“저, 곧 떠나는걸요. 슬슬 말해야죠. 이래저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아… 으응. 에트나… 그래. 어디까지 말하려고?”
“그냥 며칠 뒤 떠난다는 것하고, 연락이 힘들다는 것 정도?”
에일린 때처럼 완전히 연락이 안 된다는 것 보다,
바빠서 연락이 힘들어진다고 하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성 관계나 친구보다는 연금술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이던 그녀다.
내가 아는 에트나라면…
아는 후배가 사라진 정도로 일상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으리라.
내 억측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에일린은 나의 판단을 지지했다.
“…그래. 너무 깊게는 말고, 간단하게만 이야기하자.”
“혹시 에트나 선배가 연락 안 된다고 투덜대면, 잘 좀 달래주기에요?”
“응. 그럴게. 꼭.”
에일린이 다짐이라도 새기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까지 꽉 쥔 것을 보니 큰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살짝 당황했다.
반쯤 농담을 섞은 말이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한 요구는 아닌데…
무슨 유언이라도 들어주는 것 같네.
아.
완전한 헤어짐이니 유언 비슷한 거긴 하려나?
에일린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생사에 관한 소식도 듣지 못할 테니까.
‘에일린은 꽤 정이 많은 타입이구나…’
시점이 다른 만큼, 이별에 대해 받아들이는 무게도 다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