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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

시선이 내리꽂혔다.
후배의 키는 무척 컸기에, 에일린이 그와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약간 들어야 했다.

에일린은 자신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녀로선 딴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침묵을 견뎌낼 수 없었다.

“…깜찍한 생각 하시기는.”

“미안…”

“음. 미안할 건 아니고요.”

에일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의 눈을 피했다.
혹시 화났으려나?
그가 눈을 내리깐 그녀를 보며 피식거리는 것을 보면, 다행히 화가 난 건 아닌듯싶었다.

지금 그녀의 손목은 박찬영의 손에 잡혀있다.
그럴 때가 아닌 건 아나, 그의 손바닥 감촉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의외로 거칠고, 강하며, 큼지막하다.
그럼에도 약간 상냥하기도 했다.
상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범죄를 저지르던 도중 경찰에게 들켜 연행되는 것과 유사했지만.

“어쩐지 남의 돈으로 얻어먹는  치고는 거리낌 없이 술도 시키고, 고기도 시키고 하더라니.”

“…티 났어?”

“너무  났죠.”

티가 났다니…
에일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 스스로도 한 연기 한다 생각했지만, 후배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나보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소고기가 후배에게 얻어먹기 좀 비싼 음식인가?
하물며  식사 자리인데…
박찬영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에일린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의 집안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한가지 계획을 머릿속에 세웠다.
오늘은 자신이 밥을 사버리기로.

이런 간단한 일에 계획이 필요한 이유?
대놓고 말한다면 후배의 성격상 허락해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계획이 선조치 후보고다.
에일린이 박찬영 몰래 계산을 해버린다면 그로선 손 쓸 수 없지 않은가?
그때 가서 말리려고 해도 이미 돈은 자신이 내버린 뒤고.

에일린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화장실을 가는 척 카운터로 향해 밥값 결제를 마쳐 놓으려 했고, 그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눈치 빠른 후배가 조용히 뒤따라오다 카드를 넘겨주는 순간 에일린의 손목을 잡기 전까지는.

눈앞의 카운터.
손에 들려진 카드.
변명도  하는 현행범 체포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에트나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카드는 다시 지갑에 넣었다.
당연히 계산은 박찬영이 했고.

“계산 내가 한다니까.”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소고기는 연하에게 얻어먹기엔…”

“그럼 다음에 선배님이 사주세요. 맛있는 거로.”

에일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의 의미는 다음도 있다는 건가?

오히려 좋다.
만일 그때가 온다면,
저 멀리 보이는 에트나는 빼놓고 둘이 가기로 결심했지만…

“무슨 생각하시는지  것 같은데, 따돌리지 말자고요. 다음에도 셋이 모이죠.”

“…다,당연히 그래야지.”

후배는 이조차 눈치를 챈 듯했다.
에일린은 머릿속이 훤하게 읽히는 감각에 살짝 부끄러워졌다.
혹시 그는 자신의 감정까지 눈치챘으려나?

‘…사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낮겠지. 후배님은 눈치가 빠르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그리 크지 않았던,
애정보다는 동정심과 호기심에 가까웠던 감정.
그렇기에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그를 마음에 품어봐야 이루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는 건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실패가 예정된 일.
비효율적인 일.
에일린은 이런 것들에 애당초 손을 대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
그렇기에 운동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것이기도 하고.

‘쓸데없이 마음고생만 할  눈에 뻔히 보였지. 그런데도…’

명분과 이성이 모두 박찬영을 친구로 두라 말해주었다.
그랬기에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다.
초창기엔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친구 수준의 호감.
게다가 누구에게도 반하지 않는 건 자신 있는 일이었다.
에일린은 20여 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후배를 언제나 친구로 여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허나 이는 연애 초보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친구에 가까웠고, 친구로 여기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힘들어짐을 느꼈다.
에일린의 감성은 이성의 제어를 벗어났다.
당초 예상과는 정반대로, 갈수록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의 외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잘생긴 외모도 커다란. 정말 커다란 문제긴 하지만…
후배의 내면 쪽이 에일린의 마음을 흔든 핵심 원인이었다.

‘세상에 후배님만큼 내가 바라오던 남자가 있을까?’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즐거운 건 너무 당연한 거고.
둘만 있으면 더 좋은 건 이제 와서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친구였다.

허나 그를 친구로만 여기려 노력하는 에일린을 언제나 괴롭혔던 생각은,
박찬영과 연애·결혼을 한다면 분명  장소를 얻을 것 같다는 망상이었다.

솔직해선  되는 에일린.
그녀는 언제나 완벽한 자신을 연기했다.
집안 사업을 이어갈 장녀로서 토할 정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졸업 후, 회사 경영보다는 대학원에서 원소 마법을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는 것도.
가끔은 모든 것이 버거워서 내려놓고 싶어진다는 것도.
전부 가슴에 묻어둔  눈을 감고 버텨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는 하루하루를 솔직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터벅. 터벅.

“후배님. 너는 연애  안 해?”

“그럼 선배님은요?”

“나?

“네. 듣자 하니 고백도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나는…”

항상 핑계를 대오던 ‘지금은 전공 공부에 열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작게 오른 술기운 때문일까?
잠깐 망설인 에일린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연애란 것이, 내가 어렸을  상상했던 것처럼 마냥 장점만 있는 건 아닌  같아서.”

“……그렇군요.”

“뭐, 연애 초반에는 다들 행복해 보이지.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다는 아니잖아?”

세상 모든 연인은 행복해 보인다.
에일린의 친구  한 커플이 특히나 그러했었다.
찰떡궁합, 인생의 반쪽, 헤어지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사이.
그만큼 잘 어울렸던 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모든 면을 내보이고 말았다.
에일린이 장녀라는 부담감에 힘겨워 하는 것처럼, 타인에게   할 약한 면모를.

좋게 말해서 연인에게 숨김없이 솔직한 자신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 쪽은 그리 간단히 여기지 않은 듯했다.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하리라 생각했던 여성 쪽이, 사실은 상처받기 쉬운 평범한 인간이란  눈치챘을 때.
남자는 입으론 속마음을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후 마음이 식은 듯 차근차근 뒤 돌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여자와 남자는 타인이 되었다.
그렇게나 행복해 보였던 두 명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상도 못 했지. 고작 기대지 못하게 된 정도로 정이 떨어지다니…’

이건 누군가를 탓할  없는 이야기다.
수억 년의 역사 동안 남성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여성이 동반자로 삼기에 유리했으니까.
남자 쪽이 나빴다고 보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의 성별에서 오는 성향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에일린의 친구들이 말해주길, 이것이야말로 많은 여자들의 첫 연애가 질척하게 끝나는 이유라고 했다.
너무 과하게 속을 보여줘,
남자쪽이 ‘내 미래를 모두 맡기기엔 그렇게까지 듬직하진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연애 경험이 많은 친구는 입을 모아 에일린에게 조언해주었다.
남자친구에게 절대 모든 것을 내보이지 말라고.

‘…있는 힘껏 강한 척하라는 거지. 연인 앞에서도 방심하지 말고.’

 사실을 들었을 때,
에일린은 살짝 겁먹고 말았다.
자신이 원하던 건 저런 가면 쓴 전장이 아닌, 쉴 수 있는 안식처였으니까.

 그래도 지쳐있던 에일린은 질척한 전장을 하나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남학생의 고백을 거절한 이유였다.

처음은 좀 행복할지 몰라도, 훗날 고통이 예정된 길.
연애 자체에 흥미도 재능도 없기에, 그 가면이 벗겨질 확률이 높은 길.
굳이 선택해야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니 에일린은 결심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홀로 부담감을 인내하기로.

- 터벅. 터벅.

“…후배님.  사실 겁나 쫄보다?”

“뭐야. 취했어요?”

“들어 봐. 교내 평가와 다르게… 별로 완벽하지도, 능력 있지도 않아. 음… 재능을  타고난 덕은 있네.”

“킥킥. 자랑인지 자아비판인지… 아무튼 말 안 해도 알아요. 선배님은 충분히 찐따라는 것.”

“……”

“쉽게 풀 죽고, 얼빵한 면도 있고,  겁쟁이인 것도 알아요. …아. 그래도 선배인데, 너무 대놓고 말했나?”

“풋. ‘그래도 선배인데’라니, 죽을래?”

에일린과 박찬영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 이런 면이다.
그녀가 후배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지는 이유는.

그가 에일린의 약한 면모에 실망하는 미래?
그런 건 도저히 연상 되지 않았다.
후배는 약간 짓궂은 면이 있으니, 약점 가지고 놀리면 또 몰라도.

알면 알수록 독특한 남자다, 반하기 전부터 그리 생각하긴 했다.
대부분이 기피하는 연금술에 흥미 있고, 평소 말투도 더 없이 털털하고, 당장 후배가 그녀들을 데리고 온 곳은 연기가 가득 찬 고깃집이다.
보통의 남자와 같이 비밀은 많은 것 같지만…
보통의 남자가 가질 법한 비밀은 아닌 것 같다.
 없는 동성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다가도,
누구보다 매력적인 이성을 곁에  것처럼 애달파진다.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그렸던, 그리고 찾는 것을 진작에 포기했던 이상형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에일린은 마음속으로 박찬영에게 사과했다.
그때 반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하여.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당장… 스킨십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이 손목잡기에도 온몸에 열이 오르는데… 안 그래?’

에일린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후배의 손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분명 지금 그녀의 동공에는 너무나 선명한 감정이 떠올라 있을 테니까.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입 밖으로 하진 않을 것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봤던 영화에 나온 말이다.
에일린은 이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어려운 일, 맞다.
비효율적인 일, 맞다.
그런데 이미 반해버렸는데 어쩔 거야?

첫사랑이다.
에일린으로선 포기할  없었다.
연인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후배의 마음을 돌려, 어떻게든 마음을 얻고  것이다.
가시밭길이겠지만, 골인 지점에 잠들어 있는 건 마지않던 보물.
그녀도 여자인 이상 도전해 볼 수밖에.

힘든 길을 피할  있다면 피하겠으나,
피할 수 없다고 덜컥 포기해 주저앉진 않으리라.
그것이 에일린의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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