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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4화 〉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

­ 저벅. 저벅.

“에일린 선배님.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우리 집.”

“네? 가족분들은?”

“아. 괜찮아. 나 혼자 살거든. 지금 아무도 없어.”

“……”

말없이 에일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의문 어린 눈으로 날 마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1초 뒤.

에일린이 깜짝 놀라서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아니야! 오해하지 마! 진짜 이상한 생각이라곤 티끌도 없었어! 정말로!”

널 자취방에 데려오려는 이유에는 흑심 하나 없다,

보통이라면 이런 해명은 거짓이라 확신했겠지만…

“…믿을게요.”

그냥 가기로 했다.

내 감도 눈치도,

방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설령 어떻게 해보려 한들, 내겐 언제든 에일린을 제지할 수 있는 무력이 있지 않은가?

­ 저벅저벅.

대학생이 자취방을 잡은 이유가 보통 그렇듯,

자취방의 위치는 대학교와 가까웠다.

‘가까운 수준이 아니라, 완전 코앞인데?’

집안에 돈이 많은 만큼 이런 명당에 위치한 집도 어렵지 않게 구했나 보다.

그렇게 나와 에일린이 그녀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가기 직전.

“…잠깐. 주변에 우리 학교 학생은 없지? 여기가 대학 근처다 보니 종종 지나가거든.”

“아. 그러네요. 조심하는 게 좋죠.”

나는 에일린의 말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내 감각에 걸리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휴… 좋아. 빨리 들어가자.”

“선배님은 매번 이렇게 조심해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요? 귀찮겠다.”

“응? 무슨 소리야?”

나는 에일린의 조심스러운 행동을 십분 이해했다.

대학과 무척 가까운 곳에 집이 있다는 걸 친구에게 들킨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겨 버리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 집은 나만의 집이 아닌, 친구들의 아지트로 변해버린다.

여름철엔 흘린 땀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실.

술 마시고 막차가 끊긴 뒤에는 공짜로 잘 수 있는 여관.

시험공부 및 조별 과제를 할 때 모이는 공부방.

그 밖에 냉장고에 사지도 않은 맥주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찬장 위 라면이 사라지기도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해서 누군가에게 집에 들어가는 걸 보이기 싫은 거죠?”

“어… 아닌데?”

“네?”

에일린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야말로 놀랐다.

이 이유가 아니라고?

“이미 친구들은 나 여기에 사는 거 알고 있어.”

“어… 그런데 다들 안 놀러 오세요?”

“가끔 놀러 오긴 하는데… 요즘은 주로 후배님이랑 노느라 좀 뜸했네. 무엇보다 도어락이 열쇠나 비밀번호가 아니라 고유 마나 인식이잖아. 나 없인 절대 못 열어.”

“……”

에일린이 도어락을 가볍게 터치하며 되물었다.

나는 그녀의 마나가 도어락에 스며드는 것을 어렴풋 감지했다.

동시에 도어락 잠금이 풀릴 때 나는 특유의 ‘삐빅!’하는 기계음도.

우리 집 문은 평범한 비밀번호 방식이라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네.

“그럼 왜 그렇게 조심한 건가요?”

“…너 남자, 나 여자. 같이 들어가는 걸 들키면 엄청 골치 아파지잖아.”

너무 현대와 비슷한 세계관이다 보니 자꾸 남녀 역전 세계인 걸 잊는다.

내가 이 세계에서도 남자로서 행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언행을 제한한 이유도 있고.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멍청해 보이는 발언이긴 했다.

쪽팔리네.

에일린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보통은 이쪽을 먼저 생각할걸?”

“제가 보통이 아닌가 보죠.”

“그렇긴 해.”

이 세계에서 처음 들어가 보는 여자의 집.

상당히 중성적인 인테리어라 ‘평범한 여자의 방’을 파악하진 못하겠다.

나뒹구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이, 에일린의 집인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테이블 옆에 위치한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대로 에일린이 예고한 ‘중요한 이야기’를 기다렸지만,

그녀가 내게 처음 꺼낸 말은 ‘밥부터 먹을까?’였다.

“뭐 해주시게요?”

“아니. 나 요리 못하잖아.”

“그러고 보니 생고기를 가위로 자르려 했… …잠깐, 자취를 하는 데 요리를 못하신다고요?”

“…응.”

“그럼 매일 식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큼… 요 바로 앞에 백반집 아저씨한테 전화하면 배달도 해주더라…”

백반집이면 매일 메뉴도 바뀌니까…

그래도 따뜻한 밥은 먹는단 뜻이다.

돈이 많으면 매 끼니를 외식으로 때울 수도 있구나.

살짝 신세계다.

결국 배달 음식을 먹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내가 손수 요리를 해줬겠지만,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장 보러 다시 나가기엔 귀찮고.

“와… 후배님은 요리까지 할 줄 알았구나.”

“근사한 건 못하고, 먹을 만 한 집밥 정도밖에 못 해요.”

“…그게 더 로망인데?”

하긴…

양식 요리만 할 줄 아는 사람과, 한식만 잘하는 사람.

둘 중 배우자로 삼기 이상적인 사람은 후자니까.

양식은 가끔 먹어야 맛있는 것이다.

­ 띵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꽤 널찍한 자취방 안쪽을 울렸다.

배달이 왔다는 뜻이다.

“뭐 시키셨어요?”

“떡볶이.”

“…저녁으로 떡볶이를?”

“나,남자들은 이거 좋아하지 않아? 혹시 못 먹어?”

“아니요.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맵고 짠 음식은 선호하지 않지만,

누군가 사준 음식에 투정을 부릴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씁! 가만 앉아 계세요.”

나는 얻어먹는 자 답게 상을 차리고 닦는 등 열심히 움직였다.

거들려는 에일린은 강제로 착석시켰다.

내가 쌀이 없으면 끼니를 때운 거로 치지 않는 토종 한국인까진 아니지만…

분식을 식사로 치기엔 좀 그러네.

아무튼 식사 아닌 식사는 적막 속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그녀가 떡볶이를 집어 먹는 도중.

에일린이 먼저 말을 꺼내길 바랐지만,

여러 망설임 섞인 그녀의 눈을 보니 기다리기만 한다고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할 이야기란 것이 뭔가요?”

그러니 내가 직구로 물어보았다.

이대로 식사가 끝나면 유야무야 될 것 같거든.

“…다 먹고 하면 안 될까?”

“계속 도망칠 거면, 저 돌아갈 거에요.”

둘이서만 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

게다가 지금 우리 둘 사이에 깔린 이 분위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밖에 없다.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다.

혹시 고백을 받으면, 나로선 찰 수밖에 없으니까.

난 아직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에일린.

“네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은 이유, 지난번엔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지?”

“그랬죠.”

“그건 아마 말해주기 싫거나, 부담스럽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맞아?”

“비슷한 사정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듣고 싶어. 가능한 한 지금.”

“…어째서 그렇게나 듣고 싶으신가요?”

단순한 친구 사이라면 굳이 이러한 걸 물어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연인을 만들길 꺼리는 원인을 궁금해할까?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난 에일린의 입에서 직접 듣기 전까지는 몰라야 한다.

그러니 모르는 척했다.

“그건…”

에일린이 말을 끌었다.

마지막 한걸음.

이제 선을 넘기까지 한 발짝 남았다.

‘에일린. 넌 원래 쫄보잖아. 그러니 도망쳐. 아직… 아직 되돌릴 수 있어.’

그녀가 되돌아가길 선택하기를.

만일 도망친다면, 난 오늘 일을 기억에서 지울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한들, 실제로 무언가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괜찮다.

계속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자신이 내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에일린은 유독 용기가 있었다.

“연인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네 그 생각을 돌리고 싶으니까.”

“……”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기회가 온다면… 후배님 너의… 연…인이 되고 싶었어.”

아름다운 동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힘겨움이 담겨 있었다.

분명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전부 쥐어짰을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 눈을 하고 있을까?

“결국… 해버렸네요.”

“응… 해버렸네. 고백. 미안해. 약속 어겨버려서…”

“……왜 그랬어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불리한 싸움인 걸 알면서도 걸어온 이유.

똑똑한 그녀라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내게 고백한 이유가 뭘까.

에일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 없는 도박에 몸을 던질만한 성격은 아닌데.

“사실, 나 후배님을 좋아한 지 꽤 됐어.”

“후… 알고 있어요. 제가 에트나 선배를 만난 이후부터 확 변했죠?”

“흐악?!… 어,어떻게…”

“티가 나서.”

“으……”

에일린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연심이 초창기부터 들켰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나 보다.

“아,아무튼! 말은 못 하지만 이걸 자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긴 싫었거든.”

“…에일린 선배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다가올 줄 알았어요.”

이렇게 깜빡이 없이 고백부터 때려 박는 것이 아니라.

나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려 했는데… 자신이 없더라고. 실수하지 않으면서 후배님이 연인을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를 밝혀낼 자신도, 그 생각을 성공적으로 돌릴 자신도.”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다짜고짜 고백이라니…”

“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지만… 후배님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단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해서?…”

“……”

“어? 후,후배님 표정이? 어어? 호,혹시 맞아?”

“그런 것보다! 아직 이해가 안 가서 어벙벙한데요. 다른 이유는 없나요?”

에일린이 눈매를 좁히곤 나를 노려본다.

아무래도 내 표정을 읽으려 시도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표정이 흐트러진 건 잠시였을 뿐.

이미 난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그리고 있었다.

결국 에일린은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순서를 바꾼 거야. 먼저 고백한 다음, 후배님의 문제를 둘이서 함께 해결하기로.”

“함께?”

“응. 서로 협력해서. 나 혼자서 비밀을 알아내려 날뛰고, 바꾸려 노력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해봐야… 정작 후배님 본인이 바꿀 마음이 들지 않으면 힘들잖아? 이런 험난한 길. 초보자인 나한텐 너무 고난이도야.”

“허… 그래서 나온 결론이 같이 으쌰으쌰 해보자라니…”

“맞아!”

“……그러니까 선배님의 말을 정리하면 이거네요. ‘나랑 연인이 되는 것에 협력해 줘!’… 맞나요?”

“마,맞아…!”

뻔뻔하다.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고백자가 고백 대상보고 자신의 연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달라니?

세상에 이토록 뻔뻔한 고백이 있을 수가.

아니, 그러고 보면 에일린은 은근 낯이 두꺼웠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

그리 면박을 당하고도 내게 끈질기도록 들러붙었으니까.

그 이후로도 며칠간 철면피를 쓴 덕에, 결국은 나랑 친해지는 것에 성공해버렸다.

이런 급발진도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짓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후… 이런 말까지 들어버리면… 좋아요. 그럼 이야기해 줄게요. 전부는 못 해주지만, 그 일부라도.”

“응. 고마워.”

에일린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째서 내가 연인을 사귀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나 보다.

나는 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의욕이 가득 찬 에일린에게, 어렵사리 입을 뗐다.

“친하던 친구랑 헤어지는 일이 종종 있죠. 가령 이사를 한다든지, 그 밖에 다양한 이유 때문에요.”

“응. 있지.”

“친구는 뭐. 아프긴 하겠지만 힘들 정도는 아니죠. 하지만… 이별이 예정된 연인은 누구든 만들고 싶지 않잖아요? 그건 진짜 힘들어지니까.”

“……이별?… 설마…”

“저 곧 떠나요. 연락도 불가능한, 정말 먼 곳으로.”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소설이 완결된 이후.

배속을 돌릴 동안 이 세계에서 존재가 사라져 버릴 나를,

2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할 미래를,

난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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