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야, 에일린. 똥 싸고 왔어?”
“소고기 앞에 두고 그딴 이야기 하고 싶냐, 넌?”
“아니… 너무 늦게 오길래.”
에트나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헤실거렸다.
말은 그리했지만, 에일린은 내심 안도했다.
에트나는 후배와 둘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에게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다.
‘애초에 별다른 일은 없긴 했지만.’
한번 끊겼던 술자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 잔. 두 잔씩 오가다, 에트나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조촐한 술자리는 끝났다.
눈이 반쯤 감긴 에트나의 경우는 어깨를 흔들며 깨우자 눈가를 부스스 닦으며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도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나 보다.
술기운이 돈 동성 친구의 안전은 에일린의 관심 밖이었기에 대충 택시를 태워 집에 보낸 뒤,
후배인 박찬영을 데려다주기로 했다.
“혼자 가도 된다니까. 몸을 지칠 정도의 호신술은 익히고 있어요.”
“후배님이 운동을 하는 건 알고 있어. 딱 봐도 그리 보이니까. …으앗!? 이거 혹시 성희롱이냐?”
“푸흡. 성희롱은 무슨.”
애당초 운동을 좋아하기에 비슷한 취미를 가진 거로 보이는 에트나에게 호감을 느낀 걸까?
에일린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확실히 그녀의 후배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방과 후에 헬스장에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대부분의 남학생 역시 몸을 가꾸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후배의 등 넓이와 비교해 보면 대서양과 저수지의 수준 차이었다.
“그래도 후배님은 남자잖아. 대응할 수 있다곤 해도, 불쾌한 경험은 안 할수록 좋지?”
“그건 그렇지만…”
“혹시 정말로 싫으면 편하게 말해. 그 왜, 있잖아. 그거… 음…”
“괜찮아요. 선배님이 제집 주소를 아는 것쯤이야. 그런데… 오늘 이후로 현관문은 꼭꼭 걸어 잠가야 하겠네요.”
“킥킥킥. 너무하네.”
에일린은 그녀의 곁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목소리. 평소와 같은 몸짓. 흔들림 없는 발걸음. 변하지 않은 얼굴색.
꽤나 많은 술잔이 오갔음에도 전혀 취하지 않은 듯했다.
솔직히 술에 취해서 흐트러진 그를 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어쩐지 평소 그가 술에 약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선배님? 저 뭐 묻었나요?”
“응? 아니? 왜?”
“얼굴을 빤히 보시길래.”
“그,그냥? 후배님은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아서.”
후배의 상상과 달리 에일린은 그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서만 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 잘라 다르다고 하기도 뭐 했다.
몸짓과 발걸음을 살핀 것은 찰나지만, 얼굴을 살핀 시간은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길었으니까.
‘하지만… 학교 밖, 그것도 밤길에 보는 후배님 얼굴을 어떻게 안 봐…?’
겸사겸사라는 말도 있듯이, 얼굴 구경은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는 것만으로 죄가 되지는 않지 않은가?
에일린은 떳떳했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일단은 떳떳했다.
“취하신 것 같아요.”
“그,그래? 왜?”
“얼굴이 붉어서. 취기 도나요?”
“……”
찰나의 시간.
그의 얼굴에 다 안다는 듯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순수한 얼굴로 바뀌었다.
후배는 그러한 표정으로 에일린이 안부를 물어왔다.
누군가 들었다면 선배가 취한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말과 행동이었지만…
아까의 표정 변화를 봐버린 에일린은, 사실 후배가 자신을 지금 놀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에일린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가 취기 때문이 아니란 걸 눈치챈 듯하다.
‘…요망하네 진짜.’
에일린을 당황시키기 위해 짓궂은 장난은 친다.
‘선후배’라는 상하 관계에서 비롯된 벽은 허물어지고, 나름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놓고 에일린의 속마음을 눈치챘다는 티는 내지 않는다.
이게 의미하는 건…
‘내 멋대로 후배님을 좋아하는 것까지 신경 쓰진 않지만, 고백하지는 말란 건가.’
그리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후배에게도 에일린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수줍은 티를 냈거나, 눈치챘다는 티를 대놓고 내며 고백을 유도했을 테니까.
그럼 방금처럼 모르는 척 넘어갔다는 것은?
현재 ‘친한 친구’인 둘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은 듯했고.
눈치 빠른 에일린은, 후배의 진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내었다.
그녀더러 자꾸 마음을 접으라 하는 점을 보고 잔혹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흑심을 품었음에도 계속 친구로 지내게 해주는 점이 상냥하다고 해야 할까?
‘응. 어려운 길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보통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허나 많은 사람의 첫사랑은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리서 지켜보다가 끝난다고 한다.
그들에 비하면 에일린의 경우는 축복받은 것이리라.
적어도 곁에 있을 기회는 있으니까.
“있잖아. 아까 잠깐 했던 이야기 기억나?”
“어떤 거요?”
“내가 지금까지 연애를 안 했던 이유.”
“…연애란 것이 마냥 마음 편한 게 아니라, 신경 써야 할 일이 여럿 생겨서 싫다 하셨나?”
“응. 애쓰는 건 남자 쪽이든, 여자 쪽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난 그리 여유롭지가 않았거든. 평범한 연애를 하기에는.”
이 이야기는 서두에 불과했다.
진짜 본론은 이후에 나올 질문.
굳이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있었다.
“나는 그래서 연애가 싫었어. 그런데… 후배님은 왜 연애가 싫어?”
에일린은 연애가 하기 싫다는 박찬영의 생각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당연히 후배의 생각을 저러한 방향으로 튼 원인을 찾는 것이다.
원인을 찾아야, 해결하든 대안을 만들든 개입이 가능해지니까.
“제가 연애를 꺼리는 이유라…”
“옛날 여자한테 크게 데여서? 아, 친한 여자가 없다 했으니 그건 아니려나. 그럼 그냥 비혼주의 비슷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참고로 동성애자는 절대 아니니까 명심해두세요. 아!! 소아 성애도 아닙니다!! 전 평범한 여자를 좋아해요!”
“아? 으,으응… 그런 뜬금없는 추측은 안 했어!”
“그럼 다행이고요.”
박찬영이 동공을 마주치며 하는 말에 압도당한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아닌 건 물론, 그리 오해받는 것도 싫나 보다.
동성애자.
에일린은 사실 가능성 중 하나로 염두에 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아성애자라니?
그런 건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살짝 당황했다.
오해하지 않았단 에일린의 말에 무척 안도한 표정을 보니,
과거에 그런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는가 싶었다.
‘후배님이 소아 성애자? 풋. 그럴 리 없지. 게다가 남자 쪽의 소아 성애자는 엄청 드물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애자도 아니다.
박찬영이 연애를 꺼리는 원인 중 가장 골치 아픈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최소한 에일린이 연애 대상 안에 포함이 된다는 뜻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특별한 이유… 네. 맞네요. 정말 희귀하고 특별한 이유긴 하죠.”
“엄청 궁금해지는데…”
“하하하!”
“그럼 연애를 꺼리는 건 네 자의야? 아니면 타의?”
“반반입니다. 강제된 부분도 있고, 제가 인정하고 수용한 것도 있고.”
에일린은 아쉬워했다.
이렇게까지 대화가 나왔는데도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건…
아직은 말해줄 생각이 없단 뜻이니까.
아무래도 그 이유란 것이 가볍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긴가보다.
‘후배님은 비밀이 너무 많네. 정말.’
그래도 수확은 확실하게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한 길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에.
그리 생각한 이유?
연애를 꺼리는 이유가 온전한 자의가 아니라면,
그는 언제든 이성에게 연애 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배의 인간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그와 가장 가까우면서 연인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인물은 바로 에일린 본인이었다.
…아니면 에트나거나.
“그냥 아주아주 복잡하고, 또 어쩔 수 없으며, 조금은 이기적인 이유입니다.”
“이기적?”
“객관적으로 봐도, 제가 못 할 짓을 하고 있긴 하거든요.”
“그렇게 말해도 난 네가 무슨 사정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르는걸.”
“……그러네요. 선배님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답답한 마음에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 분위기에 취한 걸까?
“풋. 분위기에 취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거겠지.”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오? 너 주량에 자만했다간 에트나 꼴 난다. 자기 주량을 몰라서 취한 채 계속 마시다 그대로 고꾸라지는.”
“아. 그건 피하고 싶네요.”
“그치? 킥킥킥.”
확실한 단서는 얻지 못했지만, 더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억지로 속마음을 열려고 들었다간 큰 반감을 사고 말 테니.
누군가 무엇을 숨긴다면, 숨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도 없이 까발려진다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에일린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만 해도 항상 속마음을 숨기면서 있는 힘껏 강한 척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더 많았지만, 앞으로의 행동 방향은 정해졌다.
달라지지 않았다.
박찬영은 충분히 에일린을 연애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원래의 계획대로 반하게 하면 된다.
후배에게 강제로 연애를 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
그건 서로의 마음이 맺어진 다음,
그 이후에 함께 해결하면 될 문제다.
그때는 박찬영도 에일린에게 숨기던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질 테니까.
계획은 완벽하다.
이제 능력 것 실행에 옮기면 된다.
하지만…
‘그래서… 남자를 꼬,꼬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지금까지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에일린은 계획의 첫 단계부터 막혀버렸다.
*
무언가가 변했다.
에일린을 보며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찬영아, 방금 솥 안쪽 작게 반짝이는 거 봤어?”
“네. 하얀 불빛이었죠?”
“맞아! 순식간이었는데 용케도 봤네? 그게 바로 이론에서 공부했던 스파크 포인트 현상…”
봐라.
난 지금 에트나와 찰싹 달라붙어 연금술 연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에일린이라면 부루퉁한 얼굴로 우리 둘 사이의 밀착된 부분을 노려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 질투했냐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머리를 싸맨 채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 하루 멍때리는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가끔 나를 보곤 요상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녀가 변한 원인은 나한테 있단 뜻이겠지.
변하기 시작했던 때를 거슬러 올라 생각해 본다면…
역시 저번의 그 대화 이후부터 이상해졌다.
‘너무 숨기긴 했나?’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
그녀는 내게 그 이유를 밝혔음에도,
나는 의도적으로 숨겼다.
솔직히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면 상처받을 법 했다.
똑같은 주제를 놓고, 자신은 속마음을 알려주었는데도 상대방은 숨긴 것이니까.
친구 쪽이 자신에게 약간의 거리감을 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머지않아 떠날 사람이며, 연인의 형태든 친구의 형태든 에일린의 곁에 줄곧 남아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이 결정되었을 때.
친하던 친구에게 차마 이 사실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지는 감정과 비슷했다.
사실 속마음을 말하자면…
나는 친구 한 명이나 연인 한 명을 늘리는 것 보다 데이지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에일린은 나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테지만, 데이지는 아니다.
‘그래. 차라리 이 사건을 계기로 차차 사이가 멀어지면… 헤어질 때 에일린이 받는 상처가 덜해지겠지.’
그냥 손 놓고 지켜보자.
그리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솔직히 좋지만,
이대로 멀어지는 것도…
미래를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늘도 감사했어요. 에트나 선배님.”
“아니야. 찬영이도 수고했어! 날이 갈수록 실력이 쑥쑥 늘어주니까, 지켜보는 나도 뿌듯하더라!”
내 연습은 끝이 났지만,
에트나는 본인 연습을 하기 위해 실험실에 남았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귀가하게 된 건 나와 에일린 둘이다.
이제 막 노을이 내려앉는 늦지 않은 시각.
평소라면 그녀가 적당히 핑계를 대며 나와 따로 귀가하려 했을 테지만…
이젠 내 집 주소도 알게 되었는데, 굳이 따로 갈 필요 없다는 나의 말에 함께 가기로 했다.
- 톡톡.
고민이 많이 보이는 에일린과 나란히 걸어갈 때.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쩐지 긴장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에일린이 보였다.
“후배님. 그… 오늘 시간 돼?”
“저녁 식사?”
“응.”
저녁 식사 권유를 받았다.
그런데…
분위기를 읽어 보니 에트나와 함께 가자는 건 아닌 듯싶었다.
“둘이서만요?”
“가능하면.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거든.”
에일린이 볼을 긁었다.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니,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단어 선택에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겠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