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잘 저으면서… 많이 뜨겁지? 그래도 온도는 반드시 섭씨 70도를 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해.”
“별로 안 뜨거워요.”
“그래? 너 생각보다 터프하구나?”
에트나를 구워삶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당히 연금술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는 티를 냈더니,
오히려 활짝 웃으며 나를 공방으로 안내했으니까.
안내받은 공방은 의외로 1인실이었다.
TOP 5등 안에 드는 사람에게는 재료 지원뿐만이 아니라 개인 공방까지도 대여해주나 보다.
역시 돈을 많이 버는 과다웠다.
- 스윽. 슥.
나는 에트나와 데이지가 알려 주었던 것들을 상기하며 기다란 주걱을 저었다.
힘을 최대한 균일하게 주는 걸 의식하자.
‘그런데… 이 공방에 있는 장비들 다 한 가격 하려나? 탐나긴 하는데.’
시대상이 근현대에 가깝기 때문일까?
의외로 유용한 연금 설비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설정한 rpm으로 솥 안의 재료를 골고루 섞어주는 지구의 반죽 머신 비슷한 놈이라든지,
동물의 뼈 같은 단단한 재료도 순식간에 분말화시켜주는 사람만 한 크기의 믹서기라든지.
설정한 온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쭉 유지해주는 마공학 솥도 있다.
“벌써 10분째 젓고 있는데… 슬슬 팔 안 아파? 힘들면 언제든 저 설비들 사용해도 돼.”
“괜찮아요. 제가 최대한 장비의 도움 없이 해보고 싶다고 억지 부린 건데요, 뭘. 가능한 뱉은 말은 지켜야죠.”
허나 나는 저 모든 장비들의 힘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사용하는 것은 1M를 넘는 주걱과 온도계가 끝.
그 이외의 것들은 정 힘들 때만 사용하겠다고 에트나를 설득했다.
‘데이지 앞에서 실습 시험을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니까… 장비의 도움을 받아서 실력을 뻥튀기시켜봤자 의미 없겠지.’
사실 별로 힘들지 않다.
나는 에트나가 아는 보편적인 이 세계의 남성이 아니었기에.
재료를 손으로 빻는 것도, 주걱을 젓는 것도, 피부로 열기를 느끼는 것도 전혀 괴롭지 않다.
내 기준에선 극도의 힘 조절을 요구로 하는 일이니, 오히려 훈련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세계 기준 최첨단 연금 설비들.
사용하면 분명 편하겠지만, 절실하지는 않다.
온도계의 경우는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에 대한 감각을 좀 더 세밀하게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열기만으로 어느 정도 온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온도계도 뺀 채 오로지 주걱과 솥, 재료만 사용하여 연습할 것이다.
“후훗. 우린 의외로 잘 맞는 것 같다?”
“지금 꼬시는 건가요?”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내 바로 곁에 선에트나에게서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반사적으로 경계하고 말았다.
썸녀라고 해야 할까?
지금 한 명 밖에 없는데도 이리 골치 아픈데, 두 명이 되면 감당이 안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트나의 반응을 보니 정말로 그런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마구 흔드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곡을 찔린 사람은 아니었다.
“진정하세요. 농담이니까.”
“…큼! 잘 맞는 것 같다 한 이유는, 사실 나도 너랑 똑같이 주걱만 써서 연금술을 하거든.”
“에트나 선배님도요?”
“응. 손맛이라고 해야 하나? 기계를 쓰면 그런 게 하나도 느껴져서.”
“손맛… 그러고 보면 직접 무언갈 만드는 게 좋다 하셨죠?”
“맞아. 불 조절도, 주걱질도 기계에 맡기는 건 좀… 세밀한 마나 조절은 유동적인 판단이 필요하니 기계로 대체할 수 없지만, 결국 마나 주입을 빼면 연금술사가 하는 게 없단 뜻이잖아.”
“풋. 현대의 대부분 연금술사가 그럴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난 연금술이 직업인 동시에 취미니까.”
저 갈색으로 그을려진 피부는 노는 걸 좋아했기에 탄 게 아니라, 매일같이 불 앞에서 일하느라 탄 거였어?
흐트러진 옷들도 열기 때문에 더우니까 일부러 헐렁히 다니는 거고?
난 분명 노출을 즐기는 타입인 줄 알고 감사히 가슴골이나… 배꼽… 허벅지 같은… 여러… 말 못 할 눈 호강을 마음 편히 했는데.
‘으음… 전말을 알게 되니 좀 죄악감이 드는데. 보인다고 지적 한번 안 하고 조용히 감상했으니까…’
하긴.
이 세상의 남자들은 여자의 몸에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저리 무방비한 차림새를 할 수도 있지.
그녀가 의도해서 보여준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좀 덜 훔쳐봐야겠다.
훔쳐보긴 할 거다.
아무튼 에트나가 하고픈 말을 이해했다.
지구에서도 손맛을 느끼기 위해 낚시 장비를 기본적인 것만 챙기는 사람이 있으니.
완성도를 높여주고 시간을 절약해 줄 설비를 사용하지 않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나,
애초에 취미 생활에서 생산성을 따지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이를 생각해 본다면 에트나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먼 미래에 그녀가 취직한 뒤, 기업에 소속된 상태에서 취미 생활을 이어 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넌 왜 기계의 힘을 빌리기 싫은 거야? 나야 몸이 힘든 것도 즐기는 수준이지만, 보통은 안 그러잖아.”
“으음… ‘연금술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해야 제대로 체험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고정 관념 때문에?”
“푸하핫! 확실히, 네 말대로 두 손으로 연금술을 해내면 와닿는 게 다르긴 하지! 그런데… 좀 꼰대 같다. 킥킥.”
“이게 왜 꼰대입니까? 누구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고, 제가 생각한 것을 제게 한정해서 적용하는 것뿐인데.”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애늙은이 같다는 거로!”
억울하다.
본인은 나랑 달리 두 손으로 연금술을 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나만 애늙은이 취급이라니…
20대 초반의 나이로 손맛의 즐거움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에트나야말로 애늙은이 아닐까?
하지만 난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째서냐면…
남녀 관념이 뒤바뀐 이 세계를 실감한 뒤, 더 신경 쓰게 된 내 남성성을 위하여.
‘정말… 다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어…’
지난번에 스쳐 지나가듯 이 세계의 ‘남자’ 그룹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같이 화장실에 가는 중인 듯했다.
다섯쯤 되는 무리가, 서로 어깨가 닿는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거리에서, 조곤조곤한 언성으로 잡담을 나누면서.
그야말로 지구의 여학생들이 겹쳐 보이는 광경이었다.
마치 카페에 앉아 음료와 마카롱 한 개를 주문한 뒤,
마카롱을 나이프로 다섯 조각을 내 서로 한입씩 나눠 먹을 것만 같다.
그걸 보고 내가든 생각이 뭔지 아는가?
바로 ‘난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였다.
반 장난삼아 이쪽 남자와 동화되어 저리 행동하게 된 나를 상상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걸 본 뒤부턴 의식적으로 내면의 남자다움을 찾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남자라면 말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겠으나,
아름다운 여성이 상대라면 관용을 보이기로 했다.
“이제 절반쯤 왔죠? 조금만 더 견디면 제힘으로 완성하겠네요.”
“뭐… 내가 말은 그렇게 했는데, 지금이라도 저 설비를 사용하는 게 어때?”
“네? 왜요? 제가 끝까지 손으로 한다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으음… 조,좀 부끄러운 이유인데…”
“부끄러운 이유?”
방금의 대화에서 부끄러운 답이 나올 경우의 수가 있나?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다.
다행히 잠깐을 망설이던 그녀가 곧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맨 처음부터 그 분야에 대해 힘들단 기억이 심어지면, 저절로 피하게 되잖아? 비록 네가 연금술사의 길을 선택하진 않더라도, 좋은 기억은 남았으면 해서…”
에트나가 쑥스럽다는 듯 볼을 긁으며 웃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의 한마디로 알았다.
그녀가 얼마나 연금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그,그게… 요즘 연금술에 대한 인식이 좀 너무하잖아? 모두의 고정관념과 달리 엄청 재밌고, 흥미롭고, 보람찬 분야인데! 몸이 힘들단 것도 옛말이지, 저 장비들처럼 다 현대화가 끝나서 다른 전공에 비교해도 거기서 거기란 말이야!”
“……”
“누구든 소중히 여기는 게 비웃음당하는 건 싫잖아. 나도 한 명의 연금술…사…?”
열변을 토하던 에트나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작은 놀람과 알 수 없는 감동에 빠져 그녀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는데,
내 감정이에트나에겐 다르게 읽혔나 보다.
예를 들어 좀 질려 하는 눈으로 보였다든지.
“……아아앗?! 미,미안! 친구들에게 가끔 주의받긴 한데, 가끔 나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연금술 오타쿠 같은 행동이… 으아… 쪽팔려…”
“……선배는…”
“나?”
“에트나 선배는, 연금술에… 엄청 진심이시네요.”
“히히. 맞아. 말하기 부끄럽지만, 인정받는 연금술사가 되고 싶어서!”
사랑을 하는 여자는 더 아름다워진다고 했나?
난 방금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했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닐 뿐.
자신이 걸어갈 길을 사랑하는 에트나는, 진심으로 빛나 보였다.
그녀와의 유대가 더 쌓이기 전에 이런 면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만약 조금 더 에트나와 친해진 뒤 방금의 진심을 들었다면…
꽤 곤란했을 수도 있었다.
반할 뻔했거든.
자신의 길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가진 사람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매력 있었다.
“저, 오늘처럼 연금술을 해보기 위해 이곳에 놀러 와도 될까요?”
“정말? 언제든 환영이야!! 네게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혹시 내가 연금술을 알려줘도 될까?”
“오. 그 정도로 자신 있으세요? 선배님도 전공을 정하게 되는 2학년이 되신지 얼마 안 됐으니까, 연금술을 접하게 된 지 몇 주 안 지났을 텐데.”
“후후, 틀렸습니다. 난 이미 국가가 공인한 연금술사인걸?”
- 척!
에트나가 내게 카드 한 개를 내밀었다.
카드에는 특이하게도 에트나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가장 위쪽에 적힌 검은 글씨는…
국가 기술 자격증?
“난 이미 연금 기사 자격증이 있거든!”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위상은 모르나,
이토록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쉽게 따지는 못하는 자격증인 것 같다.
- 끼이익.
“역시. 여기 있었구나? 후배님.”
그때.
내 의문을 풀어줄 사람이 1인 공방의 문을 열고 등장했다.
에일린이었다.
“저거 대단한 거다? 쟤 연금 기사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 중 최연소니까.”
에일린은 내 손에 들린 연금 기사 자격증을 힐끗 본 뒤,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녀가 인정할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에겐 인정받는 자격증이란 뜻이다.
“에일린?! 너가 왜 여기에…”
“후배님이 동아리실에 없길래, 납치범은 뻔하다 생각돼서 와봤지. 그리고 봐봐. 정답! 반가워 후배님.”
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무래도 동아리실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안 오길래 걱정돼서 직접 찾은 모양이다.
쪽지라도 남길 걸 그랬나?
“연금 기사가 그만큼 대단한가요?”
“으음… 기사 등급부터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거든. 쟤는 좀 중증 오타쿠라. 변태 수준이지 뭐.”
내심 에트나의 능력을 인정하긴 하나,
입으로 칭찬하긴 죽어도 싫나 보다.
역시 꽤 친한 친구다웠다.
“후후! 그거 알아? 에일린도 기사 등급의 자격증은 없다? 얘는 내 밑이란 거지!”
“…나도 응시 조건만 되면 딸 수 있거든? 어?”
“풋. 그건 따고 나서 말해야 설득력이 있는 말이고.”
지고만 있기 싫었던 에트나가 혀를 빼물며 놀렸다.
유치하게도 논다.
그런데 에트나에게 있는 것이 에일린에게 없다니,
만능형인 그녀라면 대충 ‘원소 마법 기사’ 같은 자격증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다.
“에일린 선배님은 기사 자격증이 없으신가요?”
“내,내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야! 기사 자격증은 최소 1년을 실무에 종사한 사람만 응시할 수 있거든! 쟤가 괜히 최연소가 아니라니까? 얜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고! 아주!”
“네? 에트나 선배님은 아직 미성년자에 학생인데 도대체 어떻게 조건을…?”
“킥킥킥. 그러니까 ‘아주’ 특수한 케이스란 거지. 야. 에트나. 말해? 말한다? 후배님, 쟤 사실… 말도 못 할 지독한 편법을 사용… 으억?!”
“야! 좀 닥치자!”
- 퍽!
에트나의 주먹질을 시작으로 두 명의 여성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어떠한 편법을 사용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에트나에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다는 뜻이다.
내게 중요한 정보는 그것이다.
그녀가 날 가르칠 수준은 확실히 된다는 것.
그렇다면…
“에일린 너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에트나 선배님. 제가 연금술 도중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어? 정말로 연금술을 제대로 해보게?”
“정석적인 교과서 루트를 밟을 생각은 아직 없고, 제가 배우고 싶은 부분만 쏙쏙 골라서 배워보고 싶어서요. 음… 너무 이기적인가?”
“당연히 괜찮지! 무언가를 처음 배울 땐, 본인이 흥미를 느낀 부분을 먼저 배우면서 첫인상을 재밌다 각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거든!”
에일린이 불만 어린 표정을 했지만,
오늘 나눈 이 이야기는 전에 그녀와 한 적이 한 번 있는 이야기다.
갑작스러운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세계에서 한 명의 스승을 더 얻게 되었다.
메인은 결코 아니고, 간단한 것을 물어보는 서브 스승의 위치지만.
어쩐지 심통이 잔뜩 난 남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만약 데이지가, 내게 또 다른 연금술 스승이 생겼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할까?
‘아마 죽도록 화내겠지. 내 어디가 부족하냐면서.’
모든 전문가가 그렇듯 데이지 역시 자기 분야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 만큼 내 외도 아닌 외도를 용서할 리 없다.
이 사실은 비밀로 하자.